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어떤 시간을 보냈나
(87/210)
87. 어떤 시간을 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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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어떤 시간을 보냈나
2022.06.30.
“우리 아가. 누가 이렇게 울렸어?”
할머니가 근심 어린 눈으로 손을 들어 레이나의 양 뺨을 감쌌다.
레이나는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활짝 웃었다.
“……할머니가 울렸어.”
“할미가?”
“응.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나 봐.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눈물이 났어.”
“으이구. 우리 강아지는 아직도 아가여. 이래서 어떻게 시집을 보내.”
늘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갑자기 새삼스럽게 들렸다.
요즘 따라 결혼해야 하지 않냐는 사람이 많아선가.
레이나는 웃으며 할머니 품에 폭 머리를 기대었다.
“가긴 어딜 가요. 난 할머니랑 계속 살 거야.”
할머니가 투정 부리듯 중얼거렸다.
“나는 싫여. 시집도 안 간 손녀 딸내미랑 계속 사는 거.”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레이나는 할머니 앞에서 언제나 어른스럽고 씩씩한 모습만 보여 왔었다.
하지만 왠지 오늘따라 레이나는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다.
레이나는 할머니 품에 머리를 비비며 웃었다.
“좋으면서.”
몸에 온기가 돌았다.
“할머니 보고 목소리 들으니 너무 좋다. 할머니 잘 계셨어요?”
할머니가 레이나의 머리를 만져 주며 대답했다.
“할미는 잘 있었지. 우리 강아지가 고생이지. 우리 강아지는 일 보내 놓고 할미는 아주 잘 있었잖여.”
레이나는 입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매달고 고개를 반짝 들며 말했다.
“아닌데. 나야말로 엄청 잘 있었는데? 내가 할머니보다 더 잘 있었을걸?”
할머니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잘 있기는. 남의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레이나는 할머니에게 안긴 채 웃었다.
“진짜 잘 있었어요. 내 평생 다시 못할 호사를 다 하고 왔거든요. 할머니는 내가 얼마나 잘 지내다 왔는지 상상도 못 할걸?”
“거짓부렁…….”
레이나는 짐짓 자랑하듯 할머니에게 기댄 몸을 흔들었다.
“진짜로. 할머니랑 같이 못 한 게 미안할 정도로 좋은 거 먹고, 좋은 침대에서 자고, 좋은 옷만 입고. 그러고 왔는데?”
왠지 목이 메었다.
레이나는 제 등을 안아주는 할머니의 왼쪽 손등에 십자 흉터를 쓰다듬었다.
할머니의 손을 잡을 때마다 하는 레이나의 버릇이었다.
레이나는 비밀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였다.
“나 정말 너무 잘 지냈어요, 할머니.”
“참말?”
“응, 참말.”
“어찌 그랬어?”
“그건 비밀.”
“할미한테도 비밀이여?”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응. 비밀이니까 낮엔 안 돼요. 밤에 얘기해 드릴게요.”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앉아 할머니 품에 안긴 채 레이나는 담요와 함께 할머니의 무릎을 덮고 웃었다.
밖에서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온 테일러가 물끄러미 그들을 보고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지었다.
레이나가 부은 눈으로 웃는 걸 보고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밥은, 먹었어?”
* * *
부엌에서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짙은 버터 향에 밀가루 반죽이 익어가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샌드위치 하나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레이나가 할머니 품에 안겨 따듯한 우유를 마시는 동안 테일러가 버터를 얹은 팬케이크를 만들어왔다.
와.
탄식이 나왔다.
“……냄새 너무 좋다.”
내내 긴장해 있었던 탓인지 허기를 잊고 있던 위장이 급작스러운 맛있는 냄새에 저것도 내놓으라며 아우성을 쳤다.
레이나가 테일러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할머니가 좋아하신다는 그 팬케이크야?”
“응. 그 팬케이크야.”
테일러가 그들 앞에 팬케이크에 버터와 메이플 시럽, 생크림이 올라간 접시를 놓아 주었다.
냄새 정말 환상적이야.
그걸 그렇게나 좋아한다는 할머니는 포크로 그걸 폭 찍더니 레이나의 입에 먼저 쏙 넣어주었다.
