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재회2022.03.31.
“부족한 아들을 걱정해 달려와 주셔서 감사하오. 하지만 딜런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니오.”
“…….”
브랜든 오스본은 딱딱한 태도로 말했다.
“명예로운 기사분들께 모자란 아들이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오. 앞으로는 내가 아들을 더 신경 써 보살피도록 하겠소.”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있던 루칸이 결국 이를 악물고 한발 물러섰다.
“……딜런을 보고 가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딜런은 최근에야 줄리어스 영지에 귀환했다. 당연히 딜런의 상태에 대해선 브랜든 오스본보다 루칸과 트리스탄이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브랜든 오스본은 완강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딜런은 깨어나지 않았소.”
루칸이 다시 꾹 참으며 물었다.
“무슨 독을 먹은 건지라도 알려 주십시오.”
브랜든 오스본의 반응은 냉담했다.
“귀하께서는 의사는 아니신 걸로 아오만.”
그때 타다닷,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쾅!
“주인어른!”
하녀가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어 와 의사의 말을 전했다.
“도련님 깨어나셨어요!”
“!”
브랜든 오스본이 묵묵히 눈을 찌푸렸다. 깨어났지만 못 만나게 하는 거라고 당연하게 확신하고 브랜든 오스본을 경멸하고 있던 루칸이 얼떨떨한 얼굴이 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못 깨어나고 있었던 건가?
“…….”
그러나 브랜든 오스본은 역시 딜런이 깨어났다고 흔쾌히 보게 해 줄 생각은 아니었던 듯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트리스탄이 조용히 따라 일어나며 브랜든 오스본에게 말했다.
“……딜런 경이 깨어났다는군요.”
“…….”
루칸도 그를 바라보며 말을 보탰다.
“그럼 이제 만나게 해 주시겠습니까?”
“…….”
브랜든 오스본은 지팡이의 손잡이를 꾹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녀가 뛰쳐 들어와 딜런이 일어났단 소리를 전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아서가 침묵을 깼다.
“브랜든 경.”
브랜든 오스본이 지팡이를 틀어쥐고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담담하게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는 내 병사입니다.”
“!”
아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군인이셨으니, 내가 그를 만나는 데 귀하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
루칸과 트리스탄이 조용히 아서와 브랜든 오스본을 바라보았다. 이미 리오넬이 한 번 후작에게 알려 주었듯, 전쟁은 끝났으나 개선식이 아직이었기에 그들 군은 공식적으로 소집 해제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가 요양하는 것을 허락한 상태이긴 하지만, 아서가 말한 대로 총사령관이 자신 휘하의 병사를 보는 데에는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았다.
“…….”
군인과 기사로서의 명예 의식이 강한 브랜든 오스본은 아서의 말에 거역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서가 그의 앞에서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허락 감사합니다.”
“…….”
브랜든 오스본은 따라오지 않았다. 기사들은 하녀를 통해 딜런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 * * 딜런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기면서도 한편으로 수치스러워했다. 독을 마신 것은, 수면제인 줄 알고 실수했을 뿐이라고 갈라진 목소리로 변명했으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처음 음독했을 때도 그렇게 변명했기에. 그들은 오랫동안 딜런을 보지 못하고 방에서 나왔다. 의사만이 방에 남았다. * * * 루칸이 말했다.
“혼자 처박혀 있게 하지 마십쇼. 안정을 취하게 한답시고 집 안에 가둬 둬 봤자 또 자살 기도할 겁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걸 같이 곱씹을 수 있는 사람들 사이로 돌려보내기라도 하든가, 차라리 다시 각하 곁으로 돌아와 복무하게 하시든가. 어떻게든 같이 승리했다는 걸 느끼게 해 주라고요. 휠체어에 앉아서라도, 자기가 뭘 지켜 냈는지는 보게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브랜든 오스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승리는 그대들의 승리요. 경의를 표하는 바요. 하지만 내 아들이 함께 누릴 자격은 없는 승리요. 경들의 동정심에는 감사하오. 하지만 이 이상 우리를 치욕스럽게 하진 말아 주시오.”
“치욕?”
루칸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트리스탄이 나섰다.
“브랜든 경. 일선에 있었던 기사들은 그 누구도 딜런 경을 명예롭지 못하다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딜런 경은 모두에게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투에 있지도 않았던 브랜든 경께서 무슨 자격으로 딜런 경을 치욕스럽다 폄훼하는 겁니까?”
브랜든 오스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눈이 있소. 딜런이 참전한 전투에선 제대로 승리를 거머쥔 적이 없다는 걸 나도 아오. 경들도 눈이 있다면 알 것 아니오. 왜 다리가 멀쩡한데 걸을 수가 없단 말이오? 차라리 다리가 잘렸더라면 이렇게 치욕스럽지 않았을 거요.”
트리스탄이 반발했다.
