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면담2022.03.17.
렘브란트 경을 만나고 돌아온 후작은 신이 났다. 그리고 거들먹거리며 후작 부인에게 자신이 렘브란트 경으로부터 받은 파격적인 제안에 대해 늘어놓았다가 비명 같은 호통을 들었다.
“미쳤어?! 그걸, 그걸 감사하다고 했다고?!”
날벼락을 맞은 후작이 아픈 귀를 막으며 와락 눈썹을 구겼다.
“뭐야? 이 여편네가. 왜 소리는 질러?”
우리 줄리어스 후작가의 위상은 쑥쑥 올라가고 있는데 대체 왜 이 여자의 교양이란 밑바닥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지! 도무지 여유와 기품이라는 걸 가질 수가 없는 걸까? 후작 부인은 파들파들 떨며 채신없이 더듬거렸다.
“렘브란트 경이 하녀들을, 하녀들을 보내 준다고 했다고? 그걸 당신은 넙죽 받는다고 했고? 나한테 상의도 없이?”
후작이 왈칵 짜증을 냈다.
“하녀 애들 죽는소리한다고 나한테 몇 번이나 불평한 건 당신이잖아? 그게 당신 의향 아니었어?”
렘브란트 경이 이미 우리 곤란한 사정을 다 헤아리고 있더만! 렘브란트가 해 준 배려 깊고 신사적인 제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저와 수행원들의 체류도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고, 아서 경과 기사들까지 저택에 머물고 계셔서」
「근래 여러 가지로 신경 쓰고 계신 바가 무척 많으시지요.」
「불편 없도록 해 주시는 배려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 정도의 인원이 이렇게 길게 머무는 것은 폐가 아닌가 싶어서요.」
「후작 내외께서 한정된 인력으로 저희를 위해 얼마나 신경 써 주시고 계실지, 능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제국의 중역이신 줄리어스 후작가에서 급하게 일손이 부족하다고 갑작스레 하녀들을 모집하실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 저도 적잖이 염려가 되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으로, 제가 후작 부인의 짐을 덜어 드릴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선물이란 건 예고하는 게 아닌 법이니, 말씀드리지 않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만,」
「혹시라도 원치 않으시는 배려라면 실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후작 각하께 미리 말씀드리고 의사를 여쭤보려고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잠시 뵙고 싶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렘브란트 경은, 저희들이 머무는 동안 줄리어스 저택을 잠시 도와줄 수 있는 실력 있는 하녀들을 자신이 삼십여 명 정도 엄선하였는데, 이들을 보내 드려도 실례가 안 되겠느냐 말했던 것이다. 신원이 아주 확실한 이들로, 다른 귀족가와 우려하실만한 연이 없고 유능한 하녀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실력은 의심할 데 없는 이들이니, 후작 내외께선 저희 황실의 일행들을 챙기는 부담만 줄어도 상당한 일손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물론 후작 내외의 저택 본관 내에서도 편히 쓰셔도 되지만 아무래도 그건 후작 부인께서 불편하실 수 있으니, 객들인 황실의 일행들을 챙기는 데에만 도움받으셔도 괜찮겠다고 생각해 봤는데 어떠시냐는 말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후작이 이 제안을 받고 감격에 휩쓸린 이유는, 렘브란트가 ‘허락하신다면 이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다’던 하녀들이 무려 ‘황궁에서 일하다가 안식년으로 잠시 쉬고 있는 하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황궁을 돌보던 하녀들이 줄리어스 저택을 돌본다니! 줄리어스 후작에게는 이 말이 마치 후작 저택이 황궁이나 다름없어진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후작은 흥분했다. 이것이야말로 황실이 보내는 확실한 신뢰와 동맹, 호의의 표현이 아닌가? 이런 제안을 받은 걸 후작은 빨리 줄리어스 저택의 방문자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얼마 전, 저택에 방문한 황태자를 소개받고 친분을 쌓을 기회를 놓쳤던 아쉬움이 날아갈 정도였다. 후작은 황태자를 놓쳤던 실수를 떠올리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제안만은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즉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렘브란트 경의 친절함과 사려 깊음에 격한 감사를 표했다.
