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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진술 (58/210)

#58. 진술2022.03.20.

레이나는 케이에게 그동안 한 일에 대해 설명했다. 케이는 그녀의 말을 종이에 적으며 경청하고, 때때로 레이나가 한 진술을 확인했다. 취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케이의 목소리는 일상적이었다. 나무를 죽이지 않고 분갈이하는 법에 대해 설명하듯 평화로웠다. 그러나 배려가 담긴 목소리였음에도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레이나는 마른침을 삼키게 되었다.

16549668511531.jpg“명령한 건 후작 부인이었고, 정보를 내보낸 경로는 쪽지로 적어서 전달하셨다고요.”

16549668511536.png“네.”

16549668511531.jpg“이전에 쪽지를 넘긴 건 한 번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였는데, 아서 경과 트리스탄 경에게 보이게 된 거고요.”

레이나가 끄덕였다. 진술 확인이 이어졌다.

16549668511531.jpg“넘긴 정보는, 그 모습으로 황태자 전하를 만나서 데뷔탕트에 초대를 받은 일. 그리고 아서 경께서 버섯을 드시지 않는다는 거…… 두 가지, 맞나요?”

레이나가 눈치를 보았다.

16549668511536.png“……네. 믿어 주지 않으셔도……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케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16549668511531.jpg“믿지 않아서는 아니고요. 한 번 더 여쭤보는 게 절차라서요.”

케이는 평화롭게 아서가 알려 준 내용과 레이나의 진술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고, 기존에 그들에게 없었던 새로운 정보들을 채워 넣었다.

16549668511531.jpg“쪽지를 전달한 경로는 하녀나 주치의인가요?”

16549668511536.png“…….”

레이나는 처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발당한 사람이 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야 마음의 준비를 했고 다행스럽게도 아서 경의 호의를 받았지만, 로렌슨 선생님에게도 아서 경과 케이 경이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16549668511567.jpg「……오늘은 이것만 드십시오.」

16549668511567.jpg「하루 정돈 괜찮습니다.」

  레이나는 후작 부인 몰래 자신을 위해 준 로렌슨 선생님이 자기 때문에 해를 입기를 원치 않았다. 로렌슨 선생님이 아서 경이 물려받을 줄리어스 가문에서 계속 일하고 싶어 하신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16549668511536.png“그건……. 저…….”

16549668511531.jpg“…….”

케이는 가만히 레이나의 대답을 기다리듯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초조한 기색으로 소매 안쪽을 꽉 쥐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16549668511536.png“제가 누구라고 말씀드리면, 그…….”

16549668511531.jpg“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6549668511536.png“……네?”

케이는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케이의 손이 평온하게 종이 위를 움직였다.

16549668511531.jpg“해를 입을까 걱정되시는 거죠? 알겠습니다. 묵비권을 행사하십시오.”

16549668511536.png“…….”

레이나는 케이 경의 친절에 조금 감동하여 울컥했다. 이렇게 친절한 취조라니.

16549668511531.jpg“…….”

그리고 조금 울망해진 눈빛과 발그레한 뺨. 입술을 꾹 다물고 뭔가를 애써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 표정이 얼굴에 죄다 드러나는 것을 본 케이는 다시 독해 빠진 간첩과 포로들이 그리워졌다. 퍽이나 이중 첩자로 쓰겠군.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케이는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참았다. 어차피 전달책이야 뻔했다. 주치의 앨빈 로렌슨이겠지. 하녀들은 언제나 직속 하녀 대기실에서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가끔 하녀들이 ‘진짜 레이디 크리스티나’에게도 불려 가는 듯했지만, 그 둘을 돌려쓰는 이유는 아마 하녀들 중에는 그 둘만이 이 사태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들은 뭘 몰라서 다소 불안해하는 티가 났다. 그 외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다. 반면 앨빈 로렌슨은 계단에서 넘어진 후작 부인을 치료해 준다는 명목으로 레이디를 만난 다음에 늘 후작 부인을 보러 갔다. 그러니 첩보 쪽지를 받아 간 게 앨빈 로렌슨이라는 건 싱거울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뻔히 짐작 가능한 정보를 묵비권 행사해도 된다는 말로 배려라도 하는 양 모르는 척해 주고 순진한 아가씨의 감동과 신뢰를 사 버리는 자신이 갑자기 프랜시스 같은 양아치로 느껴졌다. 케이는 속으로만 침음을 삼켰다. 물론 겉으로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젠틀한 인텔리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16549668511531.jpg“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레이나는 부쩍 눈빛이 빛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협조적으로 대답해 주고 싶은 기세였다. 케이는 지금까지와 똑같은 목소리로 담담히 물었다.

