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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아내 역할 (82/210)


#82. 아내 역할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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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오늘 바로 헤어지는 건 아니죠……?”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아서가 멈칫하고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말을 뱉어 놓고 레이나는 숨을 멈추었다.

아서가 굳어 버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의외의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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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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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부인을 제 자리로 돌려놔야 한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망설이는 표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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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흠칫했다.

순간 자신이 아서 경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 결혼 따위의 인연을 인연이랍시고 붙들고 그의 호의에 기대 질척거리며 저 사람이 내게 갖고 있는 좋은 기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레이나는 다급하게 변명하듯 다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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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제 말은…… 다른 뜻이 아니라요. 사실 제가…… 며칠 정돈 더 시간이 있을 줄 알고.”

레이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당신한테 줄 손수건을 아직 뜨지 못했으니,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당장은 갑작스럽다고?

내가 뭔데?

고작 내게 줄 며칠의 말미가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처우보다 중요할 리 없었다.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서 경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는지 레이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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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지금 뭘 하는 거야?

레이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서서히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레이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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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헤어지기 전에 제가 아는 줄리어스에 대해 알려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평생을 살아온 도시.

당신은 앞으로 평생을 살아갈 도시.

그리고 아가씨와 함께 이 땅의 주인이 될 당신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비로소 해야 할 말을 알 것 같았다.

레이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만 있다면, 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레이나는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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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는 자신의 눈썹이 이상한 모양이라는 걸 자각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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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조금이라도 알려드릴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했어요. 전 줄리어스 토박이고, 아서 경은 이곳을 잘 모르실 것 같아서. ……물론, 크리스티나 아가씨랑 알아가실 테니, 꼭 필요는 없으실 수도 있지만…….”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그냥…….

내가 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래서 조금만 더, 보답할 시간이 있었으면…….

아서는 물끄러미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레이나는 다시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으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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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아가씨는 저택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으시거든요. 거의 집, 사원, 집, 사원……. 그렇게만 다니셔서요. 그래서 영지 곳곳을 알지는 못하시니까……. 제가…… 좋은 장소도 많이 알려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했거든요.”

입 밖에 내기 직전엔 괜찮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내뱉은 직후엔 궁색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내어버렸으니 할 수 없었다.

레이나는 애써 어깨를 올렸다가 내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가볍고 담백한 태도로 보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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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벌써 헤어지는 건가……. 했어요. 받기만 하고 해 드린 게 너무 없어서…….”

똑딱. 똑딱.

조용한 방에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의 대답은 조금 천천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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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장소…….”

그는 살짝 느슨한 자세로 레이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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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에 대해 알려준다고?”

레이나는 긴장한 채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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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리고 더듬,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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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레이나는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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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줄리어스에 대해 알려드릴 수 있으니까요. ……영지민 입장에서요.”

아서가 피식 웃었다.

웃음 띤 눈빛은 그녀에게 수긍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레이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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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경은 여기에서 계속 사실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떠나기 전에 제가 알던 걸 말씀드리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변명으로 시작한 말은 이내 진심이 되었다.

레이나는 초조하게 치마를 지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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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 아는 비밀 장소도 꽤 많거든요. 제가 떠나고 나면 어차피 찾아갈 사람이 없을 테니까……. 아서 경이 써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아가씨랑 같이 가셔도 좋을 만한 곳들도 있어요.”

그리고 레이나는 머쓱하고도 미안한 듯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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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랑 달리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을 만한 다른 건 안 떠오르네요.”

아가씨 이야기는 괜히 했나.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았을까.

레이나는 면목 없이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변명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역할을, 내 주제를 잊지 않았다는 걸.

레이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노트에 끼워둔 혼인 계약서를 떠올렸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서로의 좋은 아내로, 남편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

그는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의 옷을 사 주었고, 기사님들을 붙여 나와 할머니를 보호해 주었고,

내가 어떤 어려움에도, 두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돈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수로 그에게 좋은 아내가 되어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 몸을 사리다 물러나 주는 것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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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내가 도움이 된다고 말해 주지만 그건 내가 그를 기만한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그가 모욕당했던 증거이고, 오점이니까.

초라한 기분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

아서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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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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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가 부르는 호칭에 가슴이 뭔가 따가운 것에 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서는 묘한 웃음기가 담긴 얼굴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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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오늘은 마지막 밤이 아니오. 아직은 당신을 보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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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이나는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아서는 담담히 시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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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신은…….”

작은 웃음과 함께 그녀에게 돌아온 시선에 레이나는 심장이 뚝 떨어졌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레이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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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다른 여자랑 데이트할 곳을 알려주겠단 뜻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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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가 레이나를 보며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조금 서운한 듯, 장난기 있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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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좋은 아내로서 당신이 나한테 해 주는 배려인가?”

레이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던 아서는 아프지 않게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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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아내 역할이 그런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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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얼떨떨하게 자기 이마를 만졌다.

아서가 싱긋 웃었다.

그는 멍하니 선 레이나의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겉옷을 제 손으로 가져가며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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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인 줄 알았소. 뭐……. 결과적으론 비슷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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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드레스룸으로 가서 자신의 옷을 정리해 두고, 이내 그 자신은 가벼운 침의 차림이 되어 그곳에서 나왔다.

탁.

아서가 드레스룸의 문을 닫고 담담하게 웃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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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왜 눈치 보듯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지는 않소. 하지만 지금 내가 당신에게 다소 서운한 기분이 들고, 당신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당신에게 마음껏 예쁘게 꾸미고, 내게도 보여달라고 했던 이유와 같을 거요.”

아서가 담백하게 웃었다.

그가 그녀의 뺨을 톡,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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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 생각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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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다가 레이나의 머리에 꽂힌 핀을 뽑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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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내 곁에 좀 더 있고 싶다는 뜻으로 듣겠소.”

사르륵.

핀에 틀어 올려져 있던 머리가 풀어지며 부드러운 밀빛 금발이 레이나의 어깨 아래로 치렁치렁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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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많겠군. 밤이 늦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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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가 손가락으로 천천히 빗질해 레이나의 땋은 머리를 풀어 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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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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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가운 인상에 자못 여유로운 표정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무섭게 사람을 홀린다.

그의 목소리에는 산뜻하면서도, 묘하게 알 수 없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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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해 주는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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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싱긋 웃으며 레이나의 옷시중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아서가 그녀의 가장 두꺼운 겉옷 하나를 벗겨주었다.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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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많겠어.”

뒤이어 그는 레이나의 어깨에 걸친 숄을 고쳐 올려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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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길어야 할 텐데.”

레이나는 왠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서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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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까지.”

감각이 곤두섰다.

몸을 스치는 바람에 발가락 끝이 오므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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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겠소. 줄리어스에 대해 말해 주시오.”

그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방을 채웠다.

촛불마저 컴컴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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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랑 대화하는 거야,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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