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선물 2022.05.08.
아서가 ‘그의 부인’ 앞으로 보내온 작은 선물이 보석상의 하인들에 의해 줄리어스 저택의 신방 앞으로 배달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직접 만날 수 없다는 말에, 하인들은 예상했다는 듯 정중한 태도로 아서의 기사들에게 그것을 전해 주고 돌아갔다. 리오넬은 레이나에게 아서가 당신께 보낸 것 같다며 그것을 건네주었다.
“…….”
‘그의 부인’에게 전해진 선물이라는 말에, 레이나는 머뭇거리며 자신 앞으로 온 것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가, 선물 상자 위에 놓인 카드에 적힌 메시지를 보고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낸 뒤 두 손을 내밀어 받아들었다. 레이나에게 온 것이 맞았다. 【 내 기다림의 주인. 】 【 꽃단장을 위한 물건이오. 】 【 최혜국 대우 잊지 말아요. 】 【 추신. 당신 때문에 늦잠을 잤어. 】 리오넬 경이 나간 후, 레이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것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았다. 아서 경은 의외로 조금 악필이었다. 그게 왠지 그 사람답지 않고 귀여웠다.
* * * 줄리어스 영지는 상단주들의 방문으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줄리어스 내성과 외성의 고급 살롱들은 내로라하는 거물 상단주들의 방문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격식 있는 접객 시설들은 밀려드는 손님들을 채 수용하지 못해 터져 나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줄리어스 영지에 집이나 숙박 시설을 사 버리는 상단들의 숫자가 늘어나며 줄리어스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원래도 줄리어스 영지는 입지가 좋은 비옥한 땅이었다. 거기에 황실의 샛별인 아서가 줄리어스의 후계자로서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하고, 황후의 큰조카이자 선제후 클라인 일가의 후계자인 렘브란트 경이 후작의 초상화를 핑계로 은근슬쩍 장기체류하며, 줄리어스 영지가 제국의 제2의 수도가 되리라는 기대감이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어스에 줄을 대려는 상단주들의 경쟁은 더더욱 치열해졌다. 아서가 이달 말쯤에는 수도의 개선식에 참가하기 위해 떠날 것이고, 렘브란트도 비슷한 시기에 함께 줄리어스를 떠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돌며 그들이 수도로 향하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만남의 기회를 차지해야만 제국의 가장 수준 높은 상인이라는 명예를 유지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 * *
“그냥 개선식 다녀왔다가 아서 경이 돌아오시고 나면 천천히 약속 잡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지금은 어차피 누굴 만나 주지도 않는다던데…….”
거대 상단 루모스의 상단주 후계자가 투덜거렸다. 그는 이렇게 굴욕적으로 누굴 기다리며 만남을 잡아 달라 부탁해 본 적이 없었다. 굽신거리며 줄리어스와 약속을 잡는 게 솔직히 피로하고 자존심 상했다.
“아서 경이 어디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잠깐 갔다가 여기 다시 오실 걸 왜 꼭 지금 만나야 한다고…….”
그들은 벌써 삼 주 가까이 줄리어스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들도 무척 바쁜 사람들인데 말이다. 안일하기 짝이 없는 후계자의 투덜거림에 분통이 터진 상단주가 쏘아붙였다.
“중요한 납품 계약과 독점권을 다른 상단들에 죄다 빼앗긴 후에 말이냐?”
애가 타는 상단주는 상황 파악 안 되는 후계자가 속 터졌다.
“뭘 믿고 돌아온 후엔 아서 경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아서 경은 수도에 다녀오면 무조건 공작이다. 그 후에는 줄을 대기가 더 힘들어질 거야. 지금 후작을 만나 두어야 다녀온 후에 아서 경을 만날 기회가 생기는 거란 말이다!”
그가 공작위를 받은 후에 허겁지겁 줄을 대는 것과, 그가 작위를 받기 전 미리 축하의 뜻을 전하며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분명 미리 쌓아둔 친분은 대우에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었다. 상단주의 최측근 비서가 후계자에게 그것을 설명해 주었지만 후계자는 더 속 터지는 말만 했다.