16549668511531.jpg“저희에게 하고 싶은 요청이 있으실까요?”

16549668511536.png“네?”

케이가 말을 이었다.

16549668511531.jpg“당장 레이디에게 필요한 도움이 있다든가, 불편이 있다든가요.”

16549668511536.png“…….”

레이나는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뜨고 케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거……? 물론 당장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덜컥 말하기는 멈칫하게 되었다. 목을 드러내 놓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위축되었다. 케이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68511531.jpg“일단 저희가 하녀들은 교체할 생각을 하고 있긴 합니다. 아무래도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16549668511536.png“……하녀, 교체요?”

16549668511531.jpg“네. 누구 불편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새로운 사람을 구해 드리는 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당장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바꿔드리겠습니다. 물론 원하신다면 두 하녀 다 바로 그만 오게 할 수도 있고요. 당장 도와주는 하녀가 없어지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만 있으시다면요.”

레이나의 눈이 흔들렸다. 하녀 교체라는 말에 간절한 눈빛으로 ‘나 버리지 마…….’ 하던 브로디가 곧바로 떠올랐다. 레이나가 시선을 내리고 멍하니 손을 꼼지락거렸다. 하녀를 교체할 기회가…… 그 선택권이 정말로 나에게 오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브로디를 교체해 버리면, 걔한테 후작 부인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거 아냐? 뭐 시킨 것도 없는데 무슨 수상한 짓을 했길래 하녀 교체를 당하냐고 말이다. 간절한 브로디에 뒤이어, 까칠하게 틱틱거리면서도 결국 자신이 마음 졸이고 궁금해할 것 같은 걸 먼저 짐작하고 대답해 줬던 마리나도 떠올랐다. 까칠한 척해도 배려심이 있는 애였다. 레이나는 깊이 생각할 시간을 벌지 못한 채,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했다.

16549668511536.png“하, 하녀들은 괜찮을 거 같아요. 전 브로디랑 마리나가 좋아요. 불편하지 않아요. 교체하지 않으셔도…….”

걔들이 교체당하게 되면 겪을 가능성이 있는 ‘하녀의 고초’가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16549668511531.jpg“…….”

케이는 물끄러미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둘 다, 아니면 하나라도 바꾸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둘 다 품겠다고 말해 버리네. 하녀들은 괜찮다니, 이 순진하고 바보 같은 아가씨야. 그럼 당신이 쪽지를 건네고 있던 건 주치의라는 뜻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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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 시각. 말에서 뛰어내린 한 하급 기사가 다급하게 줄리어스 후작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후작 저택의 정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당연하게 문을 막아서며 저택의 누구와 약속했는지를 물었다. 당연히 사전 약속은 없었기에 허락을 받지 못한 기사는 우왕좌왕하며 더듬더듬 ‘아서 경’, 혹은 ‘루칸 경’을 불러 달라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어렵다면 측근 기사분들께 ‘딜런 경’의 일로 찾는 기사가 있다는 이야기만이라도 전해 달라고. 당연히 후작 저택은 일개 기사가 이런 식으로 사정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후작의 경비병들은 서로 쳐다보며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후작과 후작 부인의 명령을 듣는 사용인들이었지만, 그들도 근래 저택의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아서 경’을 찾는 기사를 자기들이 마음대로 돌려보낸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 경을 찾는 손님이라고 덜컥 문을 열기도 두려웠다. 반대로 아서 경 쪽에서 ‘겨우 이런 일로 감히 나를 찾았나.’, ‘날 만나야겠다고 주장하는 놈들은 다 만나라고 데려올 셈이냐.’, ‘내가 개선장군의 공무 외에 사람을 일절 만나지 않는다고 한 걸 못 들었나?’ 따위로 호통을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위 귀족의 사용인들에게 그런 일은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낭패였다. 아서에게 중요한 기사들이라면 소식지로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있고 이름들이 알려져 있는데, ‘딜런 경’은 처음 듣는 이름인 데다 찾아온 기사도 지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공무냐고 물었지만, 기사는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못했다. 경비병들은 난감해하면서, 사정을 설명해 준다면 사안에 따라 총사령관 아서 경의 측근 기사에게 만나 줄 수 있는지 물어봐 주겠다고 말했다. * * * 오러가 아서의 주변을 떠돌았다.

