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날 기다렸어?
(63/210)
63. 날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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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날 기다렸어?
2022.04.07.
“무슨 짓이야.”
방에 들어온 아서가 순식간에 걸어와서 테일러를 밀쳤다.
그리고 그녀를 등 뒤에 둔 채 그를 노려보았다.
“만지지 마. 내 아내야. 허락한 건 대화까지다.”
* * *
테일러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 남자가…….
아서 줄리어스.
전쟁 영웅이란 이런 건가?
치열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남자의 살기는 압도적이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회색 눈이 공기를 틀어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명백히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그의 뒤에서 멍하니 아서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테일러는 레이나가 혹시라도 해를 입을까 봐 순간적으로 앞으로 나서며 빠르게 말했다.
“테일러 로렌슨입니다. 줄리어스 일가에 고용된 의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서 경.”
독점욕 있는 타입이라면, 이런 일에서 여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테일러는 그의 주의를 온전히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귀걸이에 다치신 듯해서 제가 소독해 드리던 참입니다. 실례였다면 사과드립니다.”
“…….”
아서는 대답 없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시선이 찌르는 듯했다. 싸늘한 미소였다.
“나가.”
가차 없었다.
순간 테일러의 눈에 레이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
레이나가 멍하니 테일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서가 몸을 움직여 테일러의 시선을 즉시 차단했다.
“어딜 봐.”
테일러는 즉시 고개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바라본 건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다는 듯이, 소독약을 적신 거즈와 핀셋을 그가 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트레이 위에 올려 두었다.
달칵.
그리고 레이나와 앉아 있던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이건 두고 가겠습니다.”
할머니의 진료 일지였다.
아서가 차갑게 말했다.
“케이. 검수해.”
기사 중 하나가 답했다.
“네.”
“…….”
일어선 테일러가 가방에 드레싱 도구들을 수습하려는 순간, 아서가 말했다.
“그것도 두고 가.”
트레이에 올려 둔 핀셋을 정리하려던 테일러의 손이 멈추었다.
“내가 해 줄 테니.”
아주 조금이지만, 레이나에게 화풀이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가능성이 마음속에서 올라갔다.
대신 서늘하게 피가 식으며 가슴이 죄어들었다.
테일러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단정하게 대답했다.
“네.”
테일러는 아예 트레이에 깨끗한 새 거즈와 소독약을 꺼내 주고, 자신이 사용했던 것은 흔적도 없이 치운 뒤 몸을 물렸다.
그가 부디, 불쾌해하지 않길 바라며.
자신이 레이나를 힘들게 한 게 아니었길 바라며.
* * *
오랜만에 저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테일러는, 그녀에게 ‘검붉은 물’을 처방해 주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누르듯 입을 막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
검붉은 물이 절실하여 그를 찾아왔던 하녀들과, 아가씨들과, 부인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약의 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혹은 유산으로 인해 고통받은 여자들도.
그중에는 지금 살아있지 않은 사람도, 아직까지 후유증에 고통받는 사람도 몇 명이나 있었다…….
“…….”
내 손으로 너한테 그런 위험한 약을 먹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 약을 먹지 않으면 더 큰 위험에 처하는 상황인 거지?
“…….”
레이나를 앞에 두고 서 있던 순간에는 감당할 수 있었던 충격이 뒤늦게 강렬하게 목을 죄었다.
너한테 오늘도 그런 일이 있을까?
“……윽…….”
뒤늦게 숨이 멎을 것 같았다.
테일러는 비로소 가슴을 움켜쥐며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며 애써 진정하려 노력했다.
참담함에 휩싸였다.
* * *
좋은 남자 같네?
아서는 비아냥대고 싶은 마음을 짓눌러 참았다.
이미 충분히 실수였다.
당신에게만 소인배라며 귀엽게 넘겨 봐 줄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지나쳤다.
여기서 더 큰 실수를 저지를 순 없었다.
부하들도 내가 부조리하게 화내고 있다는 걸 느꼈을 거였다.
테일러는 무조건 만나게 해 준다고 하라고.
테일러에게 돌아가는 게 아마도 그녀의 최종 목표일 것이니, 최대한 그녀의 희망을 반영해 준다고 하고 그와 관련해선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지 말라고.
케이에게는 그런 식으로 침착하게 지시해 놓고 정작 내가 하는 짓은 이 꼴이라니.
아서는 레이나에게 화내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치밀하게 홀로 삭였다.
보내 줘야 한다.
보내 줘야 한다…….
그녀는 죄가 없다.
그녀에게는 혼인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오 년 전에도 내게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했는데.
이름을 바꾸고 달아나라고 했는데.
