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줄리어스의 최상급 하녀2022.03.13.
브로디는 복도에서 마주친 트리스탄을 쳐다보았다. 아서 경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
브로디는 이미 트리스탄이 레이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상태였다. 뭐…… 앞뒤 사정을 보면 납득이 가기는 했다. 아서 경이 당한 일은 어쨌든 사기 결혼이니까. 하지만 브로디는 제가 다 씁쓸하고 억울했다.
“……트리스탄 경.”
막 스쳐 가려던 트리스탄은 눈동자만 움직여 브로디를 내려다보았다.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였지만 브로디는 레이나를 위해 입을 열었다.
“……걔라고 자기가 원해서 그러진 않았을 거예요.”
“…….”
내 말이 무슨 큰 도움이 되랴마는. 그래도 레이나가 자기를 감싸 주었던 걸 떠올리며 브로디는 말을 이었다.
“걔 그렇게 나쁜 애 아니에요.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브로디는, ‘좀만 생각해 보면, 불쌍하게 여겨 주실 수도 있는 일 아닌가요?’ 하는 속마음이 어느 정도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브로디는 말을 더 늘이지 않고 꾸벅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몸을 돌려 자기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뒤에 남은 트리스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브로디는 레이나가 신부 대역을 했던 것에 대해 말한 거였지만, 트리스탄에게는 레이나가 넘기고 있던 쪽지에 대해 브로디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 * * 크리스티나를 위해 새로 꾸미기 시작한 신방을 살피러 가던 후작 부인은 아서의 구역 근처에서 브로디와 트리스탄이 뭐라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는 짧았고, 둘은 이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지만, 후작 부인은 기분이 나빠졌다.
‘……하녀가 조심성 없이. 뭘 친하다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던 후작 부인은 뒤이어 아서의 기사 중 하나가 저편 계단에서 하녀들에게 길을 비켜 주는 걸 보고 다시 멈추어 섰다. 충분히 엇갈려 지나갈 수 있음에도, 기사는 하녀들이 먼저 통행할 수 있도록 물러서서 기다려 주고 있었다. 하녀들은 물러서 주는 기사를 보곤 멈칫하더니, 그에게 살짝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내고는 발걸음을 재촉해 계단을 올라갔다. 기사는 딱히 여지를 남기지 않는 태도로 간단히 묵례하곤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하녀들은 기사가 지나간 뒤, 고개를 돌리고 기사의 뒷모습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후작 부인이 부채를 틀어쥐며 눈을 부라렸다. 기사의 태도는 꽤나 매너가 좋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거슬렸다. 대부분의 대저택이 그렇듯, 줄리어스 저택 역시 저택 내 고용인들 사이의 연애는 불문율로 금기시하고 있었다. 귀족 가문의 안주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추문에 휩싸이길 원치 않았으니까. 그건 가문의 평판과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하녀 애들에게 아서의 기사들은 확실히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연애 상대였다. 후작이 뿌린 돈.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아서의 기사라는 명예. 심지어 개중 몇몇은 개선식에 가서 공훈에 따른 작위까지 하사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자꾸만 눈에 밟히는 젊고 훤칠한 남자들이었다. 주로 하녀들의 결혼 상대로 고려되곤 하는 집사나 풋맨, 마부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용이 넘치며 늠름한 사내들이었던 것이다. * * *
“나는 그분. 붉은 머리!”
“루칸 경?”
“루칸 경이야? 이름 어떻게 알아? 세상에 이름까지 멋있네.”
“웃는 얼굴 매력적이지! 빨간 흑표범 같아!”
“그럼 적표범 아니야?”
“아니지. 빨간 흑표범이 맞아.”
“맞아. 왠지 그 이름이 더 어울려!”
하녀들이 제멋대로 떠들며 키득거렸다. 기사들은 하녀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거의 저택 안에서 나갈 일이 없는 하녀들에게는 갑작스럽게 저택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한창때의 멋진 남자들이란 예기치 못한 눈 호강이었고 횡재였다. 하녀들의 연애 상대란 결국 거의 저택 안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비 불균형이 심했기에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고, 대부분의 하녀들에겐 다른 데서 이성을 만날 시간이랄 게 없어, 하녀들은 거의 연애나 결혼을 포기하고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압도적인 낯선 매력을 풀풀 풍기는 ‘진짜 기사’들이 우르르 저택에 들어와 있으니 필연적으로 하녀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하녀들이야말로 역대급 ‘아서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 후작님한테 뺨 맞은!”
“리오넬 경!”
하녀 두엇이 동시에 그의 이름을 외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분 너무 잘생겼지! 사연 있어 보여.”
