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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레이나가 사라진 저택 (88/210)


#88. 레이나가 사라진 저택
2022.07.03.


마틸다의 머릿속은 아주 바빠졌다.

……그 애가 저절로 사라졌다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후작은 돈으로 해결하고 아서한테 떵떵거릴 생각이었으니 그런 일을 꾸밀 계획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티나도 그 애를 처리하자는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일을 꾸밀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애가 사라졌다면 이쪽이야 좋다.

아서가 그 애를 틀어쥐고 집안을 멋대로 휘젓는 것이 이만저만 골치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후작이 아서의 요구를 모조리 들어준 참이니 아서가 이제는 크리스티나를 받아줄 거라고 기대하곤 있지만,

사실 그놈을 어찌 믿는가?

여전히 약점을 잡혀 있는 건 우린데.

하지만 일단 레이나가 없는 상황이라면, 아서는 다시 그 애를 적극적으로 찾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원래 있던 것을 없애는 것이 어렵지 이왕 없는 것을 내버려 두는 건 쉬운 법.

그럼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도 쉬워질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행방을 모른다는 건 결국 아서 옆에 있다는 것만큼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후작 부인은 하녀장 허스트 부인을 가까이 불러 지시했다.


“입이 무거운 경비병들을 시켜서 레이나가 정말로 없어졌는지 알아봐. 납치된 곳에 남아 있는 흔적이나 단서가 없는지도 찾아보라고 해.”

“네.”

브로디의 눈이 흔들렸다.

후작 부인의 지시가 왠지 모르게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 후에야 후작 부인은 브로디에게 가장 먼저 물어야 했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너, 그때 레이나랑 같이 있었니? 기사들이 레이나를 지키고 있지 않았어? 어떻게 된 거야?”

“!”

“설마, 아서도 없는데 걔 혼자 밖에 나갔던 거니? 기사들은 뭐하고?”

브로디는 긴장한 채 숨을 멈췄다.


 
대답 잘해야 한다고 본능이 소리쳤다.

레이나가 마지막으로 케이 경을 만난 후에 마차를 탔다는 게 중요한 단서처럼 떠올랐지만, 브로디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안 돼. 그걸 말하면 추궁당할 거야!’

레이나의 외출을 가볍게 여기고 보고하지 않은 건, 그런 외출이 이미 한 번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브로디가 마차로 가지고 내려간 건 같이 법원 앞 드레스숍으로 외출했던 날 샀던 할머니 옷이었다.

이걸 말했다간 레이나가 외출한다는 걸 알고도 후작 부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일전의 드레스숍 외출 건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던 것도 줄줄이 털어놓아야 한다.

브로디는 순간적으로 잡아뗐다.


“아아뇨! 저는 아침에 방에 가서 아가씨 옷만 갈아입혀 드리고 나와서 그 후엔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마차는 밖에 나가다 우연히 보게 됐어요! 저도 너무 놀라서 마님께 말씀드리러 온 거예요!”

엉겁결에 레이나를 아가씨라고 해 버렸지만 깨닫지도 못했다.

브로디는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후작 부인은 믿을 수 없다.

반드시 레이나와 기사분들한테 의탁해야 해!

그때, 집사장 짐이 들어와서 당황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마님. 케이 경이 기사분들과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만남을 청하고 계십니다.”

브로디는 깜짝 놀라 집사장 쪽을 바라보았다.

* * *



“그러니까. 모르는 일이시라구요?”

후작 부인은 당황했다.

왜 내가 추궁을 당하고 있는 거지?

그것도 군인들과 기사들 앞에서?


“아니……. 그러니까, 북문은 원래 사람이 잘 오가지 않아서 그냥 닫아두는 문이라니까요. 원래 경비병들이 지키는 문이 아니에요.”

후작 부인은 마차가 사라진 북쪽 출입문이 경비병 없이 열려 있었던 이유에 대해 기사들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케이는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가장 높은 관리인처럼 말이다.

갑자기 응접실을 가득 채운 다수의 군인들에게 위축된 후작 부인은 저택의 경비 소홀을 추궁당하는 책임자처럼 케이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북문은 항상 잠겨 있는 문이에요. 이 너른 저택에 문이 한두 개도 아닌데, 열 개가 넘는 모든 문을 항상 개방해 놓고 경비병을 상시 배치할 수는 없잖아요. 닫아두면 벽이나 다름없는데…….”

“인력이 없어 경비병을 배치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후작 부인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게 아니라, 잘 사용하지 않는 문들은 원래 그냥 잠가두고 다른 문들만 경비를 하기도 한다구요! 제가 경비를 두지 말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경비대장이 그렇게 했겠죠. 용무가 없을 땐 항상 닫혀 있는 곳이니까!”

케이는 후작 부인에게 질문하는 기사들을 쓱 한 번 본 뒤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용무가 없을 때는 항상 닫혀 있다고요.”

“네!”

“열려 있었는데요, 활짝. 이번엔 무슨 용무였을까요?”

후작 부인은 순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버럭 소리쳤다.


“모르죠, 난!”

다음으론 당혹감이 밀어닥쳤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요?”

케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저희로서도 저택의 안주인이신 부인을 믿어 드리고 싶지만, 부인의 주장과 달리 그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탈취된 마차는 그 문을 통해 저지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고요. 그리고 북문은 아서 경의 구역이 아니었습니다. 후작가의 책임이 있는 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쭤본 겁니다.”

