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 레이디 크리스티나 (71/210)


#71. 레이디 크리스티나
2022.05.05.


황실의 서신을 싣고 온 마차는 줄리어스 영지를 돌며

귀족 가문들을 방문해 황실의 초대장을 전했다.

그 즈음하여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가 기다려왔던 소식을 받게 되었다.

황실이 전하는 영광스러운 개선식과 오 년 만에 재개되는 데뷔탕트의 예고장이었다.

순식간에 소식이 퍼져 나갔다.

귀족들의 행사였음에도 줄리어스 영지민들은 모두가 신이 나서 기대감에 부풀었다.

제국에서 가장 크고 역사 깊은 두 행사의 주역으로 줄리어스의 아서와 크리스티나가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줄리어스 영지민들의 자부심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들은 이미 아서와 크리스티나를 자신의 가족처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어스에서 아서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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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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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카일 황태자가 있는데 개선식에서 아서 경이 주인공이 될 수 있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흥분한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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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누군데 카일 황태자를 갖다 대. 당연히 아서 경이지!”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가족이라도 모욕당한 듯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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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르잖아. 난 혹시라도 카일 황태자한테 우리 아서 경이 밀려나서 주인공 자리를 빼앗길까 봐 걱정인데.”

무턱대고 안심하지 않는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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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이. 그럴 리가 있나! 마리아 황후께서도 명예를 아는 분이신데.”

마리아 황후는 대중의 지지가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부진과 사연 있는 영웅인 아서의 폭발적인 인기에 밀려, 황후인 그녀의 인기는 한풀 꺾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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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경이 카일 황태자의 목숨을 구해 줬잖아. 황후는 고마워한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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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귀족 중의 귀족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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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더더욱 그렇겠지. 귀족들한테 무슨 뒷말을 들으려고.”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까지 끼어들며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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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아서 경이 예의상 사양하려고 할 수는 있어. 하지만 마리아 황후가 받아들이지 않을걸? 그럼 오히려 황실의 평판이 실추될 게 불 보듯 뻔하니까.”

점잖아 보이는 사람들도 말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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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소. 황실이 아서 경을 인정해 줄 생각이었다는 척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아서 경을 홀대한 세월이 길었잖소. 그걸로 뒷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개선식에서 황실은 아서 경한테 무조건 잘해 주는 모습을 보여 주려 할 거요.”

소식지의 평론들에서도 다들 비슷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일을 잘 모르는 평민들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여론은 확고했다.

줄리어스만의 민심이 아닌 제국 전체의 여론이었고, 줄리어스 영지민들은 그걸 더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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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황후 앞에서 아서 경은 좀 눈치 보이는 거 아닌가? 오랫동안 인정 못 받은 사생아라서…….”

종종 아서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걱정들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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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어. 뒤에 선제후인 줄리어스 후작가가 딱 버티고 있는데 황실이 전처럼 아서 경을 함부로 하겠어?”

영지민들은 이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해답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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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두 분 사이가 그렇게 좋다며?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주 든든한 백이 되어 주시겠구먼. 아서 경이 결혼을 잘했어!”

그리고 술집의 바 쪽에서 환성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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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인장이 쏩니다!”

거대한 쟁반에 맥주잔들이 가득 담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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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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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경의 개선식과 우리 아들의 귀환 기념이오!”

술집 주인이 공짜 맥주를 돌리며 흥을 돋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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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용사님 귀환 축하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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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소. 자자 잔들 들어요!”

기분 좋은 덕담들과 축하의 말을 대신하는 눈빛들이 오갔다.

주인장이 잔을 높이 들며 건배사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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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경의 개선식과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데뷔탕트를 위하여!”

뎅 하고 종소리 대신 스푼으로 잔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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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하여!”

어떤 날엔 술집 주인이, 어떤 날엔 기분이 좋은 손님들 중 한 명이 술집 전체에 술을 샀다.

줄리어스 영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영지에 많은 돈이 돌며 영지 사람들은 인심이 넉넉해졌다.

후작이 베푼 풍성한 거리 축제와 병사들을 소외시키지 않는 넉넉한 보상금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주었다는 점도 후한 민심에 한몫했다.

영지에 돈벼락이 쏟아지고 있었다.

명예가 함께하는 돈벼락이었다.

줄리어스 영지의 분위기는 최고조였다.

* * *

승전하여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온 참전 용사들은 총사령관 아서를 아끼며 존경했다.

아름다운 크리스티나가 유가족 방문을 하는 아서를 따라다니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목격된 후,

그녀가 자신의 사비를 유족 위로금으로 지출하기까지 했다는 기사가 미담으로 회자되며 줄리어스 후작가에 대한 분위기도 반전되었다.

줄리어스 영지민들은 자기 몫의 행운에만 취하지 않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이웃들을 위로했다.

민중들은 행복해하면서도 경건해졌다.

아서가 무척 크리스티나를 아끼며 둘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아서가 사기 결혼 건에 대해 약속대로 침묵하자,

후작이 자신의 사업에 그의 이름을 보증 수표처럼 이용하며 은근슬쩍 아서와 크리스티나의 사이를 과시하듯 떠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서가 줄리어스에 귀환한 날, 크리스티나를 손수 안고 저택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

크리스티나와 비밀리에 함께한 유가족 방문,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오 년 동안 철저히 신의를 지키며 그 어떤 사교적 교류도 하지 않고 사원 미사만 드렸다는 객관적인 사실 등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그것은 꽤나 그럴싸한 세기의 로맨스처럼 퍼져나갔다.

