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떠날 사람, 남을 사람
(79/210)
79. 떠날 사람, 남을 사람
(79/210)
#79. 떠날 사람, 남을 사람
2022.06.02.
상단 루모스.
그들은 전국에 유통망을 두고 고급 무역품을 유통하는 거대 상단 중 하나다.
그리고 그들은 줄리어스 후작이 부실 보급 의혹에 휩싸였을 때, 순간적으로 후작과의 교류를 망설이다 후작의 심기를 거스르고 만남을 무기한 연기 당해 큰 곤경에 처한 상단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 일’이 터진 날, 그들은 후작 내외와의 만찬 약속을 위해 줄리어스 저택에 방문해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복도에 나와 있던 상단 루모스의 후계자는 아서의 기사가 따귀를 맞는 순간부터 후작 부인이 쓰러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목격했고,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 되고 말았다.
루모스의 후계자는 줄리어스 후작과 아서가 틀어졌다고 속단하고 말았던 것이다.
「경우 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군요?」
「제 부하를 폭행하셨습니까?」
‘……아니, 그걸 보고도 어떻게 후작이 뻔뻔하게 아서 경의 이름을 팔아대는 걸 믿으란 말이야? 딱 보니 부실 보급 의혹도 진짜인 것 같고, 아서 경이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은데…….’
손해를 감수하고도 콧대 높은 줄리어스와 사업 계약을 진행하려 했던 이유는 이곳이 제국의 제2의 수도가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계자의 눈에 그날 목격한 후작은 멍청하고 어리석어 보였고, 아서는 그런 그를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줄리어스 후작은 조만간 선제후 자리에서 끌어내려 질 것 같았다.
줄리어스 후작을 상대로 밑지는 장사를 하는 게 그 순간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로 느껴졌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던 거였다.
아서 경과 줄리어스 후작의 사이가 심상치 않게 흘러갈 것 같으니, 줄리어스와의 사업에서 정도 이상의 손해를 보면 안 될 것 같다고.
상황을 더 지켜보자고.
아서와 후작의 대립을 실제로 목격한 아들이 그 정도로 확신 어린 주장을 하자 루모스의 상단주는 고심 끝에 ‘지켜보는’ 행보를 선택했다.
하지만 후작은 막대한 참전 배상금과 유족 연금으로 자신의 실수를 무마했고, 아서는 후작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일은 그 이상 커지지 않았다.
심지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유가족 방문 기사가 뜨며 분위기는 후작에게 유리한 쪽으로 반전되었다.
줄리어스 후작가는 다시 이전의 위상을 회복했고,
후작은 그들을 다시 만나주지 않았다.
판단 실수였다.
상단 루모스는 곤경에 빠졌다.
지금 줄리어스와의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느냐는 상단의 브랜드 가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단 루모스가 줄리어스의 호의를 잃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경쟁 상단들과의 다른 계약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직접적으로 후계자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신의 섣부른 판단 때문에 상단 루모스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에 후계자는 잔뜩 기가 죽었다.
이대로는 라이벌로도 생각하지 않았던 상단들에도 밀릴 것 같았다.
후계자는 ‘그까짓 거, 좀 천천히 만나면 되지…….’라고 모른 척 툴툴대면서도, 자신의 실수를 무마할 방법이 없는지, 남몰래 다른 방법들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 * *
상단 루모스의 후계자와 심부름꾼이 법원 골목에서 드레스숍을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저기……! 저 드레스숍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차가 있는 걸 보니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아요.”
쌍안경에 눈을 대고 그쪽을 살피던 후계자가 의심 어린 시선으로 쌍안경을 내리며 드레스숍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아서 경이랑 레이디 크리스티나였다고?”
“틀림없다니까요. 저거 줄리어스 저택에서 나온 마차입니다. 지금 줄리어스 저택 안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나올 수 있는 금발 여자랑 흑발 남자라면 누구겠냐고요……!”
후계자는 어떻게든 크리스티나나 아서와 긍정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보기 위해 심부름꾼들을 풀어 정보를 수집하며 줄리어스 저택을 살펴보고 있었다.
후계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심부름꾼에게 물었다.
“얼굴 봤어? 확실해?”
“거리는 좀 있었지만 마차에서 내릴 때 아가씨 얼굴이 살짝 보였습니다. 신문에 목격담으로 실린 크리스티나 줄리어스 삽화랑 확실히 비슷했어요. 그리고 두 분 같이 있으니 딱 ‘아서 경과 레이디 크리스티나’ 그 느낌이었습니다.”
삽화랑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퍽이나 신빙성 넘치게 들리네.
후계자는 내심 혀를 차며 의상실 건물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리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아서와 크리스티나의 목격담에 파격적인 보상을 걸었더니 잘못된 제보가 너무 많이 들어와 허탕을 꽤 여러 번 쳤기 때문이었다.
후계자는 고개를 들어 드레스숍의 이름과 위치를 확인했다.
“…….”
그동안 레이디 크리스티나와 교류하던 드레스숍도 아니다.
물론 접근하려는 외부인들을 배제하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알려지지 않은 드레스숍으로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앞두고 있는 거사들이 많은데.
이런 상황에선 기존에 거래하던 곳 중 신뢰할 만한 곳을 고르고 싶어하지 않을까?
‘또 허탕인 거 같은데…….’
기대감은 더욱 내려갔지만,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어느 의상실을 선택했는지를 좀 더 철저한 비밀로 하고 싶어 한다면 이런 곳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원 앞의 의상실이라…….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확인이나 한다는 마음으로 후계자는 심부름꾼에게 말했다.
“가서 안쪽 상황 한 번 살펴보고 와.”
심부름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요? 바로 만나 보시려고요?”