그래서 그 납치에, 내가 관여했다는 거야?

후작 부인은 억울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말을 섞을 가치가 없군요!”

후작 부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납치범들이 미리 계획했나 보지요! 저택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문을 열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북문은 우리 구역이었지만, 그 마차가 처음 납치된 건 아서 경 구역이었잖아요!”

가볍게 실소하며 케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택에 납치범이 들었는데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는군요.”

“!”

“‘다른 사람’에게 벌어진 일이었어도 그러셨을까 하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기도 하고.”

뒤편에 있던 다른 기사가 자기들끼리 혼잣말 하는 척 말을 보탰다.


“그런 거에 비해 많이 파악하고 계시기도 하고.”

“총사령관 각하께서 후작님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저택 내에서 기사들의 경계 수준을 부드럽게 낮추자마자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 거고요.”

“……!”

케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피식 웃었다.


“실망스럽네요.”

“네?”

케이가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저희는 후작님께서 근래 해 주신 일이 아서 경께 진심으로 사과의 표현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믿을 만한 동반자로서 품위 있게 행동하시리라 믿고 있었죠.”

“!”

케이는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후작가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후작 각하께서 보여주신 호의와 오늘 두 분의 외출이, 결국 화해가 아니라 증인을 빼돌리기 위한 계획이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후작 부인은 기함했다.


“말도 안 돼요!”

아서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겨우 그 애를 빼돌리고 이런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가 아서의 요구를 수용했다고?

차라리 아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배포 크게 선심을 썼다는 쪽이 낫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있냔 말이야!


“후작 부인께서 그러셨다는 게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상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케이는 담담한 태도로 대화를 맺었다.


“총사령관 각하께서는 그리 생각지 않으실 수도 있겠죠.”

“!”

그리고 케이는 짧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각하와 함께 다시 뵙겠습니다.”

정중하지만, 존경이 담겨 있다곤 보기 힘든 태도였다.

떠나가며 케이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아서 경의 구역에 경비병들을 보내셨더군요. 일단 그들은 물렸습니다. 아무래도, 증거를 인멸하려 든다는 선의의 오해를 사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황망해진 후작 부인을 뒤에 남겨 두고, 기사들은 응접실에서 빠져나갔다.

* * *

분기탱천한 후작이 시뻘게진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오며 소리쳤다.


“당신, 걔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후작 부인의 얼굴이 퍼레졌다.

후작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후작이 한 짓이 아니다.

심지어 후작은 그 멍청한 짓을 후작 부인이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걔 어쨌어. 당장 걔 데려와!”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후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일갈했다.


“다 된 상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당신이 이러면 내 입장이 뭐가 돼!”

후작이 격노해 삿대질을 해댔다.


“맘에 든다면 걔를 정부로 들여도 좋다고까지 얘기했는데 그러자마자 당신이 걔를 빼돌려 버리면! 아서가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뭐? 정부?

후작 부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어련히 아서가 크리스티나를 받아들이도록 잘 말하고 분위기를 풀고 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이 여편네가! 그게 크리스티나를 위한 일 같아?!”

 

* * *

아서는 조용히 빈 침실을 바라보았다.


“…….”

창가에서 가을바람이 들어와 하늘하늘한 커튼이 흩날렸다.


「아서 경.」


「오셨어요?」

 


“…….”

사람의 빈자리는 익숙했다.

전쟁을 치르며 어제 있던 사람이 오늘은 없는 상황이야 수도 없이 겪었으니.

레이나가 방구석에 숨겨 둔 뜨개질감과, 잠겨 있는 보관함 안에 혼인 계약서를 끼워 둔 노트 따위가 오러를 통해 느껴졌다.


“…….”

이렇게 그 사람의 빈자리에 남겨진 물건들을 볼 때가 가장 이상하다.

짧은 애도를 건네는 시간.


“…….”

귀걸이는 하고 갔다.

새로 맞춘 옷을 입고 갔는지 하나가 빈다.

할머니의 옷은, 미처 챙겨가지 못했군.

재주문을 해서 보내주거나, 챙겨서 보내거나…….


“…….”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아서는 덤덤히 레이나가 남긴 흔적들을 체크했다.

케이가 들어와 그를 불렀다.


“각하.”

“어떻게 됐어?”

후작과 후작 부인이 노발대발하며 싸움을 벌이는 소리가 펼쳐둔 오러 속에 들려왔다.

넓게 펼친 오러 속에 그녀는 없다.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케이가 보고했다.


“레이디는 무사히 도착해 할머님과 함께 있다는 소식 전해졌습니다. 오늘은 루칸 경이 그곳에 남을 거고, 리오넬 경이 저녁에 돌아와서 상세 보고할 겁니다.”

“별일은 없었고?”

“네. 납치 과정 초기에 따라붙은 놈들이 있었으나 도중에 전부 무난하게 떨구어 냈습니다. 저택 바깥에서 따라붙기 시작해 끈질기게 굴었던 수상한 자가 있긴 했습니다만, 떨어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감시인을 붙여 놨습니다.”

케이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 외에 특이사항으로는, 저택 내 목격자로 ‘렘브란트 경’이 계셨습니다. 납치를 목격하신 것 같습니다. 후작과 면담을 신청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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