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추억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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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추억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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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추억의 목표
2022.05.12.
브로디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오늘 너 줄 거 있는데.”
“응?”
똑똑.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나 보다.”
브로디가 레이나의 머리를 빗겨 주던 것을 잠시 멈추었다.
들어온 리오넬은 레이나를 향해 짧게 눈인사하고 브로디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브로디가 수고하셨다며 꾸벅하더니 그것을 받아와 레이나에게 내밀었다.
“자. 네가 부탁한 거.”
브로디가 웃었다.
“진주 귀걸이에 비하면 엄청 별거 아니긴 하지만. 이 방에서 두 번째로 네 거네.”
레이나는 미소 지으며 받아 들었다.
“고마워.”
브로디가 건네준 건 새 문서 보관함과 빈 노트였다.
레이나가 하녀 다락에서 스크랩북을 보관하던 낡은 나무 보관함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품위 있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원래 받던 급여에 항상 일정한 금액을 저축하며 알뜰살뜰하게 살던 레이나의 처지였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사치스러운 물건이었지만,
레이나는 이제 주급 30골드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가씨의 방에 들인다면 오히려 허름한 물건이 눈에 띌 것이었기에 레이나는 다소 비싸더라도 적당히 고급스러운 걸로 구해와 달라고 부탁한 참이었다.
“리오넬 경이 가져다주신 거야?”
브로디가 답했다.
“아니. 내가 가져왔고 기사님은 검수하고 돌려주신 거.”
“검수?”
브로디가 다시 레이나의 머리를 빗겨 주기 시작하며 말했다.
“이걸 가지고 들어오려니까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 네가 부탁한 거라니까 검수하고 주신다고 기다리라 하셨어. 그래서, ‘그럼 천천히 검수 보시고 문제없으면 갖다주세요. 전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하고 왔지.”
“아…….”
그렇지. 문서 보관함에 노트쯤 되면 당연히 검수당하지.
“아 참.”
물건값 줘야지.
레이나는 서랍을 열고 금화를 하나 꺼내 브로디에게 내밀었다.
브로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금화를 바라보았다.
순간 기분이 어색해졌다.
「―물건값. 남는 건 수고비.」
“그러니까. 문서 보관함 값이구…….”
평생 하녀를 했으니 이렇게 하면 하녀들이 아주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도,
금화를 주는 위치에 있을 거라 생각은 안 해 봐서 그런가 몹시 이상한 짓을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비싼 돈 들어가는 일을 시켜놓고 돈을 안 줄 수도 없었다.
레이나는 어색하게 금화를 내밀고 쭈뼛거렸다.
남는 건 너 가지라는 말이 입에서 안 떨어진다.
왜 이렇게 어색하지?
“…….”
브로디가 놀라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레이나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해 주었다.
“팁 주는 거야? 거스름돈은 수고비?”
……다행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레이나는 민망해서 고개만 끄덕였다.
“……마님한테는 비밀로 해 줘.”
후작 부인은 내가 주급 5골드만 받는다고 알고 있을 테니까.
브로디한테 금화를 줬다는 걸 알면 내게 다른 돈이 생겼다는 걸 쉽게 눈치챌 것이다.
그럼 내가 배신했다는 추측으로 금방 이어지겠지.
브로디가 무척 고마워하면서 돈을 받았다.
“고마워. 다 합쳐도 50실버 정도밖에 안 했는데……잘 쓸게!”
그러더니 자기 뒤통수를 만지며 머쓱하게 덧붙였다.
“받고 나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사실 이건 그냥 너한테 선물하려던 건데…….”
선물이라니?
레이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리야. 50실버짜리 선물을 어떻게 받아.”
어차피 너도 나도 줄리어스의 하녀 주급이 50실버인 걸 뻔히 아는데. 양심이 있지.
하지만 브로디가 곧바로 목소릴 낮추어 소곤소곤 말해 주었다.
“……나 사실 입단속하고 여기 있는 걸로 주급 2골드 받고 있거든. 비밀이다? 물론 넌 더 많이 받고 있겠지만…….”