아서의 높은 인망에 힘입어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에 대한 민심도 함께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줄리어스 영지민들은 그들의 아서 경이 개선식의 주인공이 될 것이며, 뒤이어 데뷔탕트의 퀸까지 배출할 것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 * *

【 레이디 크리스티나, ‘사비’ 털어 전사자 유족 위로 】

【 유족 연금 지급 거절된 유가족에게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개인 금고 열어 거액 전달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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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는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사재를 털어 전사자 유가족을 챙겨 주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았다.

줄리어스가 위로금을 챙겨 주지 않아 문제가 될 뻔한 사건.

후작 측이 ‘유족 연금 지급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반려했던 사람이었다.

전투 중 사망이 확실히 확인되지 않아, 탈영 후 사망이나 자살이 의심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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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돈을 쓰기 시작했다.

아서를 훌륭하게 내조하는 방향으로.

더불어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여전히 아서를 찾아와 매일 한 시간씩 서서 기다린다는 보고도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기를 부리는 건가 했는데.

슬슬 그녀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이 파악되었다.

그녀는 조용히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과오를 묻으려는 후작과 달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수습하고 사죄하고 있다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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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작은 이걸 눈치 못 채고 있는 건가?

아버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후작에게 뒤집어씌우고, 후작가의 실권과 명분을 틀어쥔 채 아서의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암시가 느껴졌다.

설령 ‘사기 결혼 건’이 밝혀지더라도, 그녀가 후작을 버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향이었다.

그것은 아서에 대한 도전이나 공격이라기보다는, 그녀가 후작을 버리고 아서의 편에 설 의향이 있다는 신호로 보였다.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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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건가요?’

하는 정중한 물음과 기다림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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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이 건의 폭로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건가?

아서로서는 방해할 이유가 없는 포석이었다.

아서는 황실의 보증하에 후작과 ‘줄리어스’ 가문의 공동 지배권자인 상태.

여기서 후작이 사라지고 크리스티나만 남는다면, 아서는 명분도 챙기고 ‘줄리어스’ 가문은 온전히 자신의 손에 쥘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가장 이상적인 경우의 이야기고.

실상 ‘기반’이 확실하지 못한 아서는 그런 싸움에서 불리했다.

황실은 강력한 뒷배지만, 황후가 정의로운 분노를 표방해 줄리어스를 응징하려 한다면

비호해 줄 세력이 없는 아서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줄리어스 가문은 ‘선제후’를 잃게 될 거고,

크리스티나도 피할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된다.

결국 제 살 깎아 먹는 짓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오픈’이었다.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제안.

당신에게 도움이 되리니, 날 용서하라는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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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믿어도 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저렇게 행동하고 있는 이상,

계속해서 용서를 빌며 의무를 다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레이디를 아서 경이 받아 주지 않고 기사들 앞에 세워둔 채 모욕하고 있었다는 빌미를 주어선 안 됐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가 돈을 쓰는 방식은 그녀를 민중들로부터 사랑받게 만들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는 아서의 아내로서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행보로 독자적으로 민중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 아서가 믿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뒷배는 민중이었다.

아서가 정의로운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잃어선 곤란했다.

크리스티나는 명분을 쌓고 있었고,

아서는 그런 믿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 * *

케이는 종종 그랬던 것처럼 리오넬을 불러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동향을 확인했다.

혹여라도 문제될 만한 일이 없었는지.

그녀는 언제나 똑같은 말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아서 경은 만날 수 없다는 거절을 들은 다음.

늘 한 시간을 꽉 채워 기다린 뒤,

자신이 기다렸다는 것을 전해 달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케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빌미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암시와 함께,

크리스티나를 좀 더 예의 갖추어 대해 주고, 그녀가 곤란에 처하거나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신경 써 달라는 부탁을 했다.

리오넬은 가만히 들은 뒤 알겠다고 대답했다.

* * *

또각. 또각.

그날도 찾아온 크리스티나는 리오넬에게 평소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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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경을 뵈러 왔습니다만. 계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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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지 않습니다.”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안에 있다는 것을 서로가 뻔히 알면서도 하는 귀족들의 사교적 거절.

크리스티나는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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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몸을 돌린 크리스티나는 늘 서서 기다리는 자리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놓여 있는, 누군가 가져다 둔 하찮은 의자를 발견하고 잠시 거기에 시선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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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아서를 기다리는 크리스티나의 자리 옆에 작은 나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녀들이 일할 때 쓰는, 높은 곳에 손이 닿지 않을 때 밟고 서곤 하는 조그만 나무 스툴이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물건이었겠지만.

언제나 새것 같은 구두를 신고 또각거리며 걸어와 한 시간씩 도도하게 서 있는 크리스티나의 발꿈치엔 썩 편치 않아 보이는 상처가 여럿 생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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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앉지 않은 채 평소와 똑같이 의자 옆에 섰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그날, 의자 옆에 두 시간 동안 서 있다가 돌아갔다.

돌아가기 직전.

찰칵. 회중시계를 열어 시각을 확인한 뒤.

언제나와 다름없는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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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다렸다는 걸 전해 주십시오.”

금색으로 빛나는 긴 속눈썹을 내리까는 인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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