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가족
(68/210)
68. 가족
(68/210)
#68. 가족
2022.04.24.
어둠 속에서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쩌면 당신이랑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오만한 생각을 했었소. 전쟁에서 돌아오면서는 누구나, 고향에 두고 온 여자 이야기들을 하니까.”
“…….”
“나와 징집군을 그렇게 대한 ‘줄리어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려해야 하기도 했고. 당신 생각도 때때로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소.”
“…….”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서가 짧은 틈을 두고 슬쩍 웃었다.
“내 어리석음을 고백하건대, 고민은 나만 하면 되는 줄 알았소. 내가 당신과 함께하겠다고 하면, 당신을 곁에 둘 수 있는 줄 알았거든.”
“…….”
“당신한테도 나랑 엮이고 싶지 않을 이유가 있을 수 있단 생각을 못 했어.”
레이나는 물끄러미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아서는 조용히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시선은 먼 곳으로 향한 채 말을 이어 갔다.
“뭐든 자기에게만 선택권이 있을 거라고 믿는 오만한 귀족들을 비웃었는데. 여자가 친절한 말 한마디 건네준다고 제게 마음 있다 착각하는 놈들을 비웃었는데.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소.”
아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당신은 고려도 안 했을 텐데.”
아서는 레이나를 내려다보며 담백하게 물었다.
“당신은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으니, 내가 가진 위험에 휘말리고 싶지 않겠지?”
“…….”
레이나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서도 그것을 아는 듯했다.
그러나 레이나는 그것을 표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서가 진지한 얼굴로 덧붙여 물어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좀…… 잘생겼어도?”
“…….”
정적이 흘렀다.
레이나는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
아서가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역시 얼굴은 좀 잘나 봤자 별 쓸모가 없어.”
“…….”
얼마간의 정적 후에.
풉 소리와 함께 웃음이 터져 버렸다.
레이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끅끅 웃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웃을 일인가.”
아서가 서운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며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일부러 그러는 듯, 장난스러운 태도였다.
“크흠. 죄송해요.” 하고 눈물을 훔치면서도 레이나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꽤 오랫동안.
* * *
아서가 피식 웃더니 말을 시작했다.
내 잘난 얼굴은 아마, 어머닐 닮았을 거요.
본 적은 없지만.
무척 미인이셨다더군.
아서는 그렇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어머니는 배우였소.
어떤 도시에서 공연을 하다 황제 폐하의 눈에 들었다더군.
내가 태어났고 어머니가 아이의 아버지로 황제 폐하를 지목했지만,
폐하는 인정하지 않았소.
어머니는 유명한 주역 배우였고, 많은 남자 배우들이랑 일했거든.
어머니에게 아이 아버지로 지목받을 만한 남자가 몇이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어머니에게 당신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게
황제 폐하에겐 중요한 문제였던 거 같아.
뭐 이해는 해. 황제니까.
우스운 꼴이 될 수는 없었겠지.
자기 자식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잘 모르겠다 하기는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었으려나.
비슷한 시기에 마리아 황후가 만삭이기도 했고.
“…….”
황제 폐하는 내가 자기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침묵했고,
어머니는 날 낳고 일주일만에 산욕열로 죽었어.
황제는 찾아오지도 않았다더군.
돌아가신 어머니 입장에선 좀 너무한 처사지.
“…….”
하지만 뭐, 미리 와서 봤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겠다 싶기는 해.
어떻게 몇 달 만에 황제가 날 보긴 했다던데.
황제는 자길 닮은 데가 없는 내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더군.
난 어머니를 닮아서, 황제의 자식이란 증거는 눈에 띄지 않았거든.
그걸로 황제 폐하의 관심은 끝이었지.
“…….”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지금이야 내가 선황제 알렉산더 루사익 2세를 닮은 회색 눈이라고 화제가 되지만,
난 아주 어릴 땐 푸른 눈이었다더군.
제국민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황제는 자색 눈이고.
머리칼은 어머니를 닮은 흑발이었는데…….
흑발에 푸른 눈이라면 황실 핏줄엔 없는 모습이고.
어머니는 또 붉은 눈이셨거든.
근데 아이가 푸른 눈이었으니.
“그래서 갓난아이일 때의 날 본 황제 폐하는 내가 당신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
레이나는 조용히 아서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도 아는 이야기였다.
아서의 ‘회색 눈’에 대한 이야기.
