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연인이 아닙니다2022.03.24.
케이는 몇 번 더 ‘레이나에게 필요한 것’, 혹은 ‘레이나가 피하고 싶은 곤란’에 대해 물었다. 처음엔 불편한 하녀가 있는지를 물었고, 그 다음엔 경제적 곤란이나 건강 문제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렇게 몇 번을 과하게 캐묻지 않는 질문과 배려가 오가자 처음에 내 약점을 들으려는 건가? 하고 흠칫했던 마음은 점점 무뎌지고, 레이나는 케이를 조금씩 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그건 불편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건 레이나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가 물을 것 같은 타이밍에 캐묻지 않고 화제가 몇 번 빗겨 가자, 레이나는 점차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할머니의 간호를 위해 테일러가 필요하다는 걸.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케이는 끝까지 레이나의 조마조마한 부분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다 인사하고 자리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테일러 로렌슨’을 만나 보신 뒤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싶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급하거나 저희에게 우선 필요한 것만 여쭤봤습니다. 우호적으로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케이는 미소 지어 주었다.
「아직 기다림이 남았지만, 희망적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하는 기대감은 생기는군요.」
「저희가 레이디에게 좋은 우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언제든 마음의 준비가 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케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테일러 로렌슨과의 만남 후에도 저희와 함께하는 걸 긍정적으로 고려해 주시는 레이디의 마음이 변함없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만,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결정하십시오.」
「설령 레이디의 사정에 의해 함께할 수 없게 되더라도, 저희는 레이디께서 보여 주셨던 호의에 보답할 것입니다.」
* * * 레이나와의 면담이 끝난 뒤. 케이는 레이나를 에스코트하여 아서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온 집무실에 아서는 없었고, 대신 그들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리오넬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리오넬은 아서가 사정이 있어 잠시 외출을 했으며 오늘 좀 늦을 것 같다고, 레이디를 먼저 침실에 데려다 드리겠다고 말했다. 레이나는 케이와 리오넬 두 기사를 대동하고 침실로 돌아갔다. 신방 앞에서 두 기사는 레이나의 손등에 입맞춤하며,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레이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레이디. 좋은 밤 되십시오.”
하는 상냥하고도 정중한 인사를 건네주었다. 레이나는 고맙고도 민망해하며 기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신방으로 돌아갔다. * * * 그 후 리오넬은 케이에게 아서와 트리스탄, 루칸이 급하게 외출한 이유와 케이가 레이나를 면담하는 사이 바깥에서 들어온 딜런의 소식을 전했다. 케이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알겠습니다.”
하고 담담하게 끄덕였다. * * * 폭. 신방에 혼자 남은 레이나는 드레스를 벗지도 않은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
한참을 그러고 멍하니 누워 있었지만 도무지 잠은 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항상 그랬지만, 새삼 방이 넓게 느껴졌다. 신방의 너른 침대에 혼자 있는 게 낯설었다. 레이나는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각은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바쁜 개선장군인 아서 경은 종종 저녁 외출을 하거나 이렇게 귀가가 늦을 때도 있었지만, 이 시간까지 오지 않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 더 늦는 모양이었다.
‘아서 경이랑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같은 것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왠지 아서 경이랑 오늘 일에 대해 대화하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그가 했던 말 때문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케이가 무섭게 하면 날 불러요.」
「근처에 있을 테니.」
그렇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격려하던 아서를 떠올리며, 레이나는 멍하니 침대 천장의 캐노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두 손바닥으로 양 뺨을 눌렀다.
……케이 경이랑 이야기 끝나면 바로 오실 줄 알았는데.
언제 외출하신 걸까?
아서 경은 케이 경이 무서울지도 모른다는 듯이 말했지만, 케이 경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서 경의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뿐인 것 같았다. ……내가 제일 나쁘지. 어느 쪽이 나한테 더 이득일까 저울질이나 하고.
“…….”
다 좋았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불안했나?
케이 경과의 면담으로 무슨 힘든 마음이 생겼던 것도 아닌데, 아서 경이 오지 않는 것이 신경 쓰이고 가슴이 답답했다. 뭔가 목이 타고, 초조한 것처럼 애가 닳았다. 내 앞에선 회유를 위해 아닌 척했지만, 사실은 내가 첩자 일을 했다는 걸 알고 이제는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셨다거나. 이젠 같은 방에 있고 싶지 않을 만큼 사실은 기분이 상하셨다거나. 유도 신문 끝나서 이제 더 이상 나한테 볼 일 없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의 웃는 얼굴을 보는 걸로 증명받고 싶었다. 빨리 아서 경과 무엇이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언제 오실까?