“맞아! 어딘지 처연미가 있다니까.”
“아. 난 그분 후작님한테 말하는 거 보고 진짜 너무 멋있어서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하녀들 사이의 한 재간둥이가 즉시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보였다.
“내가 지금 당신을 즉결 처분하지 않는 건 당신이 줄리어스 후작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아서 경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아서 경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내 권한으로 즉결 처분하겠습니다!”
“꺄아!”
하녀들 사이에서 행복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후작을 상대로 인상적으로 한 방 먹인 데다 꽤나 사연 있어 보이는 미남 스타일인 리오넬도 적잖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인텔리 느낌이 나는 분이 좋더라! 난 기사분들 중에 그런 스타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안 했는데…….”
“케이 경? 아서라. 그분 포드 백작가 자제분이야. 엄청 까마득한 귀족이라고.”
“치. 누가 뭐 엮여 보겠댔나? 그냥 내 스타일이라구.”
“난 트리스탄 경! 솔직히 아서 경 빼고는 트리스탄 경이 제일 잘생긴 얼굴 아냐?”
“그럼 뭐하니? 유부남인데.”
“뭐?! 트리스탄 경 유부남이야?!”
“애가 다섯 살이다. 엄청 애처가래.”
하녀들은 일에 치이는 와중에도 기사들의 이야기에 웃음꽃을 피웠다. 루칸과 리오넬의 쌍두마차에 뒤이어 다른 기사들도 모두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아서의 최측근 기사인 네 사람은 대부분의 하녀들로부터 열렬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 * *
“다들 빠져 가지곤!”
후작 부인이 짜증스레 부채를 펼치고 부채질을 했다.
“바빠 죽겠다고 엄살들이더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기사들한테 한눈이나 팔고 있지 뭐니? 자존심도 없이.”
크리스티나는 피식 웃으며 마리나의 시중을 받아 옷을 벗었다. 후작 부인의 불평이 이어졌다.
“하여간 하녀들이란 골치야. 애들 관리할 때 네가 신경 쓸 게 많겠다! 나도 물론 함께 신경 쓸 테지만.”
후작 부인은 이내 부채질도 팍 식은 얼굴로 부채를 던져놓곤 찻잔을 들어 찻물을 들이켰다. 드레스와 코르셋을 벗고 흰 슈미즈 차림이 된 크리스티나가 머리카락을 옷 밖으로 빼 늘어뜨리며 답했다.
“뭐……. 하녀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상대이긴 하겠네요. 어쩔 수 없죠. 걔들도 결혼은 하고 싶을 테니.”
얘가 겁도 없이. 후작 부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태평할 일이 아니다, 얘. 안 그래도 사방 천지에서 우리를 질시해 트집 잡을 빌미들만 노리고 있는데, 이러다가 추문이라도 하나 터졌단 봐! 줄리어스 저택의 기강을 알 만하다며 난리가 날 거다. 뭐하러 하이에나들한테 그런 먹잇감을 던져 주니?”
크리스티나가 마리나를 고갯짓으로 내보내며 말했다.
“하녀들도 어련히 분별이 있겠죠.”
후작 부인이 짧게 코웃음 치며 한탄했다.
“하녀 애들의 분별력을 믿지 말거라. 반드시 뒤통수를 맞게 될 테니.”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그래서 로렌슨 선생이 있는 거잖아요.”
후작 부인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로렌슨 선생만 믿고 있는다고 될 일이 아니야. 지금은 예전이랑 다르다. 저택을 보는 눈이 많아.”
“알죠.”
크리스티나가 무심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요.”
“뭐?”
거울 너머로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하녀들이랑 기사들이 엮이는 거 말이에요.”
후작 부인이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시가렛 홀더에 담뱃불을 대느라 잠시 끊겼던 크리스티나의 말이 이어졌다.
“줄리어스 저택의 하녀가 아서 경의 기사를 만난다. 그림 나쁘지 않겠는데요? 오히려 줄리어스의 위상이 올라가지 않겠어요? 동맹도 굳건해 보이고.”
크리스티나가 후,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대부분은 헛물켜게 되겠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어쨌든 우리 저택엔 꽤 쓸만한 애들이 많으니까요. 물론 더러운 추문으로 엮이진 않아야 하고, 예쁘게 포장해 줘야 하겠지만 말이에요.”
딸의 말을 들은 후작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리스티나가 편안한 자세로 다리를 꼬며 팔꿈치를 화장대에 기댔다.
“빠르게 성과가 있다면 당장 그 사람 쪽 소식을 전해 듣는 용도로도 쓸 수 있을 거고. 반대로, 우리 쪽 얘기를 그쪽에 좋은 방향으로 전하게 할 수도 있을 거고요.”