반쯤 녹은 따끈한 버터가 포슬포슬한 팬케이크에 촉촉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
맛있어.
진짜 맛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맛이.
고소하고 풍부한 버터 향에, 사이사이로 달콤한 메이플 시럽과 위에 얹힌 신선한 생크림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천상의 맛이었다.
레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테일러를 쳐다보았다.
“……!”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테일러가 이렇게 요리를 잘했나?
왜 할머니가 이걸 자꾸 찾는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후작 저택에서 먹었던 그 어떤 디저트도 이것보다 충격적이지 않았다.
“네가 직접 만든 거야?”
테일러가 피식 웃었다.
“맘에 들어 하는 걸 보니 할머니랑 입맛은 비슷하네.”
다시 포크가 움직였다.
“할머니. 할머니도 아.”
이번엔 레이나가 할머니 입에 팬케이크를 넣어 주었다.
오물오물 팬케이크를 드시던 할머니가 문득 테일러를 보며 물어보았다.
“근데 자네는 누구여?”
테일러는 웃으며 대답했다.
“테일러 로렌슨입니다. 할머니 팬케이크 만들어 드리는 요리사요. 가끔 의사도 하고요.”
뭐라는 거야.
레이나는 테일러의 주객이 전도된 자기소개를 듣고 웃어 버렸다.
“그려? 의사인데 요리사여?”
“네. 제가 재능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 포기를 못 했네요.”
할머니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팬케이크를 오물거렸다.
“으응. 그럴 수 있지. 자네 솜씨가 좋아. 훌륭혀.”
레이나는 한입 더 팬케이크를 떠먹으며 속으로 동의했다.
팬케이크는 정말 팔아도 되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 자주 와도 되나요?”
“자네 안 비싸?”
출장비를 묻는 거였다.
테일러는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아……. 저 비싸요.”
“그럼 자주 오지 말어. 할미 돈 없어.”
테일러는 자세를 낮추고 킥킥 다정하게 웃으며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전 할머니 자주 뵙고 싶은데.”
할머니가 못 들은 척 노골적으로 테일러를 외면했다.
레이나는 프흡 웃음을 터뜨렸다.
테이블 모서리를 짚고 앉은 테일러가 할머니의 외면에 머쓱한 듯 머리를 만졌다.
테일러가 할머니를 회유했다.
“할머니, 저 할머니한테는 안 비싸요. 저 레이나랑 친구여서요.”
할머니가 다시 테일러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리 아가 친구여?”
“네.”
“남자친구여?”
테일러는 그냥 웃었다.
“아뇨. 남자친구는 아니에요.”
“왜 아니여? 우리 레이나가 자네 싫어해?”
레이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할머니, 아니에요. 남자친구는 아니고 그냥 친구. 제일 친한 친구예요.”
“으응. 그럼 자주 와도 돼.”
테일러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네, 할머니. 고맙습니다. 자주 올게요.”
이미 매일 오고 있지만 말이다.
* * *
“레이나가 끌려가? 누구한테?”
“모, 모르겠어요! 시커먼 복면을 쓴 놈들이었어요. 마차 안에도 여러 명, 아, 그리고 마차를 모는 놈도 이상했어요. 레이나가 벗어나려고 막 몸부림을 치는데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마차에 태워서 끌고 갔어요!”
브로디는 발을 동동 구르며 레이나와 괴한들이 탄 마차가 북쪽 쪽문으로 달려갔다고, 경비병들을 보내느냐고, 아니면 기사들을 보내느냐고 숨 가쁘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보고를 들은 후작 부인은 아무 명령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선 채 침묵했다.
브로디는 그제서야 자신이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퍼뜩 입을 다물었다.
후작 부인 입장에선 굳이 경비병을 동원하거나 애를 써가며 레이나를 찾을 이유가 없는 건가?
후작 부인이나 레이나는 직접 말해 준 적 없었지만, 브로디와 마리나는 레이나가 크리스티나 대역을 한 상황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후작 내외가 레이나의 일을 조용히 묻고 싶어 하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님은 떠들썩하게 레이나를 찾고 싶어 하지 않을 거다.