레이나는 누운 채 마른세수를 했다. 아서 경이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이 모든 게 평화롭게 받아들여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레이나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아서를 기다리며, 그가 오지 않는 이유를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아닐 거야. 내가 괜한 자격지심으로 불안증이 도지는 거라고. 그런 이유는 아닐 거라고. 사정이 있으신 걸 거라고. 유도 신문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 기사분들한테 여쭤볼 걸 그랬나? 여쭤보면 말씀해 주시려나? 레이나는 드레스를 입은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
기분이 이상했다. 다…… 너무 잘 됐는데.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온통 다행스러운 일뿐인데. 왜 이렇게 허전하지. 더 이상 죄책감 속에서 쪽지를 넘기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기사 분들은 내가 쪽지를 넘기고 있었다는 걸 알고도, 내가 애써서 중요한 정보를 넘기지 않아 주었다고 오히려 노력해 줘서 고맙다고 해 주셨다. 내일은 테일러를 만나기로 했고. 아마…… 할머니를 보호해 달라는 부탁도 받아들여 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
그런데도 이렇게 불안하고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그저 아서 경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
레이나는 물끄러미 자신이 있는 신방의 천정을 바라보았다. 혼자 있을 때가 더 많지만, 왠지 그가 있는 풍경이 더 익숙한 방. 그리고 후작 부인이 아가씨의 새 신방을 꾸미고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후작 부인이 좋은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아서. 이 방에 대해, 이젠 그렇게 조마조마하며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아서.
“…….”
왠지 처음으로, ‘그래도 된다.’는 마음이 조심스럽게 드는 것만 같아 레이나는 침대에서 슬그머니 반쯤 굴러 보았다. 아가씨는 새 신방으로 가신다. 그러니까 이 방으로는 돌아오지 않으신다. 드레스도 내가 한 번 입은 건 아마 다시 입지 않으시겠지. 레이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럼 아서 경도 거기서 지내시게 되겠지? 그럼 이 방은 어떻게 되는 거려나. 정리되려나?
“…….”
너무 멋진 방인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방만 딱 떼어서 바닷가에 가져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차피 버리실 거라면……. 나 주지. 레이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햇살 냄새가 나는 이불에 뺨을 묻어 보았다. ……이 방이 남아 있다면, 아서 경은 가끔 날 생각해 주실까.
“…….”
스스로가 좀 웃기다 싶어서. 레이나는 스크랩북을 앞에 두고 아서 경에게 감사의 작별 인사를 건넸던 어떤 날처럼 피식 웃었다.
“…….”
왠지 웃기가 어려웠다. ……정든 것 같았다.
* * * 저, 언제까지 여기 있게 될까요? 아서 경께선 후작님이나, 후작 부인이나, 크리스티나 아가씨와 대화하고 계신가요? 크리스티나 아가씨께서 화내고 계시지는 않으세요? 제가 여기 있는 게 아서 경께 폐가 되고 있지는 않나요? 아서 경께 혹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나요? * * * 케이는 자신의 자리에서 아서에게 건넬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하며,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를 회상했다. 결국 케이가 자리를 정리하는 말을 건네고 일어난 직후에, 마침내 레이나의 입이 열렸던 것이었다. 정확히 케이가 예상한 타이밍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도……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케이는 기꺼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재촉하지 않는 미소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었다.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이 자리에 언제까지 있게 될까요?」
그녀에게선 이 불안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듯한 속내가 읽혔다. 역시나, 아서 경의 곁을 차지한다거나 하는 발칙한 신분 상승 계획 같은 건 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케이는 평온하게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너무 걱정하시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 계셔 주시는 걸로 저희들이 얻는 이득이 있는 만큼, 기간이 다소 길어지더라도 레이디는 안전하게 보호해 드릴 예정입니다만, 아무래도 그러면 레이디께선 곤란하시리라는 점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레이디께서도 돌아갈 곳이 있으시고, 혼인을 하셔야 할 테니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레이나의 곤란을 이쪽에서도 짐작하고 있고, 관련하여 그녀를 최대한 신경 쓰겠다는 뜻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레이나의 표정이 조금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네? 혼인이요? 전 이미 혼인은……. 음…….」
레이나는 말을 하다 말고 머쓱한 듯이 웃으며 목덜미를 눌렀다.
「제가 혼인을 다시 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네?」
케이는 멈칫했다. 아서와의 관계 때문인가? 그녀의 민망해하는 태도에선 감히 아서 경을 탓할 생각은 없다는 그런 암시가 느껴졌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에 케이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상대도 없구요.」
「……예?」
그게 무슨……. 그녀는…….
「……테일러 로렌슨과 미래를 약속하신 사이가 아니십니까?」
「……네?」
이번에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어리둥절한 반문에 케이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순간적인 당황을 감추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제가 뭔가 착각을 한 것 같은데…….……한 가지만, 사적인 질문을 드리는 무례를 범해도 될까요?」
「아, 네.」
케이는 긴장감 속에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테일러 로렌슨이…… 레이디의 연인이 아닙니까?」
그녀는 머쓱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런 헛소문이 도는 걸 익히 알고 있다는 듯이…….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테일러를 먼저 만나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건…….」
「연인이라서가 아니라…… 제…… 가족의 안위 때문이고요.」
「내일……. 테일러를 만나고 결정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