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이거, 이거, 그리고 저거 (78/210)


#78. 이거, 이거, 그리고 저거
2022.05.29.


하녀들이 한 아름 드레스를 골라 들고 다시 내려왔다.

레이나는 네 번째 드레스를 입어 보고 나서야 지속적으로 느낀 위화감을 알아채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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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거…… 겨울 드레스 맞아요? 한겨울에 입기엔 조금 추울 것 같은데…….”

브로디가 헤벌쭉 웃으며 아서 대신 대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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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아가씨. 이건 가을 드레스예요. 우린 가을 드레스랑 겨울 드레스 다 맞출 거거든요.”

가을 드레스?

마리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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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입을 것도 있어야죠. 벌써 겨울 드레스를 입고 다닐 순 없으니까. 아가씨 팔 들어 주세요.”

말하며 그녀는 핀을 들고 드레스의 임시 가봉을 잡아 주었다.

레이나가 당황해서 아서를 보았다.

아서는 잠자코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 * *

의상실에서 레이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드레스를 입어 보았다.

대부분은 두 하녀들이 쉴 새 없이 가져와 추천하는 드레스들 중에 골라 입었고,

아서가 골라 주는 드레스들도 모두 입어 보았다.

레이나는 아서가 고른 드레스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입어 보고 전부 좋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서는 빤히 레이나를 보다가 피식 웃더니, 자신이 고른 것 중 몇 벌의 드레스를 툭, 툭, 툭 짚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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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빼고 전부 다.”

라고 말했다.

그가 제외시킨 드레스를 제외한 나머지 드레스들은 모두 구매 전표 위에 올랐다.

레이나는 멍하니 드레스 리스트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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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 났나?

아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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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골랐다고 다 맘에 든다고 하는 걸 보니 내가 사 줬다고 다 공정하게 입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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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 당연히…… 선물 받았으면 한 번씩은 다 입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아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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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몸은 하나뿐인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만 입어요. 가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좋은 것만 하기에도 부족하잖아.”

구매 리스트에는 레이나가 한눈에 진심으로 반했던 드레스들만이 올라 있었다.

드레스 리스트를 보다가 레이나는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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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취향 어떻게 아셨어요?”

레이나가 물었다.

아서는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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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얼굴에 다 티 나.”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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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티가 난다고?

레이나는 어색하게 자기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어 하며 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표정이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아서는 다른 드레스를 들어 레이나의 어깨에 톡 대어 보았다.

그리고 예의 신중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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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당신 취향일 것 같은데.”

레이나가 민망해하며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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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입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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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가 잔잔히 그녀를 휘감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레이스. 꽃. 부드러운 시폰.

그녀의 숨죽인 시선이, 손길이 더 오래 머무는 곳.

아서는 미소 지었다.

볼 순 없어도, 알 수 있었다.

* * *

하녀들은 레이나의 사이즈대로 드레스를 가봉해 두고, 구매 전표에 드레스의 리스트를 꼼꼼히 작성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드레스를 입혀 주고 레이나를 도와준 두 하녀들에게 아서는 꽤 놀라운 금액의 팁을 주었다.

당황한 레이나가 자신이 팁을 주려고 했지만, 아서는 지갑을 꺼내는 레이나의 손을 조용히 눌렀다.

자신이 줄 수 없는 금액의 팁인 걸 알고 레이나는 제가 주겠다고 하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대신 레이나는 두 사람에게 옷이나 모자를 사주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아서는 웃으며 그러라 했다.

이미 과분한 팁을 받은 하녀들은 깜짝 놀라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레이나가 그러고 싶다고 하며 제법 큰 용기를 낸 눈으로 쳐다보자 거절하지 못했다.

레이나가 얼굴이 붉어져 눈치를 보는 둘을 데리고 가 그들에게 선물할 물건들을 직접 봐주는 동안, 아서는 따로 몇 벌의 옷을 더 골랐다.

한동안 하녀들과 어울리던 레이나가 그들을 기쁘게 해 준 뒤 행복한 얼굴로 그의 옆으로 돌아오자,

아서는 한발 느리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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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바라는 평민 변장. 이걸로 가능하지 않을까?”

아서가 그녀에게 편한 평상복을 대어 보고 모자를 씌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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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이에 또 내 옷을 보고 계셨구나.

레이나가 쑥스러운 얼굴로 거울 너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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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좋은 것 같아요. ……정말로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다른 쪽으로 향하며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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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 할머니께 보내드릴 옷을 내가 몇 벌 골라 봤는데.”

적당한지 봐 달라며,

그는 직접 고른 따뜻한 가을옷과 겨울옷 몇 벌을 보여주어 레이나를 감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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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아서는 그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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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만나 뵈러 갈 때, 나도 한 번 초대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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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레이나는 환히 웃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창피해하면서 아서의 의향을 물어보려던 것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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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을 그렇게나 많이 받았는데…….

할머니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너무 염치가 없다.

