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 각자의 바람 (65/210)


#65. 각자의 바람
2022.04.14.


레이나는 케이로부터 할머니의 진료 일지를 돌려받았다.

두 손으로 소중히 받아드는 레이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16549669829004.png

“고맙습니다.”

케이가 미소 지었다.

16549669829051.jpg

“아닙니다.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척 보고 싶으셨을 텐데.”

케이가 빙그레 웃으며 은근슬쩍 아서의 ‘검수’ 명령이 풍기던 차가운 분위기를 부드럽게 윤색했다.

그리고 레이나의 앞 테이블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16549669829051.jpg

“각하 때문에 놀라지는 않으셨습니까? 테일러 로렌슨 앞에서 저희와 가까워 보이지 않는 편이 좋긴 할 거라곤 생각했습니다만. 그걸 고려해도 각하께서 좀 거칠게 들어오시긴 한 것 같아서.”

16549669829004.png

“아…….”

레이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16549669829004.png

“그럼요. 괜찮아요. 놀라지 않았어요.”

놀라긴 했지만, 덜컥 겁먹었냐는 의미의 그런 놀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테일러한테는 그 의도가 무척 진심으로 먹혀든 것 같았다.

원한다면 오늘 기절하게 해 주겠다던 테일러를 떠올린 레이나는 고맙고도 미안한 죄책감을 느꼈다.

레이나는 물끄러미 테일러의 진료 일지를 내려다보았다.

【 도움 필요해? 】

【 내가 내일도 올게. 】

레이나는 진료 일지를 만지작거렸다.

16549669829004.png

“…….”

나한테 그렇게 말해 주는 거,

테일러에게도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텐데.

정말 고마웠고, 그 정도로 걱정하게 한 것이 미안했다.

테일러를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16549669829004.png

“케이 경.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진료 일지를 보는 순간, 레이나의 마음속에선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테일러가 필요했다.

테일러라면 할머니를 믿고 맡길 수 있어.

16549669829051.jpg

“네, 레이디.”

케이가 빙긋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후우.

레이나는 심호흡했다.

오 년의 세월 동안 후작가가 한결같이 할머니에게 간병인을 보내주고 돌보아 주었기에,

레이나는 경험적으로 후작 부인이 하는 약속을 신뢰하고 있었다.

인정이 넘치는 분은 아니어도,

마님은 자신이 한 말은 지켜 주는 분이라는 것만은 믿었으니까.

그것이 레이나가 후작 부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이유였다.

하지만 테일러의 ‘너희 할머니 맞아?’라는 질문과 그녀를 위해 준비해 준 진료 일지는 레이나에게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그녀로 하여금 어떤 확신 어린 결론을 내리게 해 주었다.

내가 더 이상 후작 부인을 신뢰하지 않는구나.

레이나는 진료 일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16549669829004.png

“…….”

돈은 없어도 된다.

난 젊으니까.

추천장은 못 받게 되겠지만.

하녀 일을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될 거야.

어디든 다른 일이라도 시작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서 경이라면 할머니를 보호해 줄 거야.

그분은 소중한 사람을 소중히 대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레이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을 각오를 하고 케이를 향해 미소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아서 경과 케이 경이 좋은 사람이어도, 날 언제까지고 책임져 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하면, 이분들이 그거까진 들어줄 것이다.

레이나는 그 이후로는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레이나는 일지를 무릎 위에 놓고 누른 채, 맞은편에 앉은 케이를 바라보았다.

* * *

1654966982909.jpg

 
레이나는 ‘테일러를 만난 후’로 미루어 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무척 별거 없게 느껴졌다.

별다른 사연이랄 것도 없는, 흔해 빠진 이야기였으니까.

후작 부인이 레이나에게 ‘테일러로 하여금 그녀의 아픈 할머니를 돌보아 주도록 하는 것’을 첩자 일의 조건으로 걸었으며,

그것이 레이나에게는 간절하고.

그걸 아서 경이 해 줄 수만 있다면 레이나는 아서 경의 편에서 무엇이든 돕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레이나는, 테일러가 ‘후작 부인’이 아닌 ‘아서 경’의 편에서 지금까지 했던 일을 계속하도록 그를 설득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후작 부인이 설령 내가 돌아선 걸 알고 다른 명령을 내리더라도,

테일러가 지금처럼 계속 할머니를 돌봐 줄 수 있게 해 줄 수 있냐고.

그 말을 들은 케이는, 아서와 상의하겠다는 말조차 없이 즉시 승낙했다.

레이나가 더 놀랄 만한 다른 말과 함께…….

16549669829051.jpg

“아. 그거라면 이미 테일러 로렌슨 씨와 대화하고 온 참입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16549669829051.jpg

“이미 할머님 계신 곳 확보해서 사람 보냈습니다.”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케이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16549669829051.jpg

“일단 괜히 놀라게 해 드리지 말고 경호 인력만 충분히 배치하라고 했습니다.”

16549669829051.jpg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만나 보시는 게 가장 안심되실 것 같아서…….”

16549669829051.jpg

“한 번 모셔 와서 레이디께서 직접 만나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 후에 상의해서 거처부터 바꾸시죠.”

16549669829051.jpg

“후작 부인이 알 수 없는 곳으로요.”

레이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놀라서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16549669829051.jpg

“레이디, 그리고 그런 건 ‘조건’이 아니라 ‘기본 전제’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16549669829051.jpg

“안 그래도 지난밤 면담에서 말씀하셨을 때부터 당연히 제일 먼저 할머님 안전부터 확보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케이가 미소와 함께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으며 말을 이었다.