그 점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브로디가 순간적으로 멈칫한 건,
어쩌면 조용히 찾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후작 부인은 그냥 이대로 레이나가 사라져 주길 바랄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후작 부인이 사주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데에도.
브로디는 자신이 찾아올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닫고 창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후작 부인의 입장에서는 ‘레이나’가 거슬리는 존재일 것이다.
레이나를 구하고 싶었다면, 마님이 아니라 기사분들을 먼저 찾아가야 했다.
케이 경이나, 리오넬 경이나,
아서 경을.
갈 곳을 잃은 눈으로 후작 부인을 바라보는 브로디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후작 부인이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
“그 애가 어디서 납치됐니?”
브로디가 퍼뜩 놀라서 물었다.
“네?”
질문이 이어졌다.
“걔가 납치되는 걸 본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지?”
브로디는 바짝 긴장했다.
설마, 나…… 지금 좀 위험한 거 아냐?
브로디의 머리가 생존 본능으로 팽팽 돌아갔다.
“저, 저랑. 마부요……. 저택 뒤편 아서 경 정원에서요. 그리고 마차가 북문으로 달려갔으니까 그쪽에도 사용인들이 있었다면 봤을 거예요. 레이나가 괴한들에게 죽자 살자 저항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브로디는 황급히 덧붙였다.
“아…… 아마 마차를 본 사람들이라면 다 봤을 거예요. 레이나가……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마차로 납치돼 끌려가고 있다는 걸요! 밖에서도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후작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브로디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목격자가 나뿐이라고 하면, 나 어떻게 되는 거야?
* * *
후작이 아서를 힐끔거렸다.
“……자네 정말……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아서에게서 거둔 후작의 시선이 하인들이 옮기고 있는 붉은 여우에게로 향했다.
붉은 여우는 후작이 한 번도 사냥에 성공해 보지 못한 영리한 짐승인데, 여우는 아서가 쏜 단 한 발에 절명했다.
여우가 캥! 소리를 내며 쓰러지기 전까지 후작은 심지어 여우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아서가 덤덤한 낯으로 활을 들어 올렸다.
“각하께서 준비해 주신 활이 워낙 좋네요. 재미도 있고.”
“…….”
후작은 제 손에 든 석궁을 떨떠름하게 내려다보았다.
……무기 차이인가?
후작은 볼트를 매긴 석궁을, 아서는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서가 제 무기를 힐끔대는 후작의 시선을 느끼고 활을 반쯤 들어 올리며 물었다.
“……당겨 보시겠습니까?”
후작은 객기를 부리진 않았다.
“됐네. 누굴 놀리려고 그러나.”
후작도 자신이 저런 강궁을 당길 완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활 맘에 든다면 주겠네. 자네 가지게. 나보다 자네가 유용하게 쓰겠군.”
아서가 피식 웃었다.
“감사합니다.”
후작은 말없이 투덜거렸다.
뭔가 영…… 저런 활을 당기는 사람 옆에서 석궁을 들자니 폼이 안 나는군.
아서는 단 한 발도 빗맞히지 않았다.
아서가 열 발의 화살로 열두 마리의 새를 잡는 동안 후작은 다리를 저는 토끼를 한 마리 잡았을 뿐이었다.
“…….”
실력의 차이야 어쩔 수 없다 치고.
왜 이리 그림이 안 나오지?
석궁이라 그런가?
시원스럽게 활을 당기는 것에 비해 졸렬하게 보이는 기분이다.
내심 자존심이 상했지만, 놀라운 기록을 내고 있는 아서와 사냥을 했으니 자랑할 만한 이야깃거리라는 생각은 들었다.
아서와 친해지고 있다는 느낌도 확실히 들었다.
부실 보급 이야기 같은 걸 꺼내서 분위기를 깨지도 않고, 아서는 선선히 어울려 주었다.
그럼 됐지.
“…….”
아서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후작은 아서가 또 뭘 쏘려나 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말이 멈추었다.
“각하.”
후작 각하와 총사령관 각하.
두 명의 각하가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기사는 아서에게 말했다.
“저택에 일이 생겼습니다.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