레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브로디도 입단속 대가로 훨씬 높은 주급을 받고 있었구나.
브로디는 방긋 웃더니 레이나의 머리를 땋아 주며 다부지게 눈을 빛냈다.
“날 교체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내가 진짜 잘해 줄게.”
거울 너머로 브로디와 레이나의 눈이 마주쳤다.
브로디가 웃으며 쑥스럽게 말했다.
“사실 나 여기서 잘릴 뻔했거든……. 근데 네가 말해 줬다면서. 하녀는 교체하기 싫다고…….”
아.
케이 경이랑 면담했을 때, 새 하녀로 교체해 주느냐는 말에 아니라고, 그건 괜찮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트리스탄 경이 왠지 ‘브로디’를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케이 경이 각하의 명령이라며 일단 하녀는 그대로 두겠다고 넘겨주었던 것이다.
사실상 아서 경이 명령해 주신 거고, 내가 한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었는데…….
레이나는 머쓱해졌다.
하지만 왠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마음이 간질거렸다.
또래의 여자 친구와 이렇게 비밀 얘기 비슷한 걸 터놓고 소곤거리며 대화한 건 거의 처음이었다.
이거…… 좀 기분 좋네.
브로디가 계속 재잘거렸다.
“그런데 서류 보관함이랑 노트는 뭐에 쓰려구? 그러고 보니 너, 하녀 다락에도 그거 있지? 그건 갖다주지 않아도 돼?”
레이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스크랩북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레이나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같은 하녀 다락을 침소로 쓰던 하녀였기에, 레이나가 가끔 노트와 소식지를 가지고 무언가 꾸물꾸물 취미생활을 한다는 걸 브로디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거긴 사생활이 보호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레이나는 더듬거리며 황급히 변명했다.
“그, 그건 여기 있으면 너무 튈 것 같아서.”
그 스크랩북을 여기 들고 와서 케이 경이나 리오넬 경한테 검수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스토킹하던 대상이랑 같이 있게 된 스토커 같을 거야.
“아, 그렇네.”
브로디는 끄덕이면서 납득했다.
레이나는 얼른 딴청을 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도 레이나에게는 소중한 스크랩북인지라, 레이나는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았다.
“……하녀 다락에 내 자리는 그대로 있어? 못 간 지 오래됐는데.”
브로디가 대수롭지 않게 답해 주었다.
“응, 아마 그럴걸? 나도 숙소가 2인실로 바뀌어서 하녀 다락에 못 간지 좀 되긴 했지만 내 자리도 마리나 자리도 그대로야. 네 자리도 그렇겠지. 비싼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정신없이 볶이느라 바쁘기도 하고…….”
이쪽으로 옮겨진 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 레이나는 그 후의 하녀들 소식은 몰랐다.
“아직도 많이 바빠?”
브로디가 바깥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말도 마. 바쁜 것도 바쁜 건데, 요즘 하녀들 분위기 엄청 뒤숭숭해. 황실 하녀들이 온다고 해서.”
“황실 하녀들?”
“응. 렘브란트 경이 후작님한테 황실 안식년 하녀들을 추천했다지 뭐야. 일손 부족한데 자기가 오래 머물러서 폐 끼치고 있다고, 따로 도와줄 하녀들을 데리고 오겠다면서…….”
브로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은 받기 싫었던 모양인데 마리아 황후 폐하께서 흔쾌히 친필 서신까지 보냈대. 렘브란트 경이랑 아서 경을 잘 부탁한다고. 안식년에 있는 하녀들한테 벌써 편지까지 보내서 줄리어스 저택에서 일해도 된다고 했다나? 그러니 마님이 무슨 수로 거절해. ‘황후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하고 답장이나 예쁘게 해야지.”
사실 꽤 큰 소리까지 났다.
후작 부인은 렘브란트의 하녀 추천을 사양하려고 애를 써 렘브란트 경의 시간을 청해 그를 만났지만, 후작이 끼어들어 이렇게 말해 버렸다.
