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곱씹게 됐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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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곱씹게 됐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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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곱씹게 됐나 봐
2022.04.21.
아까, 가짜 연인 행세라 했나요.
솔직히 조금은 염두에 두었다는 걸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만…….
그런 건 제 방식은 아닙니다.
전 그냥 그 오해를 풀어 드릴 참입니다.
제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곧 사실을 알게 되실 거고.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극적인 그림이 되느니.
제가 직접 일 커지지 않게 잘 알려드릴 생각입니다.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아시는 게 낫습니다.
저는 아서 경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왕이면 레이디도 무탈하게 행복하길 바랍니다.
아서 경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대단한 사람이지만.
아서 경의 곁이 아닌 곳이
레이디에게는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레이디는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고
목숨 건 정쟁 따위에 휘말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잖아요?
당신이 지키십시오.
당신이 짐작한 대로 아서 경은 그분에게 흔들리고 있지만
당신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면
결국 그녀를 안전하게 돌려보내 줄 겁니다.
그녀에게 진심이라면 포기하지 마세요.
내가 돕겠습니다.
* * *
타닥.
벽난로에서 불티가 튀었다.
파르스름한 찬 기운이 도는 어두운 방안을 벽난로와 촛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이 물들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조명이었지만,
아서는 조용히 촛대를 들어 초마다 불을 옮겨 붙였다.
휘잉…….
가을의 밤공기는 찼다.
곧 비가 올 듯, 습한 밤바람이 창유리를 두드렸다.
닫혀 있음에도 창 새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레이나는 잠결에 추운 듯이 웅크렸다.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치고, 아서는 침대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 * *
“…….”
레이나는 조용히 잠에서 깨어났다.
하늘은 새카맸다.
어둠 속에서 벽난로가 타고 있었다.
아서의 회색 눈과 검은 머리카락 위에 불빛이 반사되어 일렁였다.
“…….”
“…….”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소를 보내왔다.
그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앉아 있었다.
레이나는 조용히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한밤중이네요.”
아서가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피곤했소? 오래 자더군.”
“기다리셨어요?”
아서가 대답했다.
“응. 당신이 기다린 만큼 나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레이나가 푸스스 웃었다.
“감사해요. 하지만 시간이 아까워요……. 다음에는 제가 자고 있으면 깨워 주세요.”
아서가 저편으로 시선을 내리며 웃었다.
“알았어. 다음엔 깨워 주겠소. 당신이 너무 피곤해 보이지만 않으면.”
레이나가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주었다.
레이나는 편안하게 그의 손길을 받으며 뒤척였다.
“나를 기다렸어?”
레이나가 웃었다.
“네. 조금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늦게 오시거나 못 들어오시면. 그럴 거라고 알려 주세요.
알았소.
레이나가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 정말. 잘생겼다.”
“…….”
아서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아, 죄송해요. 잠이 덜 깼나 봐요.”
어둠이 그녀의 얼굴색을 가려준 덕인가.
레이나는 제법 성공적으로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아서는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는 그녀의 목과 귓가가 뜨거워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당신도 오늘 무척 예뻤소. 드레스도 평소보다 화려하고. 머리도 땋았고……. 귀걸이도 했지.”
그가 아직 땋았던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를 살살 손가락으로 빗어 풀어 주며 물었다.
“나랑 있을 때는 왜 이렇게 안 꾸며?”
“…….”
두피에 닿는 손가락의 느낌이 기분 좋았다.
레이나는 눈을 감았다.
모든 걸 털어놓은 탓일까, 왠지 몹시도 쉽게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굉장히…… 주제넘게 헛바람 든 것처럼 보일 거 같아서요.”
아서가 가만가만 그녀의 머리를 풀어 주며 말했다.
“평소엔 이렇게 꾸미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꾸미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레이나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끼며 대답했다.
“꾸미는 게 싫진 않아요. 하지만 제 게 아니니까요.”
아서가 짧게 틈을 두고 물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예쁘게 했소?”
레이나가 천천히 대답했다.
“오늘은 브로디가 해 줬어요. 제가 해 달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하녀가?
네. 제가 우울해 보였나 봐요.
꾸미면 기분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 준 것 같아요.
……상냥한 친구예요.
“……우울했던 건 내가 안 와서야?”
“…….”
레이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긴 했는데…… 무슨 다른 기대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고요.”
“…….”
“그냥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진 기분이 들어서 그랬나 봐요. 바보 같죠.”
그리고 레이나는, 브로디가 자기를 얼마나 열심히 꾸며 주었는지를 괜히 길게 이야기했다.
“그렇군.”
아서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왜 이렇게 예쁘게 했나 했어.”