후계자가 다시 쌍안경에 눈을 대며 말했다.
“지금 당장 뭘 하진 못하지. 그래도 일단 한 번 보고 와 봐. 한도 끝도 없이 여기서 기다릴 순 없잖아.”
심부름꾼이 망설였다.
“하지만 여기 사람 너무 없어서 지금 모습을 드러내면 들킬 것 같은데요. 이미 들어가신 지도 시간이 꽤 지나서 슬슬 나오실지도 모릅……. 헉, 나오셨어요!”
“뭐?!”
후계자는 얼른 건물 뒤에 몸을 숨기며 심부름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쌍안경을 돌렸다.
“!”
그리고 후계자는 눈을 부릅떴다.
아서 경이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분위기에 후계자는 숨을 멈추었다.
드레스숍에서 나온 것은 진짜 아서였다!
현관의 차양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드레스 입은 여자가 곁에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앞뒤로 분주히 움직이는 두 하녀가 마차에 몇 개의 짐을 싣고 드레스숍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아서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에스코트해 마차로 데려갔다.
그녀의 모자 아래로 늘어뜨린 금발이 흩날렸다.
‘레이디 크리스티나!’
후계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개선장군의 공무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했지만, 역시 몰래 외출하는 날이 한 번은 있을 줄 알았지!
게다가 한 번 나왔다면 두 번, 세 번도 나올 것이다.
그건 작전만 잘 세운다면 그들에게 기회가 있다는 걸 의미했다.
어떻게든 마주치기만 하면, 우연을 가장해 인연을 만드는 방법이야 무궁무진하니까!
후계자는 숨을 죽이고 온 신경을 눈에 댄 쌍안경에 집중했다.
여자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했다.
후계자는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숨을 멈추고 그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일단 얼굴을 기억해 둔다.
분명 다시 외출을 할 테니……!
아서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오르기 직전, 모자 아래로 살짝 드러나 보이는 여자의 웃는 얼굴을 후계자는 뚫어져라 눈에 담았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후계자의 머릿속에서 그럴싸한 시나리오 하나가 생성되었다.
* * *
“먼저 들어가세요. 저흰 시내에 내려가서 볼일 좀 더 보고 들어갈게요.”
두 하녀는 마차를 타지 않고 의상실 앞에 남아 레이나를 배웅했다.
“같이 안 가?”
레이나가 물었지만, 아서와 레이나 사이에 끼는 실수를 다시 반복할 그녀들이 아니었다.
“저흰 다른 심부름이 남아 있어서요.”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핑계를 대며 마차를 함께 타지 않고 방긋 웃으며 뒤로 빠졌다.
아서는 픽 웃으며 하녀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레이나는 그러고 보니 크리스티나 아가씨도 의상실에 이번 달 드레스를 주문하실 때가 됐구나, 거기에 갔다 와야 하나 보다 하며 하녀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다녀와.”
“들어가세요!”
둘은 웃으며 레이나를 보냈다.
그리고 저희들끼리 흐뭇해하며 호다닥 사라졌다.
아서가 준 넉넉한 팁에 삯마차 값과 자유시간도 포함되어 있다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 * *
마차에 편히 앉은 레이나는 맞은 편의 아서를 보며 미소 지었다.
피로해 보였지만 표정이 좋았다.
하지만 레이나는 잠시 물끄러미 그를 보며 무언가를 조금 신경 쓰는 듯한 얼굴을 잠깐 했다.
왜?
아서가 눈썹을 으쓱하며 시선으로 묻자,
레이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슬그머니 대답했다.
“저도 뭔가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아서 경이 주신 돈으로 아서 경 선물을 사는 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
아서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엉뚱하군.”
레이나도 따라 웃으며 작게 말했다.
“……그렇게 레이디답지 않은 말인 건 알아요. 그래도.”
레이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저만 좋은 시간 보낸 거 같아서 좀 민망했어요.”
아서가 마차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좋은 시간이었소?”
따뜻한 눈이 쳐다본다.
“네……. 즐거웠어요. 무척…….”
레이나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머쓱해하며 목을 누르고 물었다.
“아서 경은 오늘 지루하지 않으셨어요?”
아서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뇌쇄시켜 버리겠다고 당신이 꾸미고 나와서 어울리냐고 물어보는데. 그게 어떻게 지루하겠어.”
“…….”
레이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걸 들으셨구나.
레이나는 어쩔 줄 모르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희 다른 얘기 해요.”
아서가 큭큭 소리를 내며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덜컹!
순간 마차 바퀴가 뭔가에 걸린 듯 크게 흔들려 레이나는 양손으로 의자를 짚었다.
그리고 놀란 듯이 붉어진 얼굴로 아서와 눈을 마주쳤다.
“…….”
혹시 레이나가 넘어지면 잡아주려고 한 듯이, 손 내밀었던 아서는 손을 거둬들이며 미소 짓고 있었다.
“…….”
문득 레이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고 싶어서.
계속 보고 싶어서.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
오랜만에 나온 줄리어스의 거리는 가을의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노랗고, 붉고, 푸른 빛으로 다채롭게 물든 거리의 가로수들.
느긋하게 나무에 달린 열매를 쪼는 새들.
잠자리를 잡는 아이들.
평소보다 높고 파란 하늘.
바닥에 구르는 색색의 나뭇잎들과 기분 좋은 바람.
풍요로운 도시, 광장마다 반짝이는 포말을 뿌리는 분수들.
수레마다 가득한 과일과, 사람들의 소리.
……평생을 살아온 도시.
레이나는 이 모든 일이 끝난 뒤 이곳을 떠날 자신과, 이곳에서 평생을 주인으로 살게 될 아서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