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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위안 (69/210)


#69. 위안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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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그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모았던 스크랩북 속의 아서를 생각했다.

소식지의 삽화에서 삼 미터는 되어 보이는 훤칠한 기사님으로 그려 내고, 찬란한 샛별이니 세기의 개선장군이니, 미사여구로 꾸며 대는 멋진 영웅담의 실제는 상상과 달랐지만.

소식지 너머의 영웅이 아닌, 비로소 진짜 그를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레이나는 거기서 애달프고 괴로운 충족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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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그 이후로도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밤이 깊어가도록.

졸리지 않냐는 말에도.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졸리지 않아요.

더 이야기해 주세요.

피곤하지 않으시면…….

조금만 더요.

이 밤의 시간이 가는 것이 몹시도 아까운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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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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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한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며, 이번에는 레이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레이나도 더 이상 가족 이야기를 약점처럼 조심스러워하며 숨길 이유가 없었기에 무엇이든 그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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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이야기와는 어딘지 근본부터 너무 다른,

별것 없는 자신의 이야기가 머쓱하긴 했다.

그래도 무엇이든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동안 답해 주지 못했었으니까.

어떻게 지냈냐는 이야기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아가씨의 일과를 더듬더듬 주워섬겼던, 예전의 미안함이 남아 있는 탓인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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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가족이 많지는 않아요. 저한텐 할머니뿐이거든요.”

그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에도 엄마 아빠는 있었던 적이 없었어요.

대신 항상 할머니가 있어 주셨어요.

엄마 무덤에 엎드려 있으면 늘 할머니가 저를 업고 데리고 돌아와 줬던 게 기억나요.

저는 그냥…… 왠지 할머니한테 업히고 싶어서.

항상 거기 엎드려 잠든 척을 했던 거 같아요.

아주 어릴 때 말곤 할머니가 자주 업어 주시지 않았는데

제가 그러고 있으면 항상 업어 주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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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가만가만히 말을 이어갔다.

아서는 그동안 들어 주었다.

레이나가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가 업어 주는 걸 좋아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착한 아이는 아니었어요.

가끔씩은 집에 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고 싶었던 것도 같고.

그냥 걷기가 싫었던 것도 같고.

뭔가…… 별것도 아닌 게 굉장히 억울했던 거 같아요.

집에 가는 게 억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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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별거 없죠.”

머쓱해하며 레이나는 웃었다.

가만히 들어주던 아서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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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네. 나도 어머니 무덤에 엎드려 있었으면 누가 업어 줬을까.”

레이나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옆집에 살았다면 저희 할머니 등을 빌려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옆집에 살게 되면 그대는 내가 업어 줄게…….

……굉장히 쉽게 불효녀로 만드시네요…….

아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머리를 만져 주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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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당신 할머님을 잘 봐 줬으면 좋겠군.”

레이나가 따스하게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슬그머니 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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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는 그냥 친구예요. ……저 오늘 결혼반지도 끼고 만났어요.”

아서가 이마를 짚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꽤 오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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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웃으실 일인가요?”

하며 결국엔 레이나가 원망스레 따라 웃어 버릴 정도로.

아서는 그녀의 옆머리를 만지며 웃음기 남은 낯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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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반지는 끼고 만나 줘. 지금은 그래도 내가 당신 남편이니까.”

레이나는 말 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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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운 방.

바람 소리.

창문에 부딪히는 가을비.

서늘한 공기와 장작 타는 냄새.

햇살 냄새가 나는 포근한 이불.

벽난로 안에서 타는 나무가 방 안을 물들이는

따스한 빛깔.

머리를 쓸어 주는 손.

레이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기억에 새겼다.

레이나는 아서가 옆의 협탁에 내려놓은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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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고 계셨어요?

아서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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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당신을 보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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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핑계로 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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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당신을 보고 있었다고 하면 무서울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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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날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레이나는 살짝 웃으며 눈을 감고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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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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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우면 이렇게 당신을 베고 있겠어요?

그가 웃었다.

