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숨길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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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숨길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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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숨길 수 없는
2022.04.10.
아서는 당황해 꿇어앉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밖에 있겠다고 해 놓고 사라져서.
내가 밤새 돌아오지 않아서…….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있었다는 거야?
아서는 당황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코를 들이켰다.
확신이 없었음에도, 아서는 레이나의 손을 겹쳐 잡으며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미안해.”
“…….”
아서는 당황스러워하는 낯으로 이마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당신이 그런 생각을 했을 줄 몰랐어.”
테일러가 올 예정이었으니까.
들떠 있을 줄 알았지.
그런 일로 불안해했을 거라곤…….
하지만 테일러 따위는 순식간에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나 때문에 울고 있는데 그딴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서는 보기 드물게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 손은 계속 레이나의 포개진 손등을 겹쳐 잡고 놓지 않은 채로.
“어제 갑자기 자리 비워서 미안해. 말없이 외박한 것도. 내가 어제 그렇게 급하게 자리 비운 건…….”
아서는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레이나에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딜런이라는 친구가 있어. 나한테는 소중한 부관이고 전우인데……. 상이군인이거든.”
조금 당황한 나머지, 말한다고 그녀가 알 리 없는 사람의 이름부터 늘어놓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름에 레이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놀란 이유가 상이군인이라는 말 때문이라고 생각한 아서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제 당신 면담 중에 그 친구가 음독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어. 우리 모두한테 충격적인 소식이었고…….”
“!”
레이나가 깜짝 놀라 입을 가렸다.
아서는 차분히 그녀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 설명하지 못하고 가서 미안해. 나한텐 트리스탄만큼이나 소중한 부관이라…….”
그리고 아서는 그가 얼마나 소중한 동료인지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 망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서의 짐작과 달리 레이나는 그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딜런 오스본 경이요?”
레이나는 놀라서 물었다.
“음독하셨다구요?”
아서와 관련된 기사는 전부 읽었고, 전부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이나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승전하여 돌아온 그들에게, 그 ‘딜런 오스본’이 음독했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떡해……. 어떡해요. 무사하세요?”
레이나는 제가 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딜런 오스본.
오랫동안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잊혀진 사람이었지만.
레이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모진 고문과 동료들을 위한 희생.
그에게 남은 끔찍한 고문 후유증.
그리고 그가 병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도.
레이나의 눈이 당혹과 죄책감으로 물들었다.
말없이 사라진 아서를 한순간이나마 철없이 원망했다는 게 너무 미안했다.
그는 당연히 가야 했다.
그리고 이번엔 아서의 눈이 커졌다.
“당신이…… 딜런을 어떻게 알아?”
레이나는 어떻게 그분을 모르냐는 듯 눈이 동그래진 채 말했다.
“붉은 협곡 전투에서 72명을 구하신 영웅이시잖아요. 비록 패한 전투였지만…….”
아서는 조금 놀라서 레이나를 마주 보았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것도 저렇게 정확하게…….
조금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짧은 침묵 후에, 아서는 어색한 듯이 얼굴을 만졌다.
“……줄리어스에 그 얘기가 다 전해졌어? 좋은 얘기도 아니었고, 워낙 보급도 안 오고 해서 ‘바깥’에서는 관심 가지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레이나는 한발 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딱 숨을 멈추었다.
전사자가 많았던 전투인지라 신문에 실리긴 했지만, 그 얘긴 줄리어스에 떠들썩하게 전해진 이야기도, 유명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아서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던 시절,
패전했음에도 치열하고 비장하게 싸운 기사들의 활약이 그녀에게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얘기였을 뿐…….
아서가 어깨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군대 용어가 입에 붙었군. ‘바깥’은 전쟁터랑 부대 외의 본국 영지를 말하는 군대 은어야.”
“…….”
그는 그것만 가지곤 레이나의 남다른 취미생활에 대해 유추해내지 못했다.
