소설리스트

89. 거짓말쟁이들 (89/210)


#89. 거짓말쟁이들
2022.07.07.



“렘브란트 경.”

렘브란트는 후작이 무어라 말을 더하기도 전에 훅 가까이 다가가 후작의 손을 잡았다.


“후작 각하. 맙소사,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

항상 예의 바르게 느긋하고 여유롭던 렘브란트가 이렇게 다짜고짜 자리에서 일어나 용무부터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내용에 후작은 멈칫했다.

무슨 말이지?

심려가 크긴 하지만 그걸 렘브란트가 어떻게?


“긴급한 상황 같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급히 청했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후작의 눈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왠지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렘브란트 경이 뭘 알고 나에게 이런 말을?


“렘브란트 경, 지금 무슨 말씀을…….”

그리고 렘브란트는 염려 가득한 눈으로 폭탄을 던졌다.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께서 납치되셨잖습니까?”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네?”

순식간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뭔가 잘못되었다.

렘브란트 경이 뭔가 본 건가?

후작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더듬거렸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리고 애써 미소 지으며 태연한 척했다.


“……크리스티나는 납치되지 않았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요.”

후작이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오늘 저택에서 소동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크리스티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오해십니다.”

일단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흔들림 없이 후작의 눈을 보며 말했다.


“큰 소동이 벌어질 일이라 아직은 외부에 숨기시는 것인가 보군요. 저에게까지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라진 분이 레이디 크리스티나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말을 하는 것이 오늘 이 방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확신에 찬 틀린 정보에 후작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렘브란트에게 뭔가 근거가 있기에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된 거지? 크리스티나를 본 적 없을 텐데?

확인하기 두려웠지만, 후작은 입가를 경련시키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렘브란트는 탄식하듯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레이디를 납치해 나가는 마차를 제 눈으로 봤습니다. 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목격했음에도 막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사들이 추격하는 걸 보고 저도 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만, 결국 제 사람들도 놓치고 돌아왔습니다.”

후작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그 마차에 탄 사람을 보고 제 딸이라고……. 겨, 경께선 제 딸아이를 본 적도 없으시잖습니까.”

렘브란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실례인 줄 압니다만. 사실 뵌 적이 있습니다.”

“!”

그리고 그는 후작에게 가져온 것을 내밀었다.

렘브란트가 내놓은 크리스티나의 그림에 후작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레이나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저 스케치였음에도 신문의 삽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또렷했다.


“제가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창가에 레이디가 나와 계셔서 한 번 본 적이 있거든요. 레이디는 절 보지 못하셨습니다만……. 그때 연습 삼아 그려 본 적이 있었습니다.”

“!”

신방에 있을 때? 얼굴을 봤다고? 심지어 그렸다고?

후작의 입이 벌어졌다.

렘브란트의 일행이 머무는 별채는 레이나가 있는 본관의 신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운이 좋다면 충분히 신방의 레이나를 목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렘브란트는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눈썹을 꺾어 짙은 근심이 담긴 염려를 표했다.


“하지만 허락을 구하지 않고 그렸으니 예의도 아닌 것 같고 실례일까 싶어 그만두었는데요.”

“…….”

렘브란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한 번 그려 봤던 분이기 때문에, 마차로 납치된 것이 그분이라는 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

렘브란트가 말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도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이 그림은 혹 필요하다면 레이디의 행방을 수배하는 데 쓰임이 있을까 하고 가져왔습니다.”

“…….”

그림을 받아드는 후작의 얼굴은 감격하고 고마운 척하려고 애쓰는 당혹감으로 얼룩져 있었다.

렘브란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된 건가.

후작은 이제 렘브란트가 이 얼굴을 ‘크리스티나’로 안다는 걸 안다.

이제,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고 크리스티나를 돌려놓은 뒤 시치미 떼지는 못할 것이다.

최소한 내가 그녀의 존재를 안다는 걸 마음에 걸려 하겠지.

사정을 전부 털어놓고 내게 침묵해 주길 부탁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 인멸을 강행하든, 모두 가능성은 있으나…….

차라리 해명하길.

아니면 좀 더 극단적인 방법으로 당신을 추궁해야 할 테니.


“…….”

렘브란트는 마차에서 몸부림치며 괴한들에게 끌려가던 레이나를 보고 숨이 멎을 듯이 놀랐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동안은 레이나의 뜻을 존중해 드러내지 않고 천천히, 하인들을 깔며 물밑에서 도와주려 했었지만.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움직여야 할 때였다.

* * *

저쪽도 제법이네.

뻔히 그녀의 사정을 알면서.

크리스티나라고.


“…….”

부인만 빼고 다들 거짓말에는 선수로군.

아서는 오러를 거두어들이며 피식 웃었다.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납치한 게 이쪽이라는 걸 눈치채이면 제법 나쁜 놈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서가 트리스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렘브란트 경이 후작과 대화했다. ‘크리스티나’가 납치된 걸 봤다고 말했어. 이전에 내 아내를 본 적 있어서 알아봤다고. 후작이 증거를 인멸하려고 한 짓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후작은 당황하고 있고.”

