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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연인이 아니라고? (60/210)

#60. 연인이 아니라고?2022.03.27.

―테일러 로렌슨은 레이나 아스타린의 연인이 아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케이는 보고서를 쓰는 손을 중간중간 멈출 때마다 심란한 한숨을 내쉬고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는 얼굴을 문질렀다. 당황해서 하마터면 캐물을 뻔했다. 연인이 아니라니. 연인이 아니라니? 레이나 아스타린을 면담하기 전. 그러니까, 그녀에 대한 취조에 들어가기 전. 아서는 그녀를 면담하기 위한 주요 정보들을 케이에게 공유했다. 포섭을 위한 것이니 대부분 그녀의 약점이거나 역린이 될 가능성이 있는 정보들 위주로 핵심만 짚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 그녀에게 건강 문제가 있을 가능성. 그리고 주치의 로렌슨 선생의 아들인 테일러 로렌슨에 대한 것들. 다른 모든 문제들을 간단히 짚고 넘어간 것과 달리, 아서는 테일러 로렌슨에 대해 유달리 많은 말을 남겼다. 테일러 로렌슨. 그녀의 정인이며, 주치의 앨빈 로렌슨도 알고 있고, 아들과의 관계를 반대하지 않고 있는 듯함. ‘레이나’는 결정하기 전에 우선 그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고, 후작 부인도 둘의 연인 관계를 허락한 상황이며, 그리고, 아마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 레이나의 최종 목적일 것이다. 그러니 그와 접촉하는 걸 반대하는 낌새를 보여선 안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면담할 것. 우리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고, 테일러는 무조건 만나게 해 준다고 할 것. 원한다면 그와 관련해서는 무엇이든 최대한 반영해 준다는 가능성을 열어 둘 것.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니, 세심히 그녀의 뜻을 살피고 그녀의 의지를 존중할 것…….

16549668977746.jpg“…….”

케이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레이나’가 그동안 보였던 아서에 대한 호감과 신뢰를 돌이켜보았고 뜻밖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각하께서 귀환 후 그 여자와 동침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저 여자는 자기를 건드리지 않고 선을 지켜주는 각하께 크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고……. 그리고 각하께선.

16549668977746.jpg“…….”

근데 아니라고? 약혼자는커녕 연인도 아니야? 대체 이 오류는 어디서 온 거지? 각하께서 이런 정보를 틀리는 일은 없었는데. 케이 역시 트리스탄처럼, 아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초감각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목숨을 건 전장에서 오 년을 함께 치열하게 지내 온지라 아서의 최측근들은 자연히 그 능력의 범위나 제약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모든 공간의 모든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원할 때 일반인이 들을 수 없는 공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볼 수 없는 곳에 숨겨진 사물의 형상이나 움직임, 심지어 온도 같은 것을 감지하기도 하는 듯했다. 카일 황태자하고만 공유하는 것을 보니 황실의 기밀인지라,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하여 아서가 때때로 다른 기사들이 알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 아서의 최측근 기사들은 경험적으로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의 능력을 통해 얻은 정보일 테니까.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서는 그 자신의 확실한 수단을 갖고 있고, 직접 ‘들을 수’ 있으니까. 아서가 언급하는 것에 대해 그들은 정보의 출처와 입수 경로를 묻지 않고 그냥 믿었다. 그것이 그들의 원칙이었다.

16549668977746.jpg“…….”

하지만 정보가 틀렸다. 테일러 로렌슨이 레이나 아스타린의 정인이라는 정보는 오류다. 거짓말일 가능성은 없다. 그 여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 케이는 주먹을 틀어쥐고 찡그린 이마를 거기 갖다 댔다. ……어떻게 된 거지? 아서 경은 최소한 약혼자 아니면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데. 그래서 동침하지 않고 거리를 지키고 있었던 거잖아.

16549668977746.jpg“…….”

아서에게 공유해야 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그 후엔 어떻게 되는 거지?

16549668977768.jpg「……나 외의 남자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더니 잘만 얘기하는군.」

16549668977768.jpg「그냥. 선물.」

  웃으며 그녀에게 슬쩍 레이스 손수건을 묶어 주던 모습. 그리고 무심결에 ‘레이나 아스타린’을 쫓던 아서의 무표정한 얼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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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케이는 아서가 그녀를 어떻게든 안전하게 보내주려고 생각하고 있고, 그를 위한 계획을 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훌륭한 자제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서 경이 레이나 아스타린에게 다른 정인이 있다고 오해해서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라면? 케이가 차가워지는 이마를 짚었다.