말문이 막혔던 후작 부인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 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명문가야! 선제후라고! 사교계가 체면을 얼마나 중시하는데, 밖에서 보면 우리 꼴이……!”
“대외적으로도 어떻게 이용하냐에 따라 이쪽 힘이 될 수 있어요. 차별화된 포용심을 보여 줄 수도 있을 거고요. 어쨌든 우린 인정받지 못하던 사생아도 포용한 집안이잖아요?”
후작 부인은 낯을 찌푸리며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불만스레 항변했다.
“아니, 그거랑 이건 경우가 다르잖니.”
크리스티나는 우아하고 귀족적인 자태로 웃으며 손에 든 시가렛 홀더를 매만졌다.
“품위니, 역사니, 교양이니 남들 기준에 맞춰 용 써봤자 다른 선제후들만 못하다는 소리나 듣지 않겠어요? 아예 남다른 파격을 보여 줘야지.”
그녀의 손 안에서 매끈한 검정색 시가렛 홀더가 맵시 있게 노닐었다.
“장려해 주세요. 추문이 터지지 않는 선에서라면 상관없어요. 오히려 좋아요.”
섬세한 연기가 은실처럼 공중으로 올라갔다.
“물론, 자제력과 분별력이 필요한 문제이니 순종적이고 통제가 잘 되는 애들이어야 하겠지만요.”
“…….”
크리스티나가 시가렛 홀더를 입으로 가져갔다. 마틸다는 살짝 입을 벌린 채 딸을 쳐다보았다. 결혼과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하녀 애들과 그들을 따라다니는 남자들이란, 저택을 관리하며 평판을 신경 써야 하는 귀부인들에게 언제나 골칫덩이였다. 그런데 하녀 애들이 기사들과 엮이는 걸 오히려 장려하라니……. 딸이 비범한 건 알고 있었지만. 가끔씩은 따라가기 버거운 면이 있었다. 마틸다는 초조하게 부채 끝을 만지작거렸다.
“…….”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조언을 따라서 여태 일이 좋지 않게 풀린 적은 없었다. 후작 부인은 딸의 능력을 믿고 있는 만큼 신중하게 고민했다. 크리스티나가 꼰 다리를 한 번 까닥이며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레이나가 참 괜찮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맡고 있으니 어쩔 수 없네요.”
“…….”
참 대단한 속이야. 그건 제 남편인데 눈 하나 깜짝 안 하네.
“……내 속으로 낳았지만 대체 어떻게 너 같은 걸 낳았는지.”
후작 부인의 중얼거림에, 크리스티나가 빤히 시가를 빨며 픽 웃었다. 후작 부인은 턱을 괸 채 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기가 막힌 미모에, 무서울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제 아비의 감당 안 되는 성깔을 빼다 박은 것만이 크리스티나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성깔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아버지 밑에서 저 정도로 맞설 수 없었겠지. 그럼 줄리어스 후작가가 오늘날에 이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티나가 여상히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물론 우리 이야길 그쪽에 좋게 전하게 하려면, 어머니도 하녀들한테 ‘잘’ 대해 주셔야 해요. 아시죠?”
“…….”
크리스티나가 앉은 채 몸을 숙여 구두를 벗으며 태연하게 웃었다.
“우리가 레이나에게 해 주는 것처럼요.”
후작 부인은 딸의 이야기에 한동안 어이가 없다가도, 왠지 크리스티나라면 무엇이든 그럴싸하게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었다.
“……알았다. 네가 하자는 대로 하마.”
크리스티나가 웃었다.
“고마워요, 엄마.”
후작 부인은 부채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한숨을 쉬며 일어나 침대 밑에 숨겨 둔 금고에서 금색 표지의 비밀 장부를 꺼냈다. 약점을 가진 ‘쓸 만한’ 하녀들을 분류해 둔 장부였다. 금색으로 빛나는 하드커버의 묵직한 장부가 테이블 위에 놓이며 쿵 소리를 냈다. 크리스티나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서 거기에 닿았다. 【 하녀 장부 】 팔락. 펼쳐진 장부엔 가장 입단속이 잘 되고 순종적인 ‘특별한 하녀’들의 등급이 매겨져 있었고, 그들에게 후작 부인이 정교한 계산 하에 베풀어 주고 있는 ‘특별한 시혜’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최상급으로 분류된 하녀들 중에서도 맨 위에, 레이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레이나의 이름 아래. 함께 최상급으로 분류된 몇몇 하녀들의 이름 위에는 모두 붉은 잉크로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저택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 하녀들의 이름이었다. 남은 것은 레이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