트리스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각하. 오러를 쓰고 계십니까?”

“괜찮아. 무리 안 했어.”

즉시 잔소리가 쏟아졌다.


“전시(戰時)도 아닙니다. 당장 그 두 분의 대화를 듣는 것이 꼭 필요한 상황도 아니었고요. 더 이상 그걸 쓰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각하의 시력을 어떻게든 되살릴 수 없는지 알아보고 있는데, 노력하는 부하들은 속 탑니다.”

제법 속이 상해 울컥한 기색이었다.


“……알았어.”

전시가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

꼭 필요한 도청이 아니었다는 데에는, 일부 동의.

그래도 상대의 포석을 알 기회가 있을 때는 오러를 써서 알아 두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

저들 사이에 들으면 좋을지도 모를 대화가 있다는 정보도 항상 있는 게 아니니까.

어지간하면 그런 정보가 있을 땐 도청을 하는 습관이 들어 있긴 하다.


“그래도 도청할 만한 대화가 있을 땐 도청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

아서가 헛기침을 했다.


“……잔소리 그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오고 있다.”

“네.”

잠시 후.

렘브란트가 아서에게 만남을 청한다는 기사의 전언이 정해졌다.

황태자의 주선으로 네 사람이 반강제로 함께했던 그 날의 만남 이후, 공식적인 첫 대면이었다.


 

* * *

둘은 담백하게 악수했다.


“……찾으러 가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렘브란트의 첫인사였다.

레이나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서는 딱히 숨기지 않은 채 눈썹을 으쓱하며 답했다.


“부하들을 보냈습니다. 제가 직접 찾는 모습을 보일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요. 후작가와의 관계도 있고.”

냉정하고 침착한 대답에 렘브란트가 조금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독대하여 뵙는 것은 처음인데 첫마디로는 좀 부적절했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러실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렘브란트는 아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가울 정도로 침착하네.

그녀를 좀 더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난번 만남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독점욕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아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아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부하들에게 들었습니다. 상황을 직접 목격하셨다고요. 아마 그것 때문에 방문해 주신 것인가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렘브란트는 아서의 모습을 보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왠지 좀 더 화가 나 있거나 초조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렘브란트는 아서에게 자신이 본 것과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아서는 조용히 듣고 감사를 표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적인 반응이었다.

생각한 것과는 사뭇 다른.


“……자리에 있었음에도 일이 벌어지는 걸 막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 기사들이 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아서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에 주신 제안도 감사드립니다. 진작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아서가 잠시 틈을 두고 덧붙였다.


“하녀들을 보내주시겠다는 제안은 감사했습니다. 그 제안은 괜찮다고 말씀드린 건, 후작 부인이 보기에 불편할 것 같기도 하고 급하게 필요하지는 않아 사양하게 되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셨다면 다행입니다.”

“급했다면 부탁드렸을 겁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렘브란트는 깍지 낀 손을 만지작거리며 짧게 망설이다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카일 황태자로부터 당신의 편의를 살펴주기를 부탁받았습니다. 제게 당신의 신뢰를 얻을 만한 역량이 있어,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황후의 감시책으로 의심하고 있겠지만, 솔직하게 당신을 염려하며 황태자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아서는 짧게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미소 지었다.

조금 더 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네.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

렘브란트는 그에게 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서가 빙긋 웃으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럴 만한 단서는 없었음에도 렘브란트는 거의 확신했다.

……레이나는 무사하다.

아서가 이미 뭔가 했다.

아마 내가 한 것보다 확실한 안전장치를, 후작에게.

어쩌면 이 사람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에게 돌아가기 전에 ‘레이나 아스타린’을 안전하게 만들 준비를 이미 해 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크리스티나는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찌그러뜨리며 반문했다.


“레이나가…… 뭐?”

“그러니까…….”

집사장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납치된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싸늘한 눈으로 그를 깔아보았다.


“자세히.”

집사의 말이 이어졌다.

자리에 선 채 모든 이야기를 들은 크리스티나가 실소하며 시가에 불을 붙였다.


“…….”

하아.

이건 생각을 못 했네…….


“…….”

그리고 싸늘한 시선이 집사장에게로 향했다.


“설마 어머니나 아버지 짓인데 내가 몰랐던 건 아니겠지? 그럼 내가 자네를 신뢰할 이유가 없게 돼.”

집사장이 질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닐 거예요. 부인께서 그러셨다면 아가씨와 상의하셨을 것입니다. 정황상 주인어른도 아닐 거고요. 두 분도 이 일에 무척 화가 나서 싸우고 계십니다. 제삼자의 소행 같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싸늘하게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화난 얼굴로 묵묵히 시가 하나를 다 태운 뒤 말했다.


“목격자 진술 정리되면 나한테도 가져와요. 그리고 테일러 로렌슨, 브로디 행방 파악해.”

집사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재떨이에 시가를 비벼 끄며 덧붙였다.


“레이나의 할머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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