16549668977746.jpg이거 대체…….

16549668977746.jpg어떻게 해야 되냐?

내 손에 든 거, 폭탄 아니야? 그녀와 면담 도중에 이 얘기가 튀어나왔을 때는 아서가 당연히 그녀와의 면담 내용을 다 듣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간 아차 했던 것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아서 경도 다 알게 됐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나와서 보니 아서 경은 저택을 떠나 있었다. 테일러가 그녀의 연인이 아니라는 ‘레이나’의 말을 그가 듣지 못했다. 차라리 돌이킬 수 없게 아서 경이 다 들어 버렸으면 이렇게 내 손으로 일을 망치고 있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꼭 한 번 마지막 기회를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란한 열쇠가 손에 쥐어져 버렸다. 케이는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이 완성한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 ― 테일러 로렌슨은 레이나 아스타린의 연인이 아닙니다. 】 【 ― 레이나 아스타린이 그를 만나 보고 결정하길 원한 것은, 그가 가족의 안위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

16549668977746.jpg“…….”

내 손으로 작성하고 전달해 버린 이 보고서가 아서 경과 저 여자의 인생을 있는 대로 꼬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면 어쩌지? 하지만 전달하지 않을 도리도 없지 않은가. 케이는 마른세수를 했다. 아서는 그의 상관이었고, 그는 명령에 따르는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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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흔한 건 아니다. 상이군인 한 사람이 자살 기도를 했다고 총사령관부터 최고위급 기사들까지 출동하는 일은. 그러나 딜런 오스본은 귀족이었고, 전쟁 초중반까지는 줄리어스 징집군의 고위급 간부였으며, 고문 트라우마로 전투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모두가 인정할 만한 활약을 해온 긍지 높은 기사였다. 그는 자신을 내던져 수많은 혈투를 이끌었고, 병사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상관으로 존경받았다. 최전방의 기사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낙오된 후에도, 그가 군과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모진 고문을 견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기사들 모두 그를 존중했다. 그러나 전선에 복귀하지 못하게 된 긍지 높은 기사가 받은 정신적 충격이 크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알려지고 이후로는 함구령 아래 조용히 묻혔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모두의 가슴속에 상처이자, 책임이자,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그들의 승리에 항상 딜런 오스본의 몫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여 총사령관과 그의 부관들이 딜런 오스본의 소식에 그의 저택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6549668977768.jpg“상태는?”

압도적인 속도로 말을 달린 총사령관과 최측근 기사들을 간신히 따라온 하급 기사가 헉헉거리며 대답했다.

16549668993893.jpg“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헉, 저희가, 도착할 때쯤이면, 헉,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저택에 도착한 그들은 잠시의 기다림 끝에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달려온 보람이 없게도, 기사들은 딜런을 꽤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저택의 주인은 그들을 딜런에게 안내하는 대신 응접실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리게 했다. 딜런의 집은 귀족의 집이라는 티가 나는 내성의 고급 저택이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기사 가문이자 귀족가인 듯했고. 판금 갑옷과 무기들, 동물의 박제 등이 저택 곳곳에 과하지 않게 장식되어 있는 것이, 기사로서 긍지가 높은 가주의 취향이 드러났다. 아마 아서가 없었다면 진작에 문전박대당했을 모양이었다. 하녀가 처음엔 ‘계시지 않는다’며 방문을 거절하려다가, 총사령관 아서가 방문객이라는 걸 알고는 몹시 당황해하며 주인 어르신을 모셔오겠다 하고 그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던 것이다. 상이군인을 찾아온 총사령관을 차마 문 앞에서 돌려보낼 수는 없어 마지못해 들인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딜런을 보여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대체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 건지. 모두가 내색은 않았지만 분위기는 무거워져 갔다. 오스본 가문의 응대보다는 딜런의 상태가 염려되었다. 한참을 참고 기다리고 있던 루칸이 결국 씹어뱉었다.

16549668993897.jpg“딜런 이 자식은 집에서 뒈지려고 여태까지 참은 거랍니까?”