왜 나는 그 말에 오히려 당신한테 반드시 돌아오고 싶었을까?
「보내기 싫었으면 안 보냈으면 됐잖아. 내 부인이라고, 여기서, 내 눈앞에서 이야기하라고. 말했으면 됐잖아. 왜 보냈어?」
「일부러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려고, 둘이 무슨 이야기 하는지 듣겠다고 보낸 거 아냐?」
오러가 테일러를 움켜쥐고 싶은 듯 넘실거렸다.
하지만 탐색해 봤자 그녀에게 어울리는 좋은 놈이라는 것만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나처럼 화가 치밀어 폭발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위해 억누르고 물러서서 숨을 삼키는.
아서는 싸늘하게 웃으며 오러를 거두어 테일러를 탐색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러를 쓰든 안 쓰든.
어느 쪽이든 엉망인 건 똑같다는 것만 확인하게 됐지만
자신이 엉망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 것만은 도움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아서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아내가 다쳤다. 지금은 그게 더 중요했다.
아서는 묵묵히 숨을 고른 뒤 트레이 위의 핀셋을 집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없이 레이나의 귀를 살펴보고, 상처를 드레싱 해 주기 시작했다.
“…….”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오갈 데 없는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
침묵하던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늦으셨네요.”
아서가 손을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말이 어딘지 이상했다.
“…….”
아서는 손을 멈추고 레이나의 기색을 살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왜 그렇게 말해?
꼭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다시 삐딱한 마음이 튀어나온다.
내가 더 늦게 오길 바랐으면 모를까 왜 그런 말을 하지.
아서는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드레싱을 마치고 레이나를 마주했다.
‘보는’ 것처럼 보이도록 버릇을 들인 대로,
눈으로 보는 듯이 먼저 그녀에게 시선을 향하며
아서는 레이나 쪽으로 오러를 열어 그녀의 형상과 체온을 느꼈다.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대로.
그 순간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이제 오셨어요.”
아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말은 꼭 늦은 그를 원망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다시 안 오시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목소리 끝이 푹 잦아든다.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아서의 손끝이 흠칫하고 오므라들었다.
뭐?
아서는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 올 줄 알았다고? 왜?
“…….”
아서는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레이나가, 왠지 저를 기다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몹시 애타게.
착각인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형상. 소리. 온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를 기다렸어?
테일러가 왔는데…… 나를?
왜?
“…….”
이상했다.
뭔가가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이 뜨거워져 있었다.
그는 그게 무슨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레이나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서의 머릿속이 멈추었다.
“……부인.”
아서가 당황하여 불렀지만 레이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힘겹게 울음만 삼켰다.
아서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그런 생각을…….”
얼빠진 말만 나왔다.
그러나 턱에 불쌍한 모양이 잡힌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했다.
“…….”
레이나는 솔직히.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심이 돼서 느낄 수 있는 수치감이기도 했다.
아서 경이 이제 나를 안 볼 생각이 아니었구나.
아직은 조금 더 옆에 있어도 돼.
역시 그가 다시는 오지 않을 셈이라는 건 내 착각이었다.
진짜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가 봐.
동시에 울컥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도 못 들어올 예정이었으면 말은 해 줄 수 있었잖아요.
쪽지라도 남겨둘 수 있었던 거 아니에요?
하지만 뻔뻔하게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용기는 없었다.
“…….”
레이나는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아서는 숨이 턱 막혔다.
“왜 말을 하다 말아.”
“…….”
아서는 급기야 그녀 앞에 두 무릎을 다 꿇어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감싸 자기 쪽으로 당기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누가 뭐라고 했어?”
레이나는 부끄러워서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팔을 움켜잡고 저를 들여다보는 아서는 그녀의 대답에 몹시 애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서가 당황한 낯으로 재촉했다.
“말해. 왜 내가 안 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
레이나가 한참 만에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이제 다 말했으니까…….”
목소리가 바보같이 울먹여서 레이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서는 그녀의 말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듯 눈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더욱 집중했다.
“말했으니까? 뭐.”
레이나가 수치스러워하면서 울음으로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필요 없어져서 절 다시 안 보시려는 줄 알았어요.”
목소리 끝은 잠겨 들어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서의 눈이 커졌다.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내가 당신을 안 본다고?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갔지만
레이나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녀는 그를 아주 어렵게 믿었다.
정말 어렵게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어제 처음으로 외박했다.
어제는 레이나가 처음으로 모든 걸 고백한 날이었다.
그는 그런 날 그녀를 말도 없이 혼자 두고 사라진 거였다.
케이가 면담하는 동안 밖에 있겠다고 약속해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