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납치?
(84/210)
84.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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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납치?
2022.06.19.
“우리 사위. 좋은 아침일세.”
줄리어스 후작이 반갑고도 기쁜 낯으로 선뜻 손을 내밀었다.
마치 어제도 문안 인사받은 장인어른 같은 태도였다.
아서는 싱긋 웃으며 후작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평안하셨습니까.”
아서가 받아 주자 후작은 더 활짝 웃었다.
“덕분에.”
후작의 흔쾌한 인사치레에 아서는 입매를 올려 웃으며 사람 좋게 말했다.
“못 주무시게 해 드린 나날이 많았을 것 같은데, 이리 너그럽게 반겨 주시니 마음이 무겁군요. 이번에 보여 주신 포용력에 놀라고도 감탄했습니다. 비꼬는 건 아니고요.”
“핫핫핫!”
호쾌한 웃음을 터뜨린 후작이 만면에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아직 맞잡고 있는 손을 한 번 더 흔들었다.
“아닐세. 나야말로 감탄했네. 나도 비꼬는 건 아니고.”
반강제로 전 재산을 내놓은 사람 같지 않은 호탕한 웃음이 후작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화끈한 금융 치료로 해묵은 앙금이 사르르 풀린 듯, 둘 사이는 전에 없던 웃음과 허심탄회함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이리 늦게 자리를 만들게 되어 미안하네. 내가 먼저 자네를 서운하게 했으니 나로서도 더 빨리 자네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네만, 자네 수완이 어디 보통이 아니어야지 말이야. 맞추느라고 아주 애먹었어?”
후작은 마지막 엄살로 눈을 흘기며 새침을 떨었다.
아서는 매끄럽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수완에 놀란 것이야 제가 후작 각하에게 놀란 것만 할까요.”
“핫핫핫! 이 사람, 참!”
그토록 사람들이 추앙하는 잘난 사위의 칭찬과 인정은 후작을 짜릿하도록 기분 좋게 만들었다.
모두가 목을 매지만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총사령관 아서와 기탄없이 독대를 하며 이렇게 나란히 서 있다는 것도, 냉랭하기 짝이 없던 놈에게 드디어 마땅한 장인어른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맘에 들었다.
이놈은 쉬운 놈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짜릿했다.
한때 아서와 몹시도 대립했다는 것은 오히려 아서에게 인정받은 현재를 더 빛나게 하는 것 같았다.
후작은 친근하게 아서의 팔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래! 비록 우리가 시작은 순탄치 않았지만, 난 앞으로 우리가 잘해 나갈 거라고 믿네. 자네가 내게 보인 그 수완과 협상력은 이제 내 사위의 든든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허세와 기쁨은 후작을 더욱 호탕하게 만들었다.
후작은 스스로의 대범함에 취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하고, 앞으로 나도 우리 가문도 잘 부탁하네. 지금까지 함께한 날보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할 날이 더 많을 테니. 내 평생 갚겠네.”
아서가 싱긋 웃었다.
후작은 만족스러워졌다.
아서의 호의적인 미소 앞에서 제 결정에 길길이 뛰었던 후작 부인의 항의 따위는 모조리 잊혀졌다.
후작은 가뿐해진 어깨로 가슴을 펴며 집사를 찾았다.
“오늘은 가볍게 함께 숲길 산책이나 함세. 나만 다니는 코스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을 마주칠 걱정은 없을걸세. 아, 자네 혹시 사냥 좋아하나?”
아서는 선선히 미소 지었다.
“제게야 생활이었죠. 대단히 즐기진 않습니다만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로는 하는 편입니다. 그럭저럭 후작 각하의 보조를 맞출 정돈 될 겁니다.”
“핫핫하! 이 사람, 겸손하기는! 자네가 제국 제일의 명사수인 걸 이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아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웃었다.
“그 정돈 아닙니다. 가시죠.”
사교의 시간이었다.
* * *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초조하게 응접실에서 서성이던 레이나는 케이가 들어서자마자 퍼뜩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레이디.”
레이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케이 경.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할머님께서 편찮으시다고요. 걱정되시겠네요.”
케이는 가장 먼저 레이나에게 짧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레이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를 청한 것을 미안해하면서도 케이의 마음 씀에 고맙다는 듯이.
레이나가 주저하며 말을 꺼내기 전에, 케이가 먼저 입을 열어 그녀의 염려를 짚어주었다.
“그렇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닐 겁니다. 위중하신 상태라면 테일러 로렌슨 씨가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전해 왔을 테니까요. 하지만 걱정되는 가족 마음은 그게 아니시겠죠. 할머님은 연세도 있으신데.”
‘그렇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닐 거다’부터, ‘걱정되는 가족 마음은 그게 아닌’ 것까지, 정확하게 제 마음이었다.
레이나는 할머니가 걱정스러우면서도 그에게는 미안한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알아주는 케이에게 고마워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케이는 즉시 본론을 꺼냈다.
“그러니까 갈까요?”
“네?”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죠. 어차피 할머님 뵈러 가기로 한 건 각하께 허락도 받아 둔 일이니까요.”
레이나는 놀라서 눈을 둥글게 뜨고 반문했다.
“지금요?”
오히려 레이나가 멈칫하게 될 정도의 적극성이었다.
“저희가 기사를 보내서 정확한 할머님 상태를 알아봐 드릴 수도 있긴 합니다만, 역시 직접 보시는 게 안심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케이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전령 기사가 오가면 아무래도 주목을 받지 싶어서요. 저흰 할머님 거처가 드러나지 않게 조심해야 하니까요.”