「렘브란트 경……! 어찌 이리 사려 깊으신지!」
「오히려 제가 이런 큰 선물을 덜컥 받아들여도 실례가 안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심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렘브란트 경이 역시 황실 하인들은 어렵겠다며 말을 바꾸지 않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아도 안사람이 하녀가 부족하다고 무척 고민이 많았거든요!」
「아, 결코 렘브란트 경 때문에 힘들었던 건 아닙니다.」
「저택에 근래 중요한 손님들이 전례 없이 많이 방문하시는지라, 확실하지 않은 하녀들을 들일 수는 없다는 안사람의 완벽주의 때문이었죠!」
“…….”
거기까지 생각한 후작은 왈칵 짜증이 치밀어 아내를 노려보았다. 내가 이렇게 안사람 민망하지 않도록 어련히 자기를 치켜세워 주기까지 했는데. 나한테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하지만 후작 부인은 기뻐하기는커녕 품위 없이 잇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당신…… 당신!”
후작 부인의 머릿속에선 드레스를 입은 채 신방에 갇혀 있는 레이나와, 매일 아서의 용서를 기다리며 계단 위 복도에 서서 그를 기다리는 크리스티나와, 그들을 만나 주지도 않으면서 저택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아서와 기사들의 모습이 순서대로 스쳐 지나갔다. 아찔했다. 여기에 렘브란트 경의 하녀들을 들이라고?
“집 안에 보이면 안 되는 게 있는 거 몰라?!”
후작 부인이 윽박질렀다. 후작이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하녀들은 당신 영역 침범 안 하고 렘브란트 경만 보조한다니까! 어련히 품위 있고 지혜로운 렘브란트 경이 당신한테 실례 안 되게 할까!”
후작 부인은 마구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당신이! 하녀들에 대해 뭘 안다고, 저택의 일에 대해 뭘 안다고 당신 멋대로 이런 짓을 벌여! 아니, 왜!”
후작 부인은 급기야 후작을 붙들고 울먹이듯이 통사정했다.
“안사람에게 물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왜 당신 맘대로 허락해! 왜 나한테 상의하지 않은 거야? 하녀들은 내 권한이잖아!”
하지만 후작은 팽 콧방귀를 뀌었다.
“내 참, 그게 무슨 대단한 권한이라고.”
후작 부인은 기가 막혀 헛숨만 내뱉었다. 후작이 지껄였다.
“안 그래도 아서랑 크리스티나를 계속 못 만나게 하면서 빼는 게 분위기가 영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또 거만하게 ‘아, 안사람에게 물어보고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따위로 말을 하라는 거야? 당신은 사회생활도 몰라?”
쓸데없이 자기 권한 같은 것에 집착하기는! 그러다가 렘브란트 경의 마음이 바뀌면 어쩌려고! 그러나 후작 부인은 들은 체도 않고 후작을 흔들며 안달복달했다.
“됐으니까 렘브란트 경한테 가서 안 되겠다고 해. 잘못 알았다고, 하녀들은 괜찮다고 내가 사양한다고 했다고. 당장 가서, 아니, 당신 민망하면 내가 할까? 그래, 그냥 내가…….”
후작이 코웃음 쳤다.
“이미 당신이 하녀들 부족해서 울상이라고 다 얘기했는데?”
“뭐?”
후작은 쐐기를 박듯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아니. 클라인 대공가도 아니고 황궁 하녀 출신들을 대 준다는데, 그걸 어떻게 안 받아? 황후도 이미 허락했을 텐데.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제안인지 당신은 잘난 귀족가의 안주인이면서도 모르겠어?”
폭발해 버린 후작 부인이 후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말이 통하질 않으니 이길 수가 없었다.
* * * 케이가 당신과 대화하고 싶어 했소. 네. 좋아요. 불편하면 나랑 이야기해도 돼요.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 아니에요. 기사님이랑 말씀 나눌게요. ……드릴 말씀도 있구요. * * *
“레이디.”