“아서 줄리어스 경이 진짜 거물로 인정받기 전에 줄을 만드는 거라고요? 그럼 솔직히 이미 늦은 거 아니에요? 아서 경이 아직 공작위를 안 받았다고 거물이 아닌 것도 아니고…….”
분통이 터진 상단주가 일갈했다.
“그렇다고 이왕 늦은 거 아예 더 늦자고?”
후계자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이러다 못 만나면 어쩔 건데요.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저택이랑 건물까지 사 놓고 이렇게 잔뜩 돈을 썼는데 허탕 치면…….”
상단주가 소리쳤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든 우리를 만나 줄 수밖에 없게 해야지!”
비록 아서가 개선식 전에는 개선장군으로서의 공무 외엔 누구도 사적으로 만나지 않겠다 못 박았고, 실제로 아서는 참전 용사와 유가족들 외에는 누구도 만나 주지 않았지만, 상단들은 줄리어스 저택 안에 발을 들일 기회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줄리어스 후작의 비위를 잘만 맞추면 렘브란트 이튼 폰 클라인을 볼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던 데다가, 개선식을 끝낸 후 아서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면 당연히 줄리어스에 방문하여 미리 축하 인사를 한 연이 있는 사람들이 우선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줄리어스와의 관계 구축, 렘브란트와의 교류 가능성, 아서와의 만남의 우선순위를 높여 두려는 포석 등, 복합적인 이유로 상인들은 후작 내외와 접선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전성기의 사교 시즌을 방불케 하는 인파였다. * * * 그리고 아서와 줄리어스 후작이 별문제 없이 돈독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몸값이 높아진 줄리어스 후작은 사람들을 가려 받았다. 한정된 기회는 ‘부실 보급 의혹’ 때 후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은 이들에게 먼저 돌아갔다. 순간적으로 주춤하는 기색을 내비쳤던 상단주들은 기회를 잃었다. 순서를 밀린 상단주들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어떻게 연관 있는 다른 상단들과의 자리에라도 살짝 낄 수 없는지 애타는 신호를 보내었다. 후작은 더욱 바빠진 만남 일정과 다급하게 밀려드는 선물들, 더욱 공손해진 상단들의 접근과 저절로 영지에 도는 막대한 돈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권세를 실감하며 만족하고 있었다. 거래가 만족스럽게 체결되고 한창 대화의 분위기가 좋게 무르익자, 후작과 이야기하던 상단주는 넌지시 아서에 대한 관심을 내비쳤다.
“아서 경께서는 개선장군의 공무 외엔 누구도 만나 주지 않으신다면서요? 아서 경께 꼭 진상하고 싶은 귀한 선물이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언제 묻나 했다. 은근히 아서를 볼 수 없는지 떠보는 듯한 상단주의 물음에, 후작은 허심탄회한 척하면서도 거만하게 웃었다.
“네. 말씀하신 게 사실입니다. 어찌나 성실한지. 참전 용사와 유가족들 외에는 누구도 만나 주질 않아요. 저도 보기가 힘듭니다. 아주 크리스티나랑 판박이죠. 걔도 얼굴 보기 힘든 걸로는 이만저만 유명한 게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 재밌는 얘기도 아닌데 상단주는 박장대소를 하며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하! 이거 천생연분이로군요! 공무 외엔 아무도 안 만나 주는 개선장군과, 승전 기원 미사 외엔 아무도 안 만나 준 레이디라니,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 뿌듯하시겠습니다. 부럽습니다, 후작 각하!”
상단주는 입 안의 혀처럼 굴며 후작을 치켜세워 주었다.
“아서 경이 아주 애처가라면서요? 그렇게 아름다운 레이디인데다 성격까지 꼭 맞는 천생연분이니 저 같아도 그럴 것 같습니다! 아서 경이 부럽습니다!”
“하하, 뭐, 신혼이니까요. 누군들 신혼에 안 그렇겠습니까.”