레이나는 머뭇거렸다.
사실 레이나는 케이에게 그저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데 저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고, 혹시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아시냐고 정도만 물어보려 했었다.
예정된 일정까지 바꾸어 당장 할머니를 보러 가자 말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폐가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케이의 말대로 큰일이었으면 말을 했을 거라고, 별거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애쓰고 있기도 했다.
케이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레이나는 선뜻 그러겠다고 해도 되나 확신할 수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테일러를 만날 수 있을 텐데…….
할머니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아서에게 상의하지 않고 저택을 떠나는 것은 망설여졌다.
“…….”
하지만 할머니에 대한 일인데 사양하기도 힘들었다.
괜히 괜찮다고 사양했다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시간이 더 지나서 아무래도 내가 와야 할 것 같다는 나쁜 소식이 다시 전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레이나는 마지막으로 초조하게 고민했다.
“……아서 경께 허락을 받고 움직이지 않아도 될까요? 제가 움직이는 건, 기사님이 오가는 것보다 노출 위험이 적을까요?”
흠.
신중하네.
이런 상황이라면 나가자는 호의를 덥석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어쨌든 지금은 다른 계획이 있으니.
케이는 미소 지어 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할머님 건강에 관한 일은 최우선이죠. 그건 저희 약속이니까요. 기본 전제고.”
그리고 케이는 간단히 레이나를 설득했다.
“각하께서도 날짜 정도는 제 재량으로 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레이나의 표정에 설득되는 빛이 나타났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케이가 빙그레 웃었다.
“전에 함께 의논한 그대로 할 거예요. 그럼 눈에 띄더라도 당장 할머님 거처를 추적당하긴 어려울 겁니다. 기억하고 계시죠?”
“아, 네!”
“아서 경의 전용 통로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여기서 나갈 거고, 문양 없는 마차를 타고 갈 겁니다.”
“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여섯 대의 같은 마차를 동시에 출발시킬 거고, 사복 기사들이 레이디와 함께 갈 겁니다. 추적자가 붙는지는 이쪽에서도 볼 겁니다.”
뒤쪽의 계획까지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심한 레이나가 알겠다고 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가 에스코트를 청했고, 레이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 * *
레이나는 아서의 전용 계단, 전용 통로, 전용 정원을 거쳐 문양이 없는 여섯 대의 마차 중 하나에 탔다.
아서와 외출했을 때 거쳤던 길 그대로였다.
‘갑작스럽게 결정돼서 그런가, 할머니를 보러 가는 건데도 왠지 실감이 안 나네.’
케이는 레이나를 마차에 태우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곧 기사와 마부들이 올 겁니다.”
“네.”
“가시는 김에 할머님께 보내 드릴 새 옷도 가져가시는 게 좋겠네요. 하녀 시켜서 챙겨 내려오라고 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케이가 마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브로디가 가져다줄 할머니의 짐과 호위 기사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
덜컹.
“……?”
갑자기 예고 없이 마차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 한 명이 탔다.
레이나는 흠칫했다.
사복 기사?
한 사람이 더 탔다.
레이나는 즉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복 기사여야 할 두 남자가 검정 복면을 쓰고 있었다.
‘뭐야?’
“누구세요?”
레이나가 한 말이 아니었다. 밖에서 난 소리였다.
그리고, 쿠당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악!”
마부가 누군가에게 팽개쳐져 마차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였다.
“!”
말채찍 소리가 들리며 말이 울었다.
히히히히힝!
덜컹!
마차가 갑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레이나가 탄 마차의 마부를 팽개치고 마차를 몰기 시작한 것이었다.
레이나는 겁에 질려 벽에 바짝 붙었다.
“당신들 뭐예요!”
“…….”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레이나는 황급히 마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을 잡았다.
하지만 복면 남자에게 즉시 잡혀 저지당했다.
“내, 내려 주세요! 어디 가는 거예요!”
그때, 마차 창밖으로 할머니의 짐을 실어 주러 내려오던 브로디가 보였다.
“!”
브로디가 마차에서 두 복면 남자에게 붙들린 채 몸부림치는 레이나를 발견했다.
마차째로 납치당하는 레이나를 보고 경악한 브로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브로디가 트렁크를 팽개치고 비명을 지르며 마차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 ……!”
브로디를 소리쳐 부르려 했지만 레이나는 수건으로 입을 막히며 붙들렸다.
마차가 흔들리며 거칠게 달려갔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브로디가 외치는 “아가씨!”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놔……. 이거 놔!”
레이나는 몸부림쳤지만 그녀의 양팔을 잡은 두 성인 장정의 힘을 이겨낼 순 없었다.
“얌전히. 이러시면 다칩니다.”
레이나가 조금만 침착했다면, 복면 남자가 낯익다는 것도, 그녀가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겁에 질린 레이나에게는 무시무시한 위협으로만 느껴졌다.
레이나는 거세게 저항했다.
* * *
그렇게 레이나의 납치 장면은 성공적으로 줄리어스 저택의 하녀에게 목격되었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하녀는 거의 울기 직전이 되어 후작 부인에게 달려갔다.
* * *
“…….”
케이는 커튼을 닫았다.
잠깐만 참아요.
* * *
“…….”
지금쯤이면 내 부인은 무사히 납치되고 있으려나.
아서는 후작의 뒤에서 저택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