“나로선 겨우 눈 색 같은 걸로…….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
당사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누구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아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가 내 핏줄에 대해 거짓말을 했노라 생각했다면, 무관심하게 외면해 살려 두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긴 해.”
“…….”
욱신하고 가슴이 죄어들었다.
레이나는 숨을 죽였다.
* * *
덜컹…….
수도에서 보내온 서신들을 싣고 온 황실의 서신 마차가 도개교를 건너 줄리어스의 성문을 두드렸다.
사전 약속도 없었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격식을 갖춘 마부의 귀족적 옷차림과 마차에 박힌 황실의 인장은
외성의 문, 내성의 문, 줄리어스 저택의 문을 차례로 쉬이 열었다.
* * *
【 친애하는 조카, 렘브란트에게. 】
【 그대 뜻대로 하세요. 】
【애정을 담아. 마리아 아비가일 폰 루사익. 】
* * *
【 친애하는 나의 방패. 】
【 잘 도착했다. 】
【 너도 빨리 와라. 】
【골든 트로피. 】
【 추신. 아서와 레이디에게 안부 전해 주길. 】
【 내가 준 편지는 전했어? 】
* * *
마리아 황후와 카일 황태자로부터 온 서신을 차례로 읽어 내려가던 렘브란트가 이마를 긁적였다.
“아.”
그 ‘편지’?
그게 편지라고 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
장난으로 준 줄 알았는데.
……미안하네.
만날 기회를 아직 못 잡았는데…….
렘브란트가 눈앞의 개인 서신함 안, 맨 위에 놓인 황태자의 ‘예전 편지’를 힐긋 바라보았다.
밀봉은커녕 봉투에도 넣지 않고 카드에 대충 휘갈겨 건넨 황태자의 편지는 그 내용이 그대로 보란 듯이 드러나 있었다.
* * *
【 친애하는 레이디에게. 】
【 아서를 잘 부탁해요. 】
【 아서가 당신을 오래 생각한 모양이더라구요. 】
【 재회를 기다리며. 】
【 라이언 달튼과 아서가 부러운, 】
【 노숙이 익숙한 와인 배달부. 】
【 추신. 다음엔 술은 준비하지 않겠습니다. 미안해요. 】
* * *
아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태어나고 한 해를 꽉 채웠을 때쯤 눈 색이 변하면서 회색 눈이 되었다더군. 하지만 큰 의미는 없었어. 할아버지인 선황제께서 회색 눈이긴 했지만. 황제가 외면하고 기반도 없는 사생아를 위해 누가 굳이 기억해 줬겠어. 서른다섯에 요절하신 선황제께서도 어릴 때 푸른 눈이었다가 회색 눈이 되었다는 걸.”
“…….”
아이의 눈 색이 변했는데 할아버지를 닮은 거 같다. 당신 핏줄인 거 아니냐. 다시 봐야 하지 않겠냐.
누군가 그런 식으로 주장해 줬대도 억지로 하나 간신히 찾아낸 것 같은 공통점이라.
솔직히 나 같아도 비웃었을 것 같은데.
아서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
“하지만 시간이 좀 더 많이 흐르고 나서…… 눈 색깔 같은 것보다 훨씬 확실한, 황실에만 있는 어떤 핏줄의 증거를 내가 물려받은 걸 뒤늦게 알게 됐고.”
“…….”
아서의 목소리는 그즈음에서 한동안 멈추었다.
레이나가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황실이 인정한 건가요?”
아서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뭐……. 바로 인정해 주진 않았지만, 비슷해. 그때부터 날 보험으로 두고 이용할까 말까 주판을 튕겨 보기 시작한 것 같으니까.”
“…….”
전쟁에 나갈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가진 게 없었지만, 마침 줄리어스가 있었고.
줄리어스 일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면, 황실이 그동안 날 인정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이용하려 든다는 인상도 들지 않으니.
“…….”
내가 잘되어 돌아오면,
그동안 인정하지 않은 걸로 보였겠지만 황실이 남몰래 사생아에게 좋은 혼처를 주선해 주려고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고, 명예를 되찾을 기회를 주려 했다.
―뭐 그런 식으로 면피할 수 있기도 하고.
“……썩 아름다운 얘긴 아니지.”
아서가 웃었다.
“덕분에 나한테 보증이 확실한 계약서와 좋은 기회가 왔다는 건 사실이지만.”
“…….”
레이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모든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들었다.
열심히 모은 소식지로도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영웅이 해 주는 그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줄리어스에 오게 됐어.”
“…….”
“나한텐 선택권이 없는 일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