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하지 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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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하지 못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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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하지 못한 말
2022.04.17.
보고서를 전한 후, 케이는 아서에게 할 말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케이는 냉정하게 진실을 말할 예정이었다.
진실이 때론 가장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테일러 로렌슨은 그분의 연인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밤에 면담하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서의 반응을 지켜본 뒤 말할 예정이었다.
「……각하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셨을 때, 사실 좀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나신 것 같아서요.」
「제가 눈치 없었습니까?」
그리고 차분하게 말할 예정이었다.
「레이디의 사정은 보고서에 적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보신대로 그녀가 요구한 건 단 하나. 할머님을 위해 테일러 로렌슨을 아서 경의 편으로 설득해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럼 아서 경을 위해 뭐든 다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테일러 로렌슨을 요구해도 그건 연인이라서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약간의 비꼼으로 여겨져도 상관없었다.
케이의 목적은 그의 머리를 차갑게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
보고서에는 그녀가 할머니의 건강 외엔 다른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저 할머니와 살고 싶어 할 뿐, 평범한 결혼이나 스스로 만들 가족에 대한 꿈도 접은 상태더라는 것이 적혀 있었다.
본인이 결혼은 못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더라는 말도.
조마조마하고, 팍팍하고, 꿈도 미래도 없이 건조한 삶이었다.
나이가 칠십이 넘은 할머니와 영영 살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녀에게는 그 후의 계획이 없었다.
「테일러 로렌슨을 만나 떠봤는데, 끌어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쪽에도 협조적이고, 눈치도 머리도 제법 좋은 사람인 것 같고. 의사로서 유능하며, 줄리어스 후작에게 맹목적인 상황도 아니더군요. 레이디에게 진심인 걸 보니 이해관계도 맞을 것 같았습니다.」
「레이디도 그에게는 할머님을 믿고 맡길 수 있다 여기고 있었고, 그럴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테일러와의 면담 내용과,
그보다 앞서 그가 레이나를 위해 기사들 앞에서 시도했던 일과,
테일러가 그동안 그녀의 할머니를 위해 적은 일지와,
그걸 보고 감격한 레이나의 반응도 적혀 있었다.
그가 후작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는 근거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이나가 그와 이루어진다면 꽤나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이 그녀에게 최선이라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그 후, 케이는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각하께서 원치 않으시면 쳐내겠습니다.」
“…….”
「의사는 다른 사람을 구해 준다고 하면 되는 일이고」
「할머님을 계속 곁에서 지켜보게 해 준다고 하면 받아들일 겁니다.」
「그렇게 할까요?」
그렇게 하실 겁니까?
연인도 아니니.
그렇게 해도 되는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가지셔도 됩니다.
연인도 아니니까.
솔직히, 싹을 잘라 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 여자를 정부로 들이시겠습니까?」
“…….”
「테일러 로렌슨을 설득해 달라는 부탁은 거절할까요?」
“…….”
케이는 아서가 못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여태까지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그녀를 지켜 주고 있었던 아서라면.
절대로.
손 뻗지 못할 것이라고.
* * *
“…….”
하지만 아서가 눈이 멀었다는 걸 알게 된 뒤.
케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스스로의 냉정함을 과대평가한 거였을까.
그저 갑작스레 알게 된 그의 실명이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던 걸까.
아니면, ‘제출한 보고서를 그가 읽는 사이 내가 그저 무미건조하게 말하면 되는 것’으로 상상했던 일과
‘자신이 쓴 보고서를 자신의 입으로 읽어 주며,
귀 기울여 천천히 그걸 듣는 아서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나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 사이의 간극이 생각보다 컸던 탓이었을까.
“…….”
케이는 그것을 모두 읽은 뒤,
보고서를 책상 위에 도로 내려놓고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
‘레이나’에게 처음부터 연인이 없었다는 걸 깨달은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가만히.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천천히 책상에 팔을 괴고 마른세수를 했다.
“…….”
아서의 표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서는 알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그래서 케이는 단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레이디를 만나 보시겠습니까.”
* * *
레이나는 잠들어 있었다.
