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 미열 (80/210)


#80. 미열
2022.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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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하…….”

아침 아첨, 점심 아첨, 저녁 아첨을 배부르게 먹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후작은 소파에 푹 몸을 파묻으며 만족스러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여 있는 황실의 서신 세 장을 다시 손에 들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는 개선식 초청장.

다른 하나는 데뷔탕트 예고장.

마지막 하나는 황제의 친필 서신이었다.

초청장을 열어보는 후작의 입가에 배부른 미소가 걸렸다.

귀족들에게 돌려지는 황실의 초청장은 ‘받는 이’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같은 내용의 인쇄된 초청장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선제후가 된 그는 황제의 친필로 적힌 남들과는 다른 내용의 초청장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히 당신을 행사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아닌, 행사의 주역으로서 함께 개선식의 준비를 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후작은 특히 흡족한 문장들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 제국의 검, 선제후 줄리어스 】

【 지난 오 년,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였으나, 】
【 귀하를 비롯한 고귀한 선제후들의 변함없는 신뢰와 믿음, 아낌없는 희생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고 서로의 노고를 치하할 수 있게 되었음에 기쁠 따름. 】

【 황실의 샛별이자 그대의 검이 역사의 중요한 대목을 실현했음에 찬사를 보내며, 】
【 제국의 선제후이자 금색으로 빛나는 줄리어스 후작은 그대와 샛별의 공을 기념할 개선식에 참석하여 영광된 자리를 빛내 주길 바라오. 】

【 그레이엄 윈스턴 오웬 폰 루사익 】

초청장의 내용은 후작을 조금 더 특별하게 개선식에 초대한다는 암시 정도로 끝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전해 주던 황제의 전령은 우호적이고도 품위 있는 태도로 미소 지으며 더 구체적인 내용의 본론을 전했다.

요약하자면 이번 개선식에 줄리어스 후작의 선제후 임명식과 아서의 작위 수여식이 포함될 예정이니,

조금 더 일찍 수도에 와서 선제후 회의에 새로운 멤버로서 첫 참석을 하라는 것이었다.

후작 부인이 받은 데뷔탕트의 예고장도 남들이 받는 것과 달랐다.

그곳에는 크리스티나에 대한 내용이 별도로 언급되어 있었다.

이번에 데뷔탕트를 치를 많은 젊은 레이디들을 위해,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황태자비를 맞이하게 될 황태자를 위해,

젊은이들에게 이상을 심어 줄 아름다운 부부로서

아서와 크리스티나의 첫 춤을 기대한다는 내용이 친근한 농담처럼 붙어 있었다.

그것 역시 줄리어스 후작 부인에게만 따로 보낸 초대장이었다.

마지막 황제의 서신은 간단했다.

황후가 후작 부인에게 안식년 하녀들을 보내주기로 한 일에 대하여 ‘내 기쁨’이라는 짧은 언급으로 시작하며,

당신과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다, 곧 보자는 내용이었다.

「 제국의 검, 선제후 줄리어스 」

후작의 만면에 흡족한 웃음이 가득했다.

‘제국의 방패’는 언제나 딜로아 변경백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검’이라는 칭호를 얻는 선제후는 언제나 달랐는데, 가장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선제후가 바로 그 호칭을 얻었다.

검술이라곤 일반적인 교양만큼도 배우지 않은 그가 무려 제국의 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아서가 ‘줄리어스’의 이름으로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극대화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

후작이 가진 것은 재력이었고, 그의 약점은 명예와 무력이었다.

후작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한 완벽한 정략혼을 생각하며 흡족해했다.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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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집사장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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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게.”

한껏 기분이 좋은 후작에게 집사장이 다가와서 예를 표한 후 후작의 내일 스케줄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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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전령분들 내일 아침에 돌아가십니다. 마님과 함께 전령분들을 배웅하신다고 하셔서 오전 일정은 넉넉하게 비워두었습니다.”

후작이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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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기억하고 있다. 딸려 보낼 선물들은 준비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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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차 네 대 분 정도로 준비했습니다.”

후작이 눈썹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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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네 대? 너무 적은 거 아냐?

후작이 묻기 전에 집사장이 알아서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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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하면 과하게 보일 수 있고, 이 정도면 융숭한 대접입니다. 아무래도 후작님께서 직접 수도에 가실 때 준비해 가져가실 선물이 본론이니까요. 그저 전령들 고생했다고 보내는 조촐한 성의 표시로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가.

후작은 이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게 굽신거려도 품위를 해친다.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그는 평생을 사업에만 몰두한 자신이 귀족들의 ‘품위 있는 교류’에 박식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었고, 자신의 어머니인 후작 대부인의 교육을 받은 집사장과 하녀장을 신뢰했다.

선대에서 ‘상인’을 ‘귀족’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어머니, 후작 대부인을 모셨던 이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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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수도로 갈 때 같이 갈 선물들도 준비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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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순조롭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20여 대 마차 규모로 준비될 예정입니다.”

후작이 소매를 걷으며 펜을 들고 기분 좋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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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그럼 나는 사돈 폐하에게 보낼 답장을 써야겠군. 마틸다는? 황후 폐하께 보낼 답장은 준비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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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님께서도 답장을 쓰고 계십니다.”

흡족하게 끄덕인 후작은 자신 있게 팔을 걷어붙이고 황제를 향한 답신을 써 내려갔다.

답장할 문구는 이미 준비해 여러 차례 검토한 후였다.

