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보고 싶어서
(77/210)
77.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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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보고 싶어서
2022.05.26.
나는 여기서 다른 옷들을 보고 있을 테니 편하게 갈아입고 오라는 아서와 좋다고 그러시라는 레이나를 보고 브로디와 마리나는 기함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고작 그러려고 오 층짜리 의상실을 통째로 빌리셨어요?!
아서와 레이나는 순식간에 두 하녀에게 이끌려 귀빈용 피팅룸으로 끌려가 앉혀졌다.
고급스러운 암막 커튼으로 방의 중앙이 나뉘어 있고, 한쪽 공간에는 긴 소파가 놓여 있으며, 다른 한쪽은 옷을 갈아입고 보여줄 수 있는 무대처럼 꾸며진 공간이었다.
“…….”
그리고 하녀들은 아서에게 꼼짝 말고 반드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 커튼이 열리는 순간 레이나를 봐 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
아서는 힐끔 레이나를 보았고,
레이나는 당황해서 하녀들을 쳐다보았다.
레이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냥 드레스를 입어 보는 것뿐인데 그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웨딩드레스 같은 걸 맞추는 것도 아니고 그냥 겨울 드레스를 몇 벌 맞추려고 입어 보는 것뿐인데.
커튼이 젖혀지는 순간 시시한 결과물에 실망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남자를 밖에 세워두는 상황 자체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하녀들은 레이나에게 드레스를 맞춰 주겠다고 오 층 짜리 의상실을 통째로 빌려 버린 남자의 로맨틱한 퍼포먼스에 과몰입해 있었다.
특히 의상실의 주소와 열쇠를 건네주고 가 있으라고 하면서,
「부인에게는 말하지 말고.」
덧붙이는 아서를 보고 두 하녀는 거의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두 하녀의 머릿속에서는 ‘사실은 숨겨진 후작가 사생아인 레이나가 고난 끝에 진정한 사랑을 찾는 신분 상승 로맨스’ 한 편이 뚝딱 완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알아서 갈아입고 오라니 이게 무슨 맹물 같은 소린가.
“…….”
하지만 레이나가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서 아서는 슬쩍 몸을 비켜주고 싶다는 의견을 말하려 했다.
“굳이 내가 여기서 기다리지 않아도…….”
아서의 목소리에 브로디의 뜨악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서 경……? 설마, ‘굳이’ 레이디를 문 앞에서 기다려야 되냐고, 적당히 다른 데서 놀다 와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하신 건 아니시죠……?”
“…….”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무섭기만 했던 아서의 이미지는 어느새 하녀들의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어설픈 사랑꾼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상에.”
브로디는 언제 아서를 무서워했냐는 듯이 드레스 봐주는 남자의 자세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서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설교를 들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이러고 앉아 있으라고?”
브로디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여기에서 기다려 주세요! 드레스업하고 있는 레이디를 기다리는 신사가 해야 하는 일은 마네킹 구경 같은 게 아니니까요.”
“…….”
아서는 패배했다.
레이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브로디, 어차피 홀 전체를 빌렸는데 아서 경이 꼭 여기 앉아 있지 않으셔도…… 어디 계셔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솔직히 아서 경이 여기서 기다리시는 거 부담스럽……,”
브로디가 경악해 소리쳤다.
“어림없는 소리 마! 마리나!”
마리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척척 걸어와 슥 레이나의 팔짱을 끼더니 피팅룸의 커튼 뒤로 그녀를 연행하듯 끌고 갔다.
촤악!
피팅 커튼이 가차 없이 닫히며 마리나와 레이나를 삼켰다.
“…….”
브로디는 마지막으로 아서의 대답을 재촉했다.
“아시겠죠?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커튼 열리면 봐 주시는 거예요!”
아서는 결국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알았어. 아내를 잘 부탁해.”
브로디도 마리나와 레이나가 들어간 커튼 뒤로 사라졌다.
“…….”
아서는 커튼 너머의 공간에 혼자 남겨졌다.
그리고 물끄러미 닫힌 커튼을 바라보았다.
“…….”
본의 아니게 얼뜨기 흉내를 내게 됐지만.
하녀들이 뭘 말하는지 안다.
하지만 아서는 솔직히 예쁘게 꾸민 그녀를 ‘보는 순간’의 놀라움과 찬탄을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건 눈이 보이는 척하는 가식이 섞여야 하고, 진심이 아닐 것 같아서.
“…….”
시력 대신 옅게 퍼져 있는 오러가 피팅 커튼 뒤편의 소리를 실어다 주었다.
[히히. 뇌쇄시켜 버리자.]
[브, 브로디……. 이건 너무 과해.]
[절대로 안 과해.]
[아니야. 역시 어깨에 뭘 더 걸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무슨 소릴! 이건 여기가 포인트라구.]
[아냐, 아냐. 나랑 안 어울리는 거 같아. 다른 드레스 입을래.]
[진짜 예쁘다니까? 처음은 무조건 이 드레스야. 다음엔 너 원하는 거 입어도 돼!]
[나도 이건 브로디 의견에 찬성.]
[…….]
“…….”
이 정도의 거리에는 항상 습관처럼 펼쳐두는 오러였다.
눈을 대신할 수 있도록, 큰 무리는 되지 않게.
급박한 상황이 생기면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전쟁이 끝났으니 이젠 그런 위험한 상황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브로디라는 하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쥐더니 살짝 빗어 올려 대어 보는 것이 느껴진다.
[어깨 라인 드러내는 게 더 좋으려나? 입술 좀 더 붉게 할까? 반짝이는 걸 입으니까 좀 죽는 느낌인데.]