「허허, 이 사람아.」
「아무리 사위가 아들 같아도 당신이 그러면 돼?」
「황실도 그렇게 안 할 터인데.」
「이렇게 이 사람이 앞뒤 모르고 겸손을 떤다니까!」
후작은 아서에게 온 호의를 무슨 권리로 당신이 거절하냐며 짐짓 위엄 넘치게 그녀를 나무라고 렘브란트 경에게 고맙다고 말해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에 마님이랑 후작님은 미친 듯이 싸워댔다.
브로디와 마리나가 머무는 2인실이 거기서 많이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라 둘은 그 얘길 거의 다 들었다.
브로디의 목소리가 뾰로통한 투로 변했다.
“근데 그거 때문에 하녀들이 그 하녀들 머물 2인실을 꾸미고 있거든. 기분 이상하지 뭐야. 우린 하녀 다락에서 서른 명씩 자는데……. 일손 보태 준다고 하녀들 데려오는 건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일이 늘었잖아? 괜히 상전만 하나 더 는 것 아니냐구.”
투덜거리며 브로디의 말이 이어졌다.
“나랑 마리나가 널 도와주게 되면서 전용 2인실을 쓰게 된 것도 엄청 특혜잖아. 우린 2인실을 쓰는 하녀가 거의 없었으니까. 근데 황실 하녀들은 처음부터 2인실이라니 뭐냐 싶지. 급료도 우리보다 더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을 텐데. 처음엔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이 늘면 좋지 않나,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숙소는 완전 우리랑 다르고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대우 차이가 나니까……. 이상해, 하여간.”
레이나는 놀라워하면서 들었다.
새로 오는 하녀들은 2인실을 받는구나.
레이나도 줄리어스의 하녀라 줄리어스 저택에서 2인실을 줬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아무도 감히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후작가에서 서른 명씩 자는 하녀 다락은 모두가 불편해하는 숙소였다.
높은 급료의 대가라며 하녀들은 찍소리도 하지 않았지만…….
새로 오는 하녀들은 전부 2인실…….
“…….”
저도 모르게 부러운 마음이 스쳤다.
황궁 하녀들…….
최소한 세 곳 이상의 추천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테니, 어쩌면 하녀들에게 새로운 일터를 소개해 줄 수 있는 동료가 되지 않을까?
‘……나랑은 상관없나.’
어차피 난 여기에만 있을 테니 만날 일 없을 테고,
아서 경을 돕는 일이 끝나고 내가 배신했다는 것이 들통나면, 난 줄리어스 저택에서 쫓겨나게 될 테니…….
후작 부인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내게 추천장을 써 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 정도의 미래는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선택한 것이지만.
“…….”
레이나는 문서 보관함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함께하는 동안 좋은 추억을 만들자던, 아서의 이야기를.
레이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걸 샀다.
아서의 이야기를 모으는 스크랩북 대신 허전한 손을 달래줄.
그와 함께 하는 동안, 추억을 기록해 둘 노트였다.
* * *
「앞으로 낮에. 가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랑 같이 시간 보내겠소? 당신이 나한테 좋은 기억을 남겨 주었으니. 나도 당신을 보내주기 전에 당신이랑 추억을 만들고 싶은데.」
「추억이요?」
아서는 고개를 내리며 웃었다.
「당신 남편, 좋은 사람이었다고. 언젠가 날 괜찮은 사람으로 떠올려 줬으면 좋겠소.」
「당신도 나와 함께한 시간을 좋은 추억으로 가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고.」
“…….”
레이나는 대답 대신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정말, 진심으로 기뻐만 보이길 바랐다.
아서가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레이나는 악수하듯 그 손을 잡았다.
아서는 빙그레 웃고는 그녀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엄지로 쓸었다.
「……내 목표가 뭔지 물어봐 주시오.」
레이나가 물었다.
「목표요? 목표가 있으세요?」
「응.」
「어떤 목표인데요?」
레이나가 묻자, 그가 답했다.
「당신한테 30골드보다는 인상적인 무언가로 기억되는 거.」
아서가 웃었다.
「그게 내 목표요.」
「30골드요?」
레이나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아서는 그냥 레이나를 보며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