그래도 묻기는 했다.
“꽤 옛날이야기고 내가 관심받던 시기도 아니라 아는 사람 없을 줄 알았는데. ……용케 기억하고 있네?”
레이나는 순간 얼어버렸다.
그를 두고 했던 열정의 스크랩 스토킹을 들킬 것만 같았다.
레이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서가 머쓱한 듯 눈썹을 살짝 긁었다.
“……저택에서 들었어? 아니면 소식지로?”
당황한 레이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딸꾹.
“!”
급기야 딸꾹질을 시작했다.
레이나는 당황해 입을 가렸다.
얼떨떨한 낯을 하는 아서와 눈이 마주쳤다.
“…….”
딸꾹.
딸꾹.
연이어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레이나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입을 틀어막았다.
“……!”
딸꾹.
하지만 한번 시작된 딸꾹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레이나는 창피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가슴을 꾹꾹 눌렀다.
딸꾹.
“…….”
레이나는 터질 듯이 새빨개져서 당황한 얼굴로 주먹을 쥐어 가슴을 두드렸다.
창피해하는 레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서가 주의를 환기하듯 차분하게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
“숨 깊게 쉬어 봐.”
“…….”
딸꾹.
레이나가 빨개진 얼굴로 그를 마주 보면서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다음 순간, 아서가 그녀의 뒷목에 손을 넣어 당기며 살짝 이마를 마주 댔다.
“!”
레이나는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아서와 이마가 맞닿으며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섞였다.
아서가 회색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가만히. 숨 참아.”
“…….”
레이나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러고 있으면 멈출 거야.”
쿵.
쿵.
쿵…….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 * *
“…….”
“…….”
침실 밖으로 밀려난 케이와 리오넬은 아무 말 없이 문밖에 기대어 섰다.
둘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
―내 아내야. 만지지 마. 허락한 건 대화까지다.
긴 정적 끝에, 리오넬이 먼저 침묵을 깼다.
“……케이 경께서 전에 말씀하셨던 거……. 정말 고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가만히 덧붙였다.
“‘최악의 경우’라고 말씀하셨던 거 말입니다.”
케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리오넬이 짧게 망설이다 이마를 만지며 다시 자기 발끝을 보고 입을 열었다.
“……확인차 여쭤보는 건데요.”
“…….”
케이와 리오넬의 눈이 마주쳤다.
“……‘정부로 공인’이 최악인 거 맞나요?”
그보다 심각한 경우를 염두에 둬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미였다.
“…….”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리오넬 경. 사람들 시켜서 일 하나만 해 주십시오.”
“네.”
“아서 경의 서재에 여분 침대가 하나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
예상 범위를 벗어난 갑작스러운 말에 리오넬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침대요?”
케이가 끄덕였다.
“네. 그거 좀 서재에서 빼서 두 분 신방에 넣어 주십시오.”
“……? 신방에…… 여분 침대를요?”
케이가 무표정하게 낯을 정리하고 말했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제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짧은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일단 그거라도 넣어드려 주세요. 지금은 말고 내일 이후에, 상황 봐서요.”
그리고 케이는 옆에 끼고 있던 문서를 묵묵히 손에 들었다.
아서가 검수를 명령한, 테일러의 진료 일지였다.
“……전 일단 이 명령 해결하겠습니다.”
* * *
똑똑.
누군가 테일러의 방 문을 두드렸다.
문에 기대 주저앉아 있던 테일러는 황급히 감정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네!”
문을 열자,
아까 레이나를 지키던 기사들 중 한 사람이 찾아와 있었다.
더티블론드와 은발 중, 잿빛 은발에 모노클을 쓰고 있던 쪽이었다.
“…….”
케이가 예의를 차린 태도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실례합니다, 테일러 로렌슨 씨.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
테일러의 시선이 자신이 내민 손으로 향한 사이, 케이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테일러의 모습을 짧게 훑었다.