16549668553328.png“…….”

아서는 무릎 위에 깍지 끼고 있던 손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49668584612.png“……?”

트리스탄이 의아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16549668584612.png“각하?”

아서가 커프스 링크를 채우고 트리스탄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16549668553328.png“일어나, 트리스탄. 나가야겠다.”

16549668584612.png“네?”

트리스탄은 반문하면서도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말을 할 때건, 운을 떼는 순간에 미소를 잃는 일이 드문 아서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16549668584612.png“무슨 일입니까?”

아서가 짧게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16549668553328.png“딜런 일.”

아서의 입에서 나온 옛 동료의 이름에 트리스탄이 멈추었다. 딜런. 그것은 아서의 최측근 네 사람 모두를 순간 멈칫하게 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트리스탄이 즉시 발을 떼는 순간, 리오넬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노크하는 것조차 잊은 듯 급한 모습이었다.

16549668584656.jpg“……각하!”

리오넬이 문밖에서 그를 불렀다. 침착하게 부르고 있지만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의 뒤에선 아마도 급히 딜런의 소식을 가져왔을 듯한 기사가 초조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트리스탄은 어떤 문제인지조차 묻지 않고 즉시 외투를 걸치며 물었다.

16549668584612.png“함께 가야 하는 일이라면 루칸도 부르겠습니다.”

아서가 짧게 끄덕였다.

16549668553328.png“불러와.”

그리고 아서는 리오넬을 스쳐 지나가며 목소리를 낮추어 지시를 남겼다.

16549668553328.png“……케이한테 아내와 대화한 일은 따로 보고하라고 전해.”

리오넬이 끄덕였다.

16549668584656.jpg“알겠습니다.”

아서가 오러를 거두었다. * * *

16549668511536.png“……?”

순간 레이나가 멈칫하며 눈을 깜박였다. 케이가 레이나의 묘한 낌새를 알아채고 물어보았다.

16549668511531.jpg“레이디? 왜 그러십니까?”

레이나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16549668511536.png“갑자기 바람이…….”

16549668511531.jpg“바람이요?”

케이는 느끼지 못한 듯, 의아한 눈으로 창문이 열려 있는지를 고개 돌려 살펴보았다.

16549668511531.jpg“……?”

하지만 조용한 응접실에, 바람이 들어올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레이나도 그것을 알아채고는 확신하지 못한 채 말꼬리를 흐렸다.

16549668511536.png“바람이…… 느껴졌던 것 같아서요…….”

  * * * 아서의 최측근이라 불렸던 기사들은 본래 다섯이었다. 트리스탄 고트프리트, 케이 포드, 루칸 러쉬만, 리오넬 잭슨. 그리고 딜런 오스본. 그러나 전쟁은 아서의 가장 훌륭한 최측근 기사 중 하나였던 딜런 오스본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그는 최후의 전선까지 기사로서 복귀하지 못했다. 다행히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는 극심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잃은 것이 아님에도 걷지 못했다. 지독한 신경증에 시달렸으며, 한 번 음독했다. 그는 다리를 잃었거나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가장 늦은 후발대로 최근에야 돌아왔다. 화려한 개선식으로 환영받은 명예로운 기사들의 뒤에서, 부상병들과 상이군인들과 함께 조용히. * * * 아서와 트리스탄, 루칸이 말에 오르기 직전. 기사가 짧게 상황을 전했다.

16549668615716.jpg“딜런 오스본 경이 음독했습니다.”

두 번째 음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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