16549669829051.jpg

“협상 조건은 다른 것으로 말씀해 보세요. 저희도 양심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당연한 걸 조건으로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그는 학생에게 시험 문제의 답을 살짝 찔러 주는 선생님처럼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16549669829051.jpg

“더 좋은 거 해 달라고 하세요. 고급 저택 한 채 해 달라, 농장 하나 해 달라. 사용인 몇 명쯤 포함해서 장원이라도 하나 갖게 해 달라. 이런 거 말씀하셔도 됩니다.”

레이나는 웃어 버렸다.

케이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16549669829051.jpg

“충분히 해 주실 겁니다.”

케이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69829051.jpg

“지금은 각하께 상당히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난 오 년의 고생과 성과를 인정받고 보상을 받는 시기이고. 그럼에도 데릴사위라는 게 그렇게 안정적인 자리는 아니다 보니, 각하의 입장은 상당히 미묘해서요. 황실도 믿고 있기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각하께 약점이 될 만한 요소는 없어야 하거든요.”

케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16549669829051.jpg

“아서 경께선 온당한 평가와 보상을 받으셔야 합니다. 경께서 온당한 보상을 받으시는 건 각하만의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요. 줄리어스의 징집병들도, 기사들도 모두 아서 경께 달린 목숨들이니까요. 웬만하면 줄리어스에서 가주로서의 힘과 영향력을 온전히 얻으셨으면 좋겠고, 군이 해산된 후에도 각하께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모두 그걸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레이나는 사뭇 이해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케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16549669829051.jpg

“그런 면에서 레이디는 각하께 상당히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줄리어스가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만, 모든 협상마다 레이디께서 후작 쪽의 약점으로 계셔 주시니 덕분에 저희의 협상이 상당히 수월한 상황입니다.”

케이는 레이나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16549669829051.jpg

“아서 경을 위해 주시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무의식에 ‘당신이 아서의 약점이 되어선 안 된다’는 암시를 전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에도,

그 모든 말은 진심이기도 했다.

전부 진실만이 담긴 말들이었다.

16549669829051.jpg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서 경을 위해서도.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각하께서 실수하지 않도록,

각하와 당신 자신을 잘 지켜 주길.

케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16549669829004.png

“네.”

 

* * *

케이는 아서가 일주일 안에 검토해야 하는 서류들의 목록을 읊어주었다.

【 상이군인의 규정 범위 : <상이군인 등급 제도> 】

【 상이군인 보상 제고 논의 】

【 유족 연금과 참전 용사 배상금 지급 내역 】

【 줄리어스 후작이 반려한 배상 목록 】

【 현재 유족의 인정 범위와 참전 용사 인정 범위의 문제점 】

【 기타 배상 누락자들의 탄원서 】

【 혼인계약서의 법적 자문 】

그리고 그는 가져온 한 무더기의 서류들을 아서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중요성과 시급성이 높은 것들을 골라 맨 위에 다시 놓아주며 한 번씩 더 그 서류들이 급한 이유를 일러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앞에는 케이가 작성해 온 ‘레이디의 면담 내용’에 대한 보고서가 놓였다.

1654966986948.png

“…….”

아내와 면담한 일은 따로 보고 부탁한다고 리오넬에게 전한 명령에 의해 그가 만들어 온 것이었다.

아서는 물끄러미 서류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16549669829051.jpg

“…….”

갑자기 밀어닥친 서류가 좀 많긴 했지만.

케이는 평소보다 피로해 보이는 아서의 반응이 좀 의아하다 정도로만 여기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1654966986948.png

“……케이. 미안한데 앞으로는 구두로 보고받을게.”

16549669829051.jpg

“네?”

1654966986948.png

“사실 내가 시력에 문제가 좀 생겨서.”

16549669829051.jpg

“네? 그게 무슨…….”

1654966986948.png

“종이로 보고하면 못 읽는다고.”

16549669829051.jpg

“……네?”

케이는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세 번 연속으로 ‘네?’ 만 반복하는 얼빠진 대답을 한 적이 없었다.

케이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하는 표정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54966986948.png

“공연한 고생을 시켰네. 좀 더 빨리 말할걸.”

16549669829051.jpg

“…….”

아서가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산뜻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1654966986948.png

“시력을 잃었어.”

16549669829051.jpg

“…….”

케이의 입이 벌어졌다.

16549669887555.png

 
아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1654966986948.png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 카일 황태자랑 트리스탄만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아서는 조금 머쓱하게 웃으며 케이가 작성한 보고서를 그의 앞으로 도로 밀었다.

1654966986948.png

“……읽어 줄래?”

 

* * *

상이군인 등급으로 치자면 1급 양안실명이라더군.

빛조차 안 보이는 건 아니니 실명까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뭐…… ‘등급’으로 치자면 실명이라고 하네.

빛이 있는 방향 정도는 구별할 수 있어.

그저 선명하지 않아서.

지금 자네 표정은 안 보여.

이런 글씨도.

진짜 눈먼 사람 걱정하듯 걱정할 필요는 없어.

짐작하고 있겠지만 다른 감각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그런 공간적인 형상은 온전히 느낄 수 있으니까.

덕분에 일상생활엔 전혀 문제없고.

봐. 자네도 여태 눈치 못 챘잖아?

흠. 얼이 빠졌다는 건 보이는군.

입 벌리고 있다는 것도.

자네가 그런 표정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그렇게 말하며, 아서는 웃었다.

담담한 모습이었다.

다들 생각보다 눈치가 없더라고.

카일 빼곤 아무도 모르던데?

걱정 마.

문제없어.

음. 서류는 좀 큰일 났는지도…….

자네랑 트리스탄이 큰일이지, 난 괜찮지만.

아서가 웃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