매의 눈으로 그녀를 뜯어보던 마리나라는 하녀가 나선다.
[나와 봐, 브로디. 내가 할게. 저기서 내 메이크업 박스 좀 갖다줘.]
“…….”
아서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오러를 거둬들였다.
그녀가 뭘 입고 있는지 알 수 없도록.
어쨌든 진심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 * *
브로디와 마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레이나는 꾸며 주는 보람이 있는 얼굴이었다.
섬세하게 땋은 밀빛 머리카락을 군데군데 섞어 틀어 올린 머리에 진주와 흰 꽃장식을 달았고, 자연스럽게 잔머리들이 흩날리도록 빼 두었다.
클래식하면서도 우아한 스타일에 레이나 특유의 순진한 풋풋함이 더해지자 묘하게 청아하고 심금을 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톡 터질 듯 부끄러움으로 발그레해진 눈가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며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젊은 청년이 그린 첫사랑의 수채화 같은 모습이었다.
마리나도 브로디도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레이나는 반짝이는 비즈와 레이스로 장식된, 가슴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메이드라인의 슬림드레스였지만, 뒤쪽에 길게 늘어뜨린 긴 트레인이 풍성함을 살리며 우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미 드레스를 완전히 차려입은 레이나는 더 물러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입술만 말아 물었다.
마리나가 어허, 그러지 말라며 입술 화장을 다시 고쳐주었다.
레이나는 민망해하며 입술을 물지 않으려 신경 썼다.
마리나는 브로디가 해 놓은 청순한 메이크업에서 힌트를 얻어 레이나를 평소 자신이 메이크업하던 스타일과 전혀 다르게 꾸며 주었다.
그동안 레이나를 크리스티나와 닮아 보이게 만들어 주었던 메이크업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레이나에게는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 칭송받는 크리스티나와는 반대되는 매력이 있었는데,
꾸민 자신이 어색한 듯 시선을 돌리고, 자꾸만 손을 들어 사슴 같은 하얀 목덜미를 감싸는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안쓰러우면서도 청아할 수가 없었다.
나 어색하지 않냐며, 살짝 그들을 올려다보는 레이나를 보고 두 하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얘 진짜 예쁘네.
레이나가 사교계에 나간다면 어쩌면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능가하는 미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소 위험한 일로 느껴졌다.
마리나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렇게 꾸민 건 아서 경 옆에 있을 때만 보여드려. 아가씨나 마님 눈에는 띄지 마. 뒤로 돌아봐.”
어쨌든 두 하녀는 밖에서 기다리는 남자를 생각하며 레이나를 최선을 다해 꾸미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레이나는 제 행운을 앞에 두고 자꾸만 주저하며 빼고 있었고, 아서도 밀어붙이지 않았다.
둘은 레이나를 도와주고 싶어졌다.
“…….”
레이나는 낯선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미인의 정점으로 생각했고, 마리나에게 메이크업을 받으면 아가씨 같은 미인이 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낯설지만 예쁜 것도 같고, 새삼스레 입어 보는 과분한 드레스가 어색한 것도 같고.
무엇보다도 아서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몹시 신경이 쓰였다.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는데도 주제넘게 헛바람 든 짓을 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다시 들려고 했다.
과하지 않아?
그런 레이나의 마음을 격려하듯, 브로디가 뿌듯한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예쁘다. 레이나, 정말 예뻐.”
마리나도 신중하게 자신이 만들어낸 역작을 마무리했다.
“좋아. 다 됐어.”
두 하녀가 자신 있게 레이나를 보며 서로 다른 표정으로 웃어 주었다.
용기가 날 만큼.
* * *
촤악!
하녀들의 기대 어린 침묵 속에 커튼이 열렸다.
거울을 대 드레스에 환한 빛을 비추자 드레스가 빛으로 반짝였다.
하녀들은 숨소리를 참았다.
아서는 커튼이 열린 순간 조금 놀란 듯하더니, 이내 신중하게 레이나를 응시했다.
“…….”
드러난 목과 어깨를 민망해하는 듯 감싸는 손이 스르륵 내려가며 레이나의 눈이 아서를 향했다.
아서는 가만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
그리고 다가가도 되냐고 물어본 뒤,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감싼 드레스의 옷깃을, 살짝 만져 보고…….
조용히 레이나를 마주 보았다.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지만, 하녀들은 말 없는 그의 눈빛을 보고 몹시 기뻐했다.
그리고 얼른 다음 드레스를 가져와야겠다며 서로 어깨를 치며 후다닥 피팅룸 밖으로 빠져나갔다.
“…….”
피팅룸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
너무 긴장한 티를 내고 싶지 않지만, 저도 모르게 숨이 멈추었다.
“…….”
차라리 무엇이든 그냥 빨리 말해줬으면…….
아서는 평소에도 종종 그녀에게 예쁘다는 말을 해 주곤 했다.
들을 때마다 민망하긴 했지만, 덕분에 레이나는 조금은 그의 칭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사실 레이나는 그가 예쁘다 칭찬해 주어도 새삼스럽게 부끄럽지는 않을 거라고.
평소에 많이 듣는 말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쉽게 ‘예쁘다’ 말해 주지 않았다.
그것이 왠지 더욱 레이나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레이나가 끝내 참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어보았다.
“……어울려요?”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고요해지는 분위기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애들은 예쁘대요.”
레이나가 어색하게 그를 보다가 끝내 시선을 피했다.
“……왜, 그렇게…….”
왜 그렇게 봐요.
긴장되잖아요.
“…….”
아무 말이라도…….
아서는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려 웃었다.
“……보고 싶어서.”
그리고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계속 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