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드레스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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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드레스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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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드레스숍으로
2022.05.22.
순간적으로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홀린 듯이 따라 나설 뻔했다.
그의 손을 잡고 저도 모르게 방 밖으로 나서기 직전에야 뒤늦게 정신이 든 레이나는 문틀을 붙들고 버티며 소리쳤다.
“아, 아서 경!”
“응?”
“저, 저 얼굴요!”
아서가 어리둥절해 레이나를 보았다.
“예뻐. 왜?”
“그, 그게 아니라!”
레이나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저 못 나가잖아요! 크리스티나 아가씨 행세를 하고 있는데 이 얼굴로 어떻게 드레스를 맞춰요!”
아서는 피식 웃으며 레이나의 손을 다시 끌었다.
“……!”
그리고 아서의 미소를 본 레이나는 문을 붙든 손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모르겠다!
아서 경에게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레이나는 아서를 따라 방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변장인가?
유명한 북부 대공 전하는 백금발의 과부님이랑 데이트할 때 평민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서 몰래 데이트 하던데.
우리도 뭔가 그런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는 건가?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전에 아서 경, 가면이라도 쓸까, 그런 얘기도 하셨었잖아.
레이나는 변장하고 나가게 될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는 아서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아서는 대외적으로 개선장군의 공무를 수행할 때 입는 제복 차림이 아니었다.
평민 옷차림이라기엔 너무 귀족적으로 입은 상태긴 했지만, 이 줄리어스 영지에서 저 정도 옷차림을 한 준귀족이나 젠트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의 차림 정도면 줄리어스의 거리에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지나치게 잘생긴데다 너무 유명인인 그의 얼굴이긴 하지만, 솔직히 삽화로나 알려졌지 줄리어스에서 그의 실물을 가까이서 제대로 본 사람은 얼마 없지 않나?
그럼 문제는 나뿐이다.
레이나는 아서의 앞에서 최혜국 대우로 꾸민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차려입고 꽃단장을 한 상태였다.
레이나에게 주어진 신방의 드레스 중 내심 가장 예쁘다고 눈여겨보았던 드레스를 골라 입었고, 브로디의 의욕에 힘입어 머리까지 섬세하게 땋아 꾸민 상태였다.
화려하게 말고, 나에게 어울리게 화장해 달라는 말에 브로디는 일전의 실수를 만회하듯 사랑스럽게 레이나를 꾸며 주었다.
그리고 그건 레이나가 무조건 눈에 띈다는 뜻이었다.
레이나는 크리스티나가 신방에 넣어두고 다시 찾지 않는 드레스들을 빌려 입고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최고급 드레스들만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레이나는 금발이고 객관적으로 시선을 끄는 미인이었다.
여기서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레이나는 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서는 레이나의 옷을 갈아입히지 않은 채 그녀를 데리고 그의 전용 계단으로 내려가 그의 전용 정원에서 그녀를 마차에 태웠다.
“!”
변장은?
그저 예쁜 양산 하나만 들려 주었을 뿐이었다.
레이나는 조마조마하게 입을 열었다.
“아서 경, 저 머리 풀까요?”
“왜? 지금도 예쁜데.”
아서가 돌아보며 웃었다.
“풀면 예쁘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만, 지금 나 최혜국 대우해 주려고 그렇게 꾸민 거 아니오?”
아서가 알아주자 갑자기 부쩍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용기가 생기지는 않았다.
레이나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요, 그럼 변장은요?”
“변장?”
아서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무엇으로?”
“평민으로……?”
“흠. 그런 걸 좋아하오?”
“……?”
아서가 짧게 고민하다가 웃었다.
“그것도 좋지만, 첫 데이트니까 오늘은 이렇게 가지. 지금 무척 예쁜데 아깝잖소.”
아서가 마차 천장을 툭툭 두 번 쳤다.
“법원으로.”
“!?”
네?
레이나는 얼어붙었다.
드레스 맞추자면서요.
법원은 왜 가요?!
* * *
결국 레이나는 상당히 겁을 집어먹은 채 마차가 멈추고 나서야 자신이 도착한 행선지가 법원이 아니라 법원 앞의 조용하고 품위 있는 드레스숍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드레스와 신사복, 법관과 변호사들을 위한 법복 따위를 전시해 둔 격식 있는 드레스숍이었다.
레이나는 너무 긴장해 있던 나머지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려 멍하니 마차 창밖의 드레스숍을 쳐다보았다.
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오전에 만난 변호사가 여길 추천해서. ……부인?”
“…….”
긴장이 풀린 레이나의 얼굴은 법정에 끌려가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왠지 모를 억울함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아아…….”
다리에 힘이 풀렸다.
힘 빠진 몸을 마차 등받이에 기대자마자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레이나는 정말로 긴장했다.
이제는 레이나가 가진 두려움이 전과 같지 않지만, 마음속의 모든 걱정이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황실을 상대로 한 사기 결혼이 문제 될지도 모른다는 건 여전히 무서웠다.
아서는 레이나가 법원에 간단 소리에 겁을 먹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래서 오는 길에 그렇게 말이 없었던 거요?”
레이나가 그저 오랜만의 외출에 새삼 긴장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서는 당황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내가 왜 법원을 간다고 생각한 거요? 제일 처음에 드레스를 맞추러 나가자고 했는데…….”
레이나는 맥이 빠진 채 시무룩해졌다.
“…….”
지은 죄가 있으니 제 발 저려서 그렇죠, 뭐…….