어제는 밤새 아서를 기다리다 아주 조금밖에 잠들지 못했고,
케이가 레이나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여 준 것으로 오랜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었다.
열린 창으로 발그스름하게 물든 저녁 햇살과 함께 바람이 들어왔다.
서늘하고, 따사로웠다.
케이는 밖으로 나갔고.
아서는 그녀의 곁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
석양이 그녀의 잠든 얼굴을 비추었다.
* * *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신 겁니까?
네.
……레이나는 어떻게 될 예정입니까?
조급한 질문이 나왔다.
단서를 줄 수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있으니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아서 경께선 자기 아내라고 만지지 말라고 하시던데.
그럼 그건 무슨 뜻입니까?
아서 경께선 레이나를 정부로 삼으실 생각이신 겁니까?
외람되지만, 줄리어스 일가의 데릴사위이신데요?
케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서 경의 의향은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젠 아닌 거 같습니다.
분명한 건 아서 경은 언젠가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고.
아서 경은 레이디를 무사히 돌려보내 드릴 예정이시라는 겁니다.
저는 거기 차질이 생길까 신경을 조금 쓰는 거고요.
……돌려보내…… 준다고요?
네.
지금은 저희의 필요성에 의해 잠시 그분을 빌리고 있고, 정중히 대해 드리고 있습니다.
뭐, 그렇게 안 보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모든 일이 잘 해결된다면 충분한 보상을 해 드리고 희망대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어디로?
할머님 곁이겠죠.
그분의 희망을 반영할 테니까요.
추가로 전 그게 당신 곁인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고요.
…….
당신이라는 가능성이 있는 걸 보면 좀 언짢아하긴 하시겠지만.
레이디에게 있을 수 있는 좋은 미래를 빼앗으려 들지는 못하실 겁니다.
그 정도의 파렴치한은 못 되십니다.
“…….”
그동안 레이나는 ……아서 경의 부인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어디까지…… 대신하는 겁니까?
그것도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다만 아서 경이 도를 넘는 파렴치한은 아니라는 것까지는 말해 두고 싶습니다.
그분의 명예와 앞날에 해가 될 일을 하실 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는 게 저의 일이라는 점에서, 좋지 않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전 대비를 해야 하고,
그것이 제가 지금 당신을 만나고 있는 이유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 같은데.
……협상하고 싶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저한테 뭘 시키고 싶은 겁니까?
레이나와 애틋한 연인 행세라도 하라는 뜻입니까?
케이는 낮게 웃었다.
아뇨. 레이디가 거짓 연기에 소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시던데요.
“…….”
저는 각하에게 전부 사실대로 말할 겁니다.
당신은 그냥 있는 그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당신이 좋은 남자로 보인다면
그분은 결국 물러날 겁니다.
그리고 좀 더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뭘 바라는 건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제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뭡니까?
축의금 많이 하겠습니다.
쿨럭.
“……네?”
전 레이나랑 결혼하겠다는 얘긴 한 적이 없는데요.
저흰 친구입니다.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데 언젠간 결혼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제가 레이나를 여자로 좋아한다고 언제…….
숨겨지지 않던데요.
케이는 웃지도 않고 툭 말했다.
아서 경만큼이나.
“…….”
그리고 당신, 레이디 때문에 여기에 남아 있는 거 아닙니까?
스카우트 제의를 상당히 많이 받았던데요.
거절했다는 게 의외일 정도로 매력적인 곳도 몇 있었고.
제국 수도에 있는…….
……잠깐만요.
절 뒷조사했습니까?
새삼스럽네요. 당신이 제 입장이었어도 했을 것 같은데? 딱히 뒷조사는 아니고 앞조사했습니다.
아무튼, 말없이 줄리어스 저택에 계속 남아 있는 건 레이디 때문 아닙니까?
“…….”
축의 하겠습니다. 많이 하겠습니다.
두 분이 같이 지내실 수 있는 저택 사 드리죠.
네? 저택이요?
아서 경 돈으로요?
아뇨. 물론 제 돈으로.
놀랍게도 저도 사비가 있답니다.
당신 사비로 저택을 사주겠다고요?
왜요?
“그냥요.”
케이는 뻔뻔하게 말했다.
“제 맘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