트리스탄이 그의 상스러운 입을 저지했다.

16549668993901.jpg“그만, 루칸.”

뭘 시작하자마자 그만하래? 인간적으로 참을 만큼 참았다. 루칸이 치미는 화를 참기 어려운 듯 내뱉었다.

16549668993897.jpg“대체 다리도 못 움직이는 앉은뱅이가 독을 처먹을 수 있게 관리한 사려 깊은 새끼가 누굽니까?”

16549668993893.jpg“나요.”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노신사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섰다. 다리가 불편함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제된 걸음걸이. 격식을 갖추어 짚은 지팡이로 톡 톡 바닥을 몇 번 두드리며 다가온 신사가 그들의 앞에 멈추었다.

16549668993893.jpg“…….”

잠시 침묵하던 신사가 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16549668993893.jpg“브랜든 오스본이오. 딜런 오스본의 아비되는 사람이오. 십구 년 전 오르펠 기사단에서 복무했소.”

아서가 담담하게 일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16549668977768.jpg“브랜든 오스본 경. 처음 뵙겠습니다. 아서 줄리어스입니다.”

브랜든 오스본은 맞잡은 손을 짧게 흔들었다.

16549668993893.jpg“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실례했소, 총사령관 아서 경. 경의 위용과 업적에 대해 익히 들었소.”

16549668977768.jpg“아드님과 함께한 업적입니다.”

아서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브랜든 오스본의 얼굴은 굳어졌다.

16549668993893.jpg“아들이 추태를 보였소.”

루칸이 싸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16549668993897.jpg“아직 안 보여 주셨습니다.”

딜런을 보여 주지도 않고 어딜 정리하려 드냐는 의미였다.

16549668993901.jpg“루칸.”

트리스탄이 나직이 그를 저지했다. 그가 불린 이름에 브랜든 오스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루칸을 바라보았다.

16549668993893.jpg“……당신이 루칸 경이군. 딜런이 여러 번 신세를 졌다고 들었소. 당신이 그놈의 발작을 수차례 막아주셨다고. 고맙소. 폐를 끼쳤소.”

다행히 브랜든 오스본 경은 평민 기사인 루칸의 무례를 눈감아 주는 듯했다. 하지만 루칸은 삐딱하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브랜든 오스본 경을 쳐다보았다.

16549668993897.jpg“네. 그러니 이제 그만 아버님 말고 아드님을 뵈었으면 하는데요.”

16549668993893.jpg“돌아가시오.”

뭐? 오스본 가의 응접실에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16549668993893.jpg“어지간하면 보여드리겠지만 아들이 깨어나지 못해 뵙고 가실 수 없겠소.”

루칸이 경고하듯 목소리를 깔며 싸늘하게 을렀다.

16549668993897.jpg“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당신 앞에 계신 분은 제국군의 총수이신 아서 경입니다.”

하지만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태도로 브랜든 오스본 경은 아서를 바라보며 잘라 말했다.

16549668993893.jpg“양해 부탁드리오. 아서 경.”

딜런 오스본은 구출된 후 전장에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끝내 다시 걷지 못했고, 극도로 예민해진 불안증을 이겨 내지도 못했다. 딜런 오스본은 고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선에서 낙오되었다. 가문이 끝없이 지원을 보내 주며 그의 복귀를 독려했지만, 결국 그는 마지막 전선까지 복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다리가 잘린 것도 아닌데 걷지 못하게 되었다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겁쟁이로 치부하며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구해낸 루칸과, 다른 모든 기사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부당한 평가였다. 딜런 오스본이 활약했던 것은 전쟁이 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앞선 삼 년간의 전투였다. 그 이후로는 아서와 기사들이 수많은 눈부신 공훈들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치열한 패전에 몸 바친 딜런의 이름은 그 눈부신 ‘아서의 기사들’이라는 영광의 이름들 사이에 오르지 못했다. 사람들은 승자만 기억했다.

16549668993893.jpg「내가 남겠다.」

16549668993893.jpg「난 귀족이니 괜찮을 거다. 어떻게든 될 거야.」

16549668993893.jpg「하지만 너흰 안 돼.」

16549668993893.jpg「가!」

16549668993893.jpg「가서 아서 경에게 알려!」

  아서를 안내해 왔지만, 응접실 안까지는 함께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 남은 하급 기사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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