아서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게다가 오늘은 주말이야. 법원도 오늘은 안 열어.”
“!”
레이나는 더욱 머쓱해져서 빨개진 얼굴 위로 앞머리만 만졌다.
“……그렇네요. 요일 감각이 없어졌나 봐요. 일할 땐 주말만 기다렸었는데.”
뒤늦게 좀 더 합리적인 반론들이 떠올랐다.
그가 날 법정에 세울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손수 법원으로 데리고 왔을 리가 없다는 것.
일단 고소장을 받게 되고, 기사들에게 끌려가 구치소에 먼저 갇히게 됐을 거라는 것.
이렇게 에스코트 받아 마차를 타고 법원으로 올 리가 없다는 것…….
하지만 덜컥 착각한 건 그저 레이나가 법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막연하게 상상한, 황실 모독죄로 법정에 서는 상황에 대한 오랜 공포가 레이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서는 미안한 듯 찌푸려 웃었다.
“……내 탓이군. 미안.”
레이나는 오히려 자기가 민망해져서 짐짓 웃었다.
“뭐가 미안하세요. 매일 쉬게 해 주셔서 요일 감각이 없어진 거요?”
“당신을 집 안에만 있게 하는 거.”
“아니에요. 저 그 방에 있는 거 좋아해요. 그리고 애초에 고발당할 만한 일을 한 제 탓인데요, 뭐.”
아서가 피식 웃었다.
“혼인신고 외엔 법원 갈 일 없게 하겠소.”
“…….”
귀족 금혼령이 내려진 오 년 전부터 혼인신고는 법원 관할이 되어 있었다.
농담인 걸 알고 있었고 웃음도 나왔지만, 생각은 뻗어나갔다.
혼인신고라…….
내가 평범한 남자와 결혼을 다시 하고 혼인신고 같은 걸 할 날이 올까?
생각이 뻗어나갈 틈 없이 아서가 레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나올 수 있겠소?”
“네.”
아서가 레이나를 에스코트해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탁.
그의 손을 잡고, 레이나는 땅을 디뎠다.
주말의 법원 앞.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레이나는 새삼스럽게 법원 앞 드레스숍을 올려다보았다.
오 층 짜리 드레스숍이었다.
엄청나게 으리으리했다.
* * *
딸랑…….
마찰음 없이 맑은 종소리만 울리며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드레스숍은 단 한 명의 손님도 종업원도 없이 조용하게 텅 비어 있었다.
수많은 마네킹이 제각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홀에 전시되어 있었지만 그뿐, 하인조차 없었다.
“……?”
레이나는 조심스럽게 숨을 죽인 채 의상실의 홀을 두리번거렸다.
레이나는 처음 와 보는 드레스숍이었다.
레이나는 드레스숍에 갈 일이 종종 있었는데, 대체로 그녀가 방문하는 드레스숍은 두 부류였다.
하나는 ‘크리스티나 아가씨께서 보내 주신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 줄리어스 저택에 방문해 주세요.’라는 말을 전달하기 위해서 가는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따듯하기만 하면 되니 좀 더 싸게 해 주실 수 없나요? 할머니 거랑 제 거, 두 벌을 맞출 건데요.’라는 말을 하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드레스숍에서도, 레이나는 가을의 드레스숍에 사람이 없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지금은 데뷔탕트 예고가 돌고 있지 않은가.
모든 드레스숍이 주문 예약으로 난리가 났을 텐데.
더욱이 이렇게 크고 격식 있는 의상실이라면 귀족들의 큰 행사를 앞두고 더욱 붐비기 마련이었다.
레이나는 어리둥절해 고요한 의상실 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없기엔 지나치게 멋진 곳이었다.
“……왜 아무도 없죠?”
아서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원래 주말엔 안 여는 곳이오. 홀 전체를 빌렸소.”
레이나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홀 전체를요?”
아서가 싱긋 웃었다.
“내가 개선장군의 공무 외엔 대외 활동을 안 한다고 알려져 있으니, 일반적인 의류점에서 옷을 맞추는 것도 여의치 않겠다 싶었는지 변호사가 추천해 주더군. 이 의상실 사람들은 입이 무겁소. 원한다면 이렇게 홀을 비워주기도 하고. 그쪽 방면에선 프로라고 넌지시 알려 주더군.”
아.
레이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통유리 밖의 법원으로 향했다.
“법원 앞이라서 그렇군요!”
아서가 웃었다.
“아마도.”
레이나는 감탄했다.
법관들의 정보는 안전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니까.
이 의상실의 주 고객층과 운영 방식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거군요……. 아, 그럼 저, 옷을 어떻게……?”
마네킹이 입고 있는 드레스에 시선을 두고 있던 아서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내가 입혀 주겠소.”
레이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리고 얼굴에 서서히 벌건 기운이 올라왔다.
“……네?”
아주 짧은 찰나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잠들었을 때 그가 벗겨준 코르셋. 오 년 전의 일.
우리는 내외할 사이인가 아닌가.
부부로서 지내는 동안 쌓겠다던 추억.
그게 이런 건가?
거절하면 안 되는 건가?
아니 아무리 홀을 빌렸어도…… 당신이요?
내 코르셋 벗겨놓고 당신 민망해하지 않았어요?
“꺅!”
우당탕탕.
갑작스레 큰 소리가 나며 마리나와 브로디가 홀 안쪽 계단에서 엉켜 굴러 내려왔다.
양팔에 위층에서 가져온 드레스들을 한가득 안은 채였다.
아서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농담이오. 당신 하녀들을 데려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