【 ―제국에 영광을. 】

거듭된 승리 또한 따지고 보면 영명하신 황제 폐하의 헤아림 덕분……

제게는 이 찬란한 대역사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쁨……

과분한 영예를 누리게 되었으매, 누가 되지 않기만 바랄 뿐……

초대해 주심에 감사……

부디 광영된 개선식에 융단 한 필, 꽃잎 한 움큼을 보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후작은 다시 한번 펜에 잉크를 적셔 멋들어지게 마지막 문장을 써넣었다.

【 아서와 크리스티나와 함께 곧 뵈러 가겠습니다. 】

【 당신의 충실한, 안토니오 줄리어스 】

그는 답신을 밀랍으로 봉해 가문의 인장을 찍은 후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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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아서를 만나 보실까…….”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이제 아서와의 관계를 끌어올릴 때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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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경.”

트리스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집사장 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먼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더니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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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아서 경께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트리스탄은 서류를 한 번 보고 받아들지 않은 채 다시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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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뭡니까?”

집사장이 공손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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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님께서 아서 경께 전해드리는 서류입니다. 살펴봐 주시고,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눴으면 한다 하셨습니다.”

집사장의 태도는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아마도 이미 비슷하게 전달을 요청받은 몇몇 초청 편지 무더기와 서류들이 리오넬과 케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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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총사령관 각하는 이런 걸 볼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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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후작 각하에게도 이런 식으로 하시냐.」

라며 매서운 퇴짜를 맞은 후이기 때문인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중간급 집사를 시킬 일에 후작을 밀착 보좌하는 집사장이 직접 오다니.

집사장을 이렇게 보낸 걸 거절당하면 후작으로서도 꽤나 자존심에 타격이 될 텐데.

물론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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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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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트리스탄은 서류철을 받아 그 자리에 서서 훑어보았다.

그리고 아서에게 전달할 가치와 필요성이 충분한지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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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도 그것은 전달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트리스탄은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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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각하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집사장이 고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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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 *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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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놀랍긴 하네요.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이 돈을 다 마련한 건지…….”

후작이 보내온 것은 아서가 요구한 참전 용사 보상 및 참전 용사 인정 범위를 그의 요구대로 전폭 수용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말뿐이 아니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수십 장의 서명된 서류와 금전 조달에 관한 계획서도 함께였다.

……어쩐지 목전까지 일이 닥쳐왔는데도 아무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더라니.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후작의 믿는 구석은 바로 아서의 요구를 전부 다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아서의 최측근 기사들마저도 후작이 이렇게까지 해 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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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지난 배상금으로 후작가 자금 여력은 바닥이 나 있었지 않습니까? 이거 진짜로 믿을 수 있는 겁니까?”

케이가 묘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류 몇 개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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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그렇습니다. 이 서류 좀 보세요. 상단 몇을 휘어잡아서 해낸 모양입니다. 여기서 나온 사업 이익금을 전부 유족 연금 재단에 넣어 주겠다는군요. ”

결론적으로 일어난 일은 이러했다.

후작은 ‘아서 특수’와 줄리어스 영지에 닥친 기회를 기가 막히게 이용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돈을 불리고 있었다.

그 결과 후작은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는데,

참전 용사들에게 지급한 무리한 포상금과 유족 연금으로 몇 년 안에는 회복하기 어려우리라 점쳐졌던 줄리어스의 재정 위기를 놀라운 속도로 극복한 것이었다.

게다가 다방면에 걸쳐 무시무시한 사업 수완을 발휘,

영지의 온갖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받아내고 알차게도 실속을 챙겨 아서의 ‘유족 및 참전 용사 인정 범위 확대’ 요구와 ‘부실 보급 건 배상’ 요구를 타협 없이 맞춰낸 것이었다.

아무리 줄리어스라 해도 아서의 요구는 감당해내기가 쉽지 않은 규모였지만, 후작은 해냈다.

후작이 보내온 서류들을 훑어보는 최측근 기사들의 분위기가 희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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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이걸 해 주네……?’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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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이 의외로 통이 크네요. 윽박이나 지르며 협상을 먼저 걸어올 줄 알았지, 이걸 한 번에 다 받아 주면서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줄리어스 후작의 수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케이는 서류를 들고 웃으며 아서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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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시는데. 이제 슬슬 그만 튕기고 만나드릴까요?”

아서가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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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날 잡아 봐.”

그리고 무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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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들을 준비가 된 모양이니, 상이군인 보상 이야기를 시작해 봐야지.”

기사들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케이마저도 순간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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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군인 보상 이야기를…… 바로요?”

방금…… 거의 후작의 전 재산을 털었는데?

물론 그것도 언젠가 요구해 볼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 들어온 서류를 바탕으로 후작의 자금 사정을 대부분 파악한 케이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이렇게까지 쥐어 짜내도 되나……?

이 서류를 보내며 제법 우쭐해했을 후작이 갑자기 좀 가여워지려고 했다.

* * *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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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이미 문은 열려 있었다.

노크는 그저 다른 데 정신 팔린 그녀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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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고개를 들고 그를 발견한 레이나가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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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느라 들어와도 몰라?”

레이나가 열중해 적고 있던 노트를 덮으며 웃었다.

테일러가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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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스크랩북이야?”

레이나가 눈을 홉뜨며 테일러의 입을 막았다.

쉿!

레이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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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 경의 기사를 모은 스크랩북이니까, 그 존재 자체를 들키고 싶지 않은 건가.

테일러는 담백하게 레이나의 노트를 모른 척해 주었다.

대신 그는 레이나의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가 손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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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열이 있는데. 앉아 보세요, 환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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