레이나는 눈을 감은 채 살짝 웃었다.
“……앞으로는 안 꾸밀 거예요.”
아서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냐. 꾸며. 당신 하고 싶은 만큼 예쁘게 해.”
“…….”
“테일러 로렌슨을 만날 때. 예쁘게 하고 만나.”
“…….”
레이나는 눈을 떴다.
아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신 나랑 있을 때도. 당신이 원하는 만큼 예쁘게 꾸며 줘.”
“…….”
촛불이 고요하게 탄다.
“주제 넘는다는 생각 안 했으면 좋겠소.”
왠지 목이 탔다.
레이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빗겨 내려 타는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새 드레스 맞출까? 당신 걸로. 곧 겨울이 오잖아.”
타닥. 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고요했다.
벽난로 안에서 불티가 조용히 날린다.
레이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럴까요.”
가는 빗방울이 창을 흔들었다.
아서가 물었다.
“귀는 괜찮소?”
레이나는 잠긴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작게 답했다.
“네.”
그의 손길이 귓가에 닿는다.
“귀걸이는 할 건가? 아니면 아물게 둘 거요?”
“할래요.”
그 정도 흔적은 남겨둘까 봐요.
당신 앞에서도 꾸며 보려면.
레이나는 미소 띤 얼굴로 벽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서 경.
응.
쓸데없는 해명일 수도 있는데요.
응.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케이 경께서 잘못 알고 계시길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테일러는 제 연인이 아니에요.
아서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며 말했다.
“……응. 들었어.”
아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소.”
“…….”
레이나가 잠시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네……. 혹시 그러신가 했어요. 케이 경도 잘못 알고 계시더라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서가 말했다.
“당신 가족의 안위를 알고 싶다는 뜻인 줄 몰랐어.”
그리고 살짝 미안한 듯 웃는다.
“나는 가족이 없어서. 생각 못 했소.”
담담하게 사과하고 있지만.
그는 조금 굳은 입매로 머쓱한 듯한 미소를 그렸다.
“할머니는 언제든 만나게 해 줄게. 아니……. 그것도 이미 케이가 다 말했군.”
케이. 일 잘해.
아서는 그저 그렇게 중얼거렸다.
“…….”
“…….”
짧은 정적 후, 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당신 가족을 쥐고 협박하는 걸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군. 못 만나게 하고 싶다고 하고, 그런 식으로 말했으니.”
“…….”
레이나는 자신이 그렇게 느꼈는지를 곱씹어 보는 것 같았다.
“……모르겠어요. 그땐 저도 정신이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
그가 웃는다.
“……저야말로, 더 빨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런 해명도 뭔가…… 주제넘게 느껴져서.”
“…….”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아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준 혼인계약서, 봤소?”
“…….”
아서가 오랜 옛날을 회상하듯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내 운명은 그 전쟁에 달려 있었어.”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계약서에는 내가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황실은 날 황실 가족으로 인정하고 공작위를 준다고 되어 있어. ‘줄리어스’의 이름을 드높일 정도로 현저한 공을 세운다면 ‘가주’와 대등한 가문 내 공동 지배권자로 인정해주고, 황실이 그걸 보증한다고도 적혀 있고. 명예롭게 전사한다면 황실의 아들로 황실 무덤에 묻힐 거라고도 적혀 있었소.”
“…….”
“대신 내가 공을 세우지 못하거나 명예롭지 못하게 전사할 경우, 혼인 사실은 없었던 일로. 황실은 나에 대해 침묵할 거고, 줄리어스의 지참금은 비밀리에 전액 반환 조건이 걸려 있었소.”
“…….”
“많은 게 내 칼끝에 달려 있었지.”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바람 소리 같았고,
마른 장작이 타는 소리 같았다.
“…….”
아서가 미소 지은 채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라이언 달튼처럼 사는 삶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가 나한텐 꽤 오랫동안 위로가 됐었어.”
“…….”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점점 자주 생각이 나더라고.”
어쩌다 한 번씩.
점점 자주.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꽤 자주.
힘든 전투가 있었을 때는 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
라이언 달튼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저 그 말이 생각났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는 게.
“…….”
아서는 담담하게 웃었다.
“로아스 자작가는 날 길러 준 가문이고, 그분들이 없었으면 지금의 난 없었겠지만. 내게 가족으로서의 정을 느끼게 해 주진 못했어.”
“…….”
“로아스는 항상 내가 내 명예와 권리와 신분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소.”
“…….”
“물론 고마운 말이야. 날 위한 말이었지.”
아서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한테 살기 위해 다 버리고 달아나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
“…….”
그래서,
아서가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당신 말을 곱씹게 됐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