테일러는 좀 얼떨떨하게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테일러면 됩니다. 경께서는…….”
“케이 포드입니다. 케이면 됩니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케이의 태도는 정중했다.
“…….”
레이나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테일러도 케이를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했다.
“아닙니다. 케이 경. 저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케이는 손에 든 테일러의 진료 일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용무를 알리는 것이었다.
“…….”
테일러는 아서가 그에게 진료 일지를 ‘검수하라’ 명령했던 것을 떠올렸다.
“잠시 말씀 나눌 수 있을까요?”
테일러가 그가 들고 있는 진료 일지를 바라보았다.
“…….”
테일러는 문을 더 넓게 열고 물러섰다.
“……들어오시겠습니까?”
“그래도 된다면요. 감사합니다.”
케이가 싱긋 웃었다.
* * *
줄리어스 저택에서 테일러가 머무는 방은 두 개의 침실과 응접실, 거실, 약재실과 조제실, 서재 겸 집무실, 욕실, 식당이 딸려 있는 공간이었다.
테일러 로렌슨과 앨빈 로렌슨.
두 사람의 의사가 머무는 곳으로, 일개 고용인의 방과는 다른 특별한 독립 공간이었다.
테일러는 케이를 방 안의 응접실 테이블로 안내했다.
케이가 자리에 앉았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케이가 빙긋 웃으며 테이블 위에 그의 진료 일지를 올려놓았다.
“이걸 봐야 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군요.”
“…….”
알았다는 듯 가볍게 끄덕인 테일러도 자리에 앉았다.
테일러는 가만히 손을 깍지 끼고 케이를 바라보았다.
“……살펴보셨습니까?”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건 진짜 진료 일지였다.
레이나를 향한 수상한 메시지 같은 건 남겨두지 않았다.
어차피 검수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 당연히 짐작했고,
그저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길 바랐을 뿐이었으니까.
케이는 미소 띤 얼굴로 시선을 내린 채 펜을 꺼냈다.
“네. 간단히 훑어봤습니다.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진료 일지더군요.”
그리고 펜을 쥔 손을 종이 위에 내렸다.
“잘 봤습니다.”
【 인상적이었습니다. 】
테일러는 숨을 멈추었다.
케이가 종이에 필담을 시작했다.
입으로 나오는 말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긴장하지 마세요.”
【 레이나 아스타린을 소중하게 생각하죠. 】
“딱히 수상한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만,”
【 하지만 그분의 연인은 아니고요. 】
“정식으로 검수하기 전에 몇 가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 그녀를 돕고 싶고. 맞습니까? 】
잉크가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케이가 쓰고 있는 건 알코올이 담겨 있는 펜이었다.
테일러가 아까 레이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테일러가 주먹을 틀어쥐었다.
들켰구나.
어떻게?
보이지 않는 각도였는데…….
“…….”
그런데 지금 이 사람 나한테 뭐 하는 거지?
케이가 테일러의 일지 위에서 손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환자분 어디 있습니까?”
테일러는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긴장시켰다.
레이나를 뒷조사하고 있나?
곧바로 덜컥 두려운 의심이 엄습했다.
할머니, 무사하신가?
“…….”
테일러가 고요히 시선을 들어 올려 케이를 노려보았다.
“……물으시는 이유를 먼저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케이는 그를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펜으로 톡톡. 일지를 찍어 보였다.
그가 가리킨 종이로 시선을 내리자 케이가 알코올로 쓴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 저는 아서 경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
【 우리가 서로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 함께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
테일러의 눈이 커졌다.
“그 환자분. 저희가 보호하려고 하는데요.”
【 듣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입 밖으로 내지 마세요. 】
테일러가 눈을 들어 올려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가 말을 이었다.
동시에 담담하게 그를 보며 글씨를 썼다.
“후작가와 별개로요.”
【 당신과 협상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