* * *

내가 남겼던 말이 그에게 특별한 위안이 되었다는 것은 몹시도 벅차고 슬픈 일이었다.

고작 그런 말이 뭐라고.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그 말이 뭐라고.

어쩜 그에게 그보다 위로가 되는 말을 해 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

그것이 대단한 말조차 아니었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왜 난 더 좋은 말을 해 주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기도 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더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었을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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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히려 그 말조차 하지 못했을까.

* * *

똑똑.

집사장이 방문자의 존재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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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마님. 테일러 군이 왔습니다.”

늦은 밤이었음에도, 그녀가 직접 부르고 기다리고 있던 만남이었기에 후작 부인은 시간을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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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선 테일러를 후작 부인이 미소로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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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우리 젊은 로렌슨 선생.”

후작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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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이 이젠 제법 어울리는구나.”

테일러가 예를 표하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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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후작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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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앉게.”

테일러는 후작 부인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후작 부인이 우아하게 앉으며 부채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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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는 대충 다 들었나? 로렌슨 선생이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테일러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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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세히 듣진 못했습니다. 후작가에서 정식으로 맡겨 주신 첫 번째 일이니 실망시켜 드리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고 해야 할 일은 알려 주셨습니다만, 아버지께선 그저 임기응변이 필요할 일이 있을 텐데, 어디 한 번 제 역량을 보겠다며 사정을 알려 주시지 않고 테스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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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맡은 일은 수행했으나 앞뒤 사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후작 부인은 대답 없이 집사장이 차를 내리는 것을 기다렸다.

그 뒤 묵묵히 찻잔을 들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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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과연 앨빈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네. 자네 아버지 같은 사람을 그 옛날에 알아보셨다니, 역시 어머님께선 안목이 대단해. 덕분에 내가 자네를 알아볼 기회를 얻기도 했고.”

후작 부인은 그들과 로렌슨 일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상기시키며, 은근히 테일러를 떠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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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찬이십니다.”

후작 부인이 테일러에게도 차를 권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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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땠을까? 아버지의 테스트는 잘 해낸 것 같나?”

후작가의 거짓과 비리에 연루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는지 탐색하듯,

넌지시 건네오는 물음에 테일러는 겸손하게 시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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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제가 판단할 몫은 아니겠지요. 후작 부인께서 판단해 주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후작 부인은 테일러의 대답에 만족한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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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후작 부인은 테일러의 대답을 한 번에 믿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그의 태도에 온건한 합격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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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작 부인은 사실 테일러가 레이나를 만나고 무엇을 파악해 왔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레이나의 충심이 변함없는지도 알고 싶었고,

할머니를 잘 돌봐 주고 있다는 소식을 테일러로부터 직접 들은 후, 그 애가 얼마나 더 감격하고 충성스러워졌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테일러가 상황을 완벽하게 알지 못하고 들어갔던 거라면, 상황 파악을 하는 데에 대부분의 주의를 쓰고 말았을 테니 오늘은 많은 정보를 가져오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웠지만, 과연 앨빈 로렌슨의 선견지명대로 이것도 필요한 과정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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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후작 부인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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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만나고 왔지? 어떡하고 있더?”

테일러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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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압박을 받고 있는 듯한 상황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방 밖에서도 십수 명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기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요.”

조금 걱정하듯, 망설이는 기색으로 테일러의 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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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안에서까지 기사가 두 명이나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좀 놀랐습니다. 삼엄한 경계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작 부인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삼엄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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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안에서도 기사가 둘이나 지키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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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가씨가 다른 사람인 걸 보고는 이유는 저도 납득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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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러는 일부러 확신이 없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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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이랬습니까?”

후작 부인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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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는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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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들어오셨습니다. ……꽤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저를 꽤 강도 높게 경계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테일러는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는 낌새를 내비치며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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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버지께서 방문하실 때도 항상 그랬는지……. 아니면 제가 아버지와 달리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 그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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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러는 순종적으로 후작 부인에게 보고하는 척하며 레이나에 관련된 후작 부인의 정보를 역수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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