“케이 경.”
문이 열리자, 레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조금 긴장한 듯 보였지만 평소보다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케이가 먼저 편안한 말로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따로 뵙는 건 처음이군요.”
“네. 그렇네요.”
레이나가 다소 위축된 기색이라 케이는 미소 지어 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몇 가지만 여쭤보고 싶어서 자리 청했습니다. 우선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고생은요.”
레이나가 사뭇 굳어 있는 것 같아 케이는 우선 그녀에게 편히 앉으시라 해야 하나 짧게 고민했다. 이제 내가 그녀한테 자리를 권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뒤이은 레이나의 행동은 케이를 조금 당황하게 했다. 레이나가 그대로 가슴 앞섶을 누르고 깊이 고개 숙인 것이었다.
“죄송해요.”
“…….”
그녀가 수동적으로 대답만 할 거라 여겼던 케이는 순간 대응하지 못하고 멈칫했다. 레이나는 고개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제가 보냈던 쪽지를 다들 보셨다고 들었어요. 배신감 느끼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좋은 인연으로 여기 있게 된 건 아니었는데도, 여러분들께선 과분하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는데…….”
잔뜩 긴장한 레이나의 장황한 사죄가 이어졌다.
“불안해하는 절 위해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다는 아서 경의 호의에 기대어, 저는 그동안 아서 경과 여러분을 기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케이가 저지했다.
“레이디.”
……혹시 나보다 먼저 트리스탄 경을 만나서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케이는 순간 당황스러웠던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하고 그녀를 말렸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름대로 저희를 위해 행동해 주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른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저희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기사들이 더 많습니다.”
“…….”
레이나는 말만 멈춘 채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케이가 다시 그녀가 고개를 들도록 설득했다.
“고개 숙이지 마십시오. 제가 받을 사과가 아닙니다. 아서 경께서 괜찮다 하셨으면 저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고개 숙여 케이가 난감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레이나는 굽힌 몸을 일으키고 경직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하던 말을 마저 했다.
“……아서 경께도 사과드렸지만, 그래도 경과 기사분들께는 따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서 경의 명령으로 절 지켜 주셨으니까…….”
케이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찌푸리며 말했다.
“감시이기도 했습니다.”
회유와 포섭을 하러 온 입장에서 좀 그렇긴 했지만, 레이나는 오히려 살짝 웃었다.
“지켜 주신 것이기도 했죠. 저는 감시보단 보호로 느꼈어요. 감사합니다.”
첩자나 포로 심문이라면 수도 없이 진행해 봤지만 이런 건 또 낯설긴 했다. 케이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포로를 보고 있자니 전쟁이 끝나긴 끝났구나 새삼 실감이 났다.
“각하의 명령대로 했을 뿐입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레이디께서도 똑같이 명령을 받으셨는데, 협조하지 않을 용기를 내 주신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을 거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됩니다. 오히려 감사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향한 상대를 치하하는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말에 레이나의 풋풋하고 어색한 얼굴이 좀 붉어졌다.
“…….”
정말 낯설군. 닳아빠진 포로와 독한 간첩들이 그립다.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
정어리 편식했다는 보고를 한 걸 갖고 지금 뭘 했다고 말하는 건가. 이전에 했던 보고도 버섯 편식 보고였다는 걸 그는 이미 아서 경으로부터 언질 받은 상태였다. 케이는 잠자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이나는 케이의 그 시선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다시 바짝 긴장하며 장광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넘긴 정보는, 황태자 전하를 만났던 일이랑 데뷔탕트에 초대를 받았다는 거. 그리고 아서 경께서 버섯을 드시지 않는다는 거……. 쪽지를 넘긴 건 한 번뿐이었어요. 해를 끼치지는 않으려고 했지만, 여러분을 속였다는 건 사실이니 변명일 뿐이라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저는…….”
케이가 침착하게 레이나를 저지했다.
“네, 레이디. 아서 경의 섭식 취향을 유출하신 것에 대해선 그만 사과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