나는 겨우 이런 것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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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몇 종류의 레이스를 쥐고 있던 손을 등 뒤에 감추었다.

그냥, 여쭤보지 말고 조용히 만들어서 별 의미 없는 듯이 선물하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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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크리스티나는 드레스를 보러 드레스숍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드레스숍의 드레스들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에게 선택받기 위해 저택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그저 자신만을 위해 디자인된 드레스를 받아본 후 손가락으로 가리켜 원하는 드레스를 고르기만 하면 됐다.

이 과정을 통해 까다로운 크리스티나의 선택을 받은 드레스숍들은 줄리어스의 하녀로부터 ‘방문 요청’ 통보를 받게 되고, 정해진 날짜에 줄리어스 저택을 방문해 크리스티나의 몸에 맞게 드레스를 가봉한 뒤 그녀의 몸에 맞춘 드레스를 완성했다.

그것은 사원의 승전 기원 미사 외에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를 사적으로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에 선택받은 드레스숍들은,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만날 수 없으니 이전의 치수와 똑같이 드레스들을 완성해 보내달라는 전갈을 받게 되었다.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이미 상단들이 드레스숍을 통해 레이디 크리스티나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고 극성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어스와의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은 드레스숍들은 크리스티나와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달라며 접근하는 상단들의 극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호소했고,

줄리어스 후작은 짐짓 이렇게 엄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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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의 개선식’ 이전엔 크리스티나 역시 그 어떤 사람들도 사적으로 만나지 않기로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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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일을 앞두고 아서의 공무 집행과 줄리어스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니 협조해 주시길 바라오.」

 
대신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치수에 맞추어 아름답게 완성된 가을 드레스들은 하인들의 손에 들려 줄리어스 후작 저택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드레스숍들은 크리스티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새로운 후보 드레스들을 가져와 줄리어스 저택의 지정된 홀에 전시해 놓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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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티나는 홀을 거닐며 수십 개의 마네킹에 입혀진 드레스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무심히 십여 벌의 드레스를 골랐다.

화려하고, 반짝이고, 고급스러우며 세련된 크리스티나 취향의 드레스 몇 벌.

그리고 절제된 장식에, 기품있는 공식 행사용 드레스 몇 벌.

그리고 추도식이나 미사에 참여할 때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 차분하고 우아한 무채색 드레스 몇 벌.

황실과의 만남을 염두에 둔 듯 겸손한 품위가 느껴지는 드레스 몇 벌.

그녀는 여느 때보다 많은 드레스를 골랐다.

아마도 앞으로 그녀에겐 평소보다 다양한 용도의 드레스가 필요하기 때문일 터였다.

집사장 짐은 조용히 크리스티나를 따르며 그녀가 고르는 드레스를 받아 적고 그 빼어난 안목에 감탄했다.

그녀가 고르는 드레스에는 항상 이유가 있었고, 언제나 크리스티나에게, 그리고 필요한 상황에 완벽하게 어울렸다.

온화한 성품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녀는 정말이지 완벽한 귀족 레이디였다.

드레스들을 훑어보던 크리스티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떤 마네킹 앞에서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 턱을 괴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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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 애를 보고 디자인한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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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크리스티나가 연한 상아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마네킹을 턱짓해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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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고 우아한 드레스였지만, 뭔가 다른 느낌의 드레스였다.

크리스티나가 고른 기존 드레스들과는 결이 달랐다.

어딘지 좀 더 은은한 느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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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집사장 짐은 ‘그 애’의 의미를 깨닫고 숨을 멈추었다.

크리스티나는 청한다고 만날 수 없었기에, 줄리어스와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대부분의 의상실은 사원에 승전 기원 미사를 나온 크리스티나를 멀찍이서 바라보고 그녀와 어울릴 만한 드레스를 디자인하곤 했다.

그리고 찾아뵐 수 있는 영광이 있다면 좋겠다며 드레스를 보내왔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사원의 미사에도 참석하지 못한 지가 꽤 되었다.

크리스티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어졌다는 의미였다.

이 드레스숍은, 새벽의 개선식에 나온 레이나를 크리스티나라고 착각하고 그 모습을 기반으로 드레스를 디자인하고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는 실수를 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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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의상실이지?”

크리스티나의 물음에 집사장 짐이 긴장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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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드레스를 보내온 의상실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의상실 이름이…….”

크리스티나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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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 적 없는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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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가씨.”

그리고 집사장은 노트에서 의상실의 이름을 빠르게 확인한 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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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드레스는 다시 받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리스티나가 웃으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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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잘했어요. 이것도 주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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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집사장은 어리둥절해 반문했다.

주문하라고?

다시 드레스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한 크리스티나의 손가락이 몇 개의 마네킹을 더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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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이거. 그리고 저거.”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나긋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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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사이즈로 주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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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장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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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에 신경 쓰고.”

크리스티나가 미소 지으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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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도착하면 그이의 신방에 보내 줘요.”

집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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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가씨. 그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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