“딜런 경은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브랜든 오스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도 아오. 그리고 대승을 거둔 전투라도 전사자가 있었을 것을 아오.”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다리가 후들거려 전장에 서지도 못했다는 놈이, 그 모든 두려움에 맞서 싸운 뒤 승전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기사들 사이에서 휠체어를 타고 뻔뻔스럽게 누비며 스스로의 공을 치하하게 하라고?”
브랜든 오스본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이 그 정도로 뻔뻔스럽진 못하오.”
* * * 딜런이 잠든 뒤. 방에서 나온 의사가 조심스럽게, 딜런의 음독 후유증에 대해 말했다.
“일시적일 수도 있고,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긴 합니다만…….”
브랜든 오스본은 기가 막힌 듯 탄식했다.
“앉은뱅이가 이제 눈까지 멀었군.”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브랜든 오스본은 피로한 듯 감은 눈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어차피 그 영광스러운 모습들을 ‘보게’ 해 줄 수는 없게 되었소. 아들을 저렇게 키워서 송구하오.”
“……이만 돌아가 주시오.”
* * * 아서의 허락을 받은 트리스탄은 그길로 부대로 돌아가 눈먼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있는 유명한 의사와 사제, 학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다가 회복한 사람들을 찾아갔고, 시력에 문제가 생겨 치료 방법을 찾는 중인 병사들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그리고 트리스탄은 그 모든 일을 수행하던 도중, 문득. 그가 아서의 시력 문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표면적으로 꽤 괜찮은 핑계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면적으론 한 사람을 위해. 실질적으로는 두 사람을 위해 트리스탄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짹짹……. 레이나는 홀로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아서가 결국 간밤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
레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보드라운 바람과 가을 아침의 햇살이 들어오며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레이나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꼈다. 아서 경이 오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괜찮아. 할머니에게 돌아갈 수 있으면 난 그걸로 충분해. 레이나는 눈을 감은 채 아서에게 잔을 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에게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면서 평생의 추억이 되리라 생각했었던 그날을. 그렇게 될 것 같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레이나는 씩씩하게 기지개를 켰다.
「아서 경은 그저 잠깐 화가 났을 뿐이야.」
「네 역할은 그냥 지금의 난리를 잠재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얼마나 지났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지 무척 오래된 것 같았다. 마치 후작 부인도 아가씨도 먼 옛날의 일이고, 나는 무척 오랫동안 아서 경의 곁에서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십 년 넘게 하녀 다락에서 새벽같이 기상하는 삶을 살았는데도 단 사흘 만에 익숙해지고 만 새하얗고 포근한 침대와 한낮의 햇살 같았다. * * * 하지만 브로디가 들어와 한 번도 입은 적 없는 새 드레스를 입혀 주고 예쁘게 치장을 해 주었을 때. 레이나는 끝내 거울을 보고 울어 버렸다.
“레이나, 왜, 왜 그래?!”
“…….”
모르겠어 나도. 내가 왜 울지? 레이나도 자기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아서 경은 나한테 오지 않을 거야. 이 방에 오지 않을 거라구. 브로디는 어쩔 줄 모르며 허둥거리다가,
“우리 레이나 하고 싶은 거 다 해!”
라고 소리치며 그녀를 한껏 꾸며 주었다. 평소엔 하지 않던 값진 장신구까지 전부 달아 주었다. 레이나는 훌쩍거리며 그녀가 해 주는 대로 치장을 받았고.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때 레이나는 개선식 날만 걸었던 세상에서 제일 비싼 진주 귀걸이까지 걸고 꽃단장을 한 채 테일러 앞에 서 있게 되었다. * * * 레이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붉어진 눈가로 테일러를 맞이했다.
“……테일러.”
어떻게 테일러를 맞이할지 고민했던 것 같은데. 전부 잊어버렸다. 테일러한테 물어보려고 한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무척 예쁘다는 브로디의 칭찬이 다 어처구니없는 농담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하나뿐인 친구 앞에 섰다는 걸 깨달았을 때. 레이나는 덜컥 두려움에 휩싸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테일러가 모든 걸 알고 오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테일러는 내색하지 않고 충격을 감내하고 있었다.
“…….”
레이나는 어색하게 치맛자락을 틀어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고만은 하지 말아 줬으면. 제발 당황스러워하며 말을 잊거나, 이것저것 묻지 않아 주었으면. 그 어떤 것에도 대답할 자신이 없다. 차라리 다 알고 온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테일러는, 짧은 침묵 후.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네, 아가씨.”
레이나는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오랜 친구는 고개를 숙이며 침착하게 예를 표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레이나는 그만 다시 눈물이 터져 버렸다. 레이나가 울기 시작하자, 문가에서 지키고 있던 케이와 리오넬이 성큼 다가와 그녀에게서 테일러를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테일러에게 무슨 수상한 거동이 없는지를 시선으로 확인했다. 두 기사는 그녀를 경호하듯 그녀와 테일러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었다. * * * 네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상상한 적 있지만. 그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