“아유, 아니죠. 어디 그냥 신혼부부랑 같습니까? 그런 보석 같은 미인을 아내로 얻고, 또 이렇게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시는 훌륭하신 장인어른에, 이 비옥한 땅과 명예로운 선제후 일가의 후계자가 되어서!”
어쩌고저쩌고. 후작은 한껏 거만하게 미소 지으며 줄줄이 이어지는 아첨을 만족스럽게 음미했다. 그리고 아서가 워낙 공사 구분에 철저하다 보니 신경 쓰게 하기가 미안하다며, 아서에게 온 선물을 제게 온 선물인 양 대신 거절하고 거들먹거렸다. 선물은 나중에, 아서가 개선식을 하고 돌아오면 그때 소개해 줄 테니 직접 전해 주라며, 선심 쓰듯 상단주가 고대하고 있을 미래의 만남을 암시해 주었다. 상단주는 이왕 가져온 것이니 우리 짐꾼들 두 번 일하지 않게 받아 달라며 졸랐다. 후작은 “이거 참……. 다들 이러시네.” 하며 곤란해했다. 늘 똑같은 레퍼토리였지만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아서로 인해 하루 종일 아첨을 듣는 후작의 마음속에서 아서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은 이미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아서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다 들어 주고 그와의 관계를 멋지게 개선하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 * * 은은한 빛깔의 크림색 진주 귀걸이가 레이나의 귀에서 반짝였다. 브로디가 레이나에게 끼워 준 진주 귀걸이를 요리조리 보며 감탄했다.
“와……. 예쁘다. 빛깔 좀 봐. 정말 잘 어울려.”
크리스티나의 물방울 진주 귀걸이처럼 화려하게 시선을 끌지는 않았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진주는 부담스럽지 않게 레이나의 얼굴을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지나치게 무겁지 않아 귀도 아프지 않았고, 레이나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이 무척 예뻤다.
“날 때부터 달고 태어난 것처럼 어울린다. 진짜 예뻐.”
과한 칭찬이었지만 브로디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레이나가 보기에도 정말 어울린다는 건 사실이기도 했다. 레이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민망해하며 눈치를 보았다. 브로디가 머리를 빗겨 주기 시작하며 들뜬 목소리로 작게 물어보았다.
“아서 경이 선물해 준 거야?”
레이나는 괜히 쑥스러워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선물까진 아니구. 테일러가 귀 뚫은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가벼운 걸 하라고 해서. 그래서.”
브로디가 웃으며 살짝 속삭였다.
“그게 선물이지. 처음으로 네 거가 생긴 거잖아.”
덧붙인 소리에 레이나는 새삼 얼굴이 붉어졌다. 내 거. 내 거라니…….
“네가 아가씨 걸 하면서 눈치 보는 게 신경 쓰이셨나 봐. 사려 깊으시다.”
“…….”
레이나가 부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브로디는 그런 레이나가 너무 재밌었다.
“아서 경이 잘해 줘?”
“…….”
레이나가 수줍게 웃었다.
“……응. 그런 거 같아.”
브로디가 싱글벙글 웃었다.
“앞으로는 이걸로 해 줄게. 그리고 상처 나게 해서 미안해. 귀걸이 때문에 다쳤을 줄 몰랐어.”
“아냐.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브로디는 제가 더 신이 나서 재잘거리며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오늘은 기분 좋아 보이네. 아서 경이랑은, 화해한 거야?”
“화해라니. 싸운 적도 없어…….”
레이나의 쑥스러운 듯 웅얼대는 대답에 브로디가 앓는 소릴 내며 좋아했다.
“달다……. 좋겠다. 너랑 아서 경 잘 어울려.”
“…….”
레이나는 그냥 웃었다. 그렇지 않아. 아서 경이 워낙 멋있으니까 그렇지. 크리스티나 아가씨랑 더 잘 어울리실 거야. 난 잠깐만 아서 경 도와드리면서 있기로 했어. 후작 부인한텐 비밀이야. ……이렇게 말할 순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