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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철벽을 함락시키는 법 (54/210)

#54. 철벽을 함락시키는 법2022.03.06.

16549667409269.png“그런데 그 내용은 뭐야?”

레이나가 코를 들이마시며 반문하는 소리를 냈다.

16549667409274.png“……네?”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였다. 아서는 그 코맹맹이 소리가 웃겨서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서 작게 말했다.

16549667409269.png“……내가 정어리를 편식한다고 적었던데.”

16549667409274.png“…….”

레이나는 귀 끝만 붉어지며 입을 다물었다. 아서가 그녀의 허리 뒤에서 손깍지를 낀 채 레이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재촉하듯 그녀를 제 쪽으로 더 당겨 안았다.

16549667409269.png“물어보면 당황스러운가?”

16549667409274.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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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나는 아래를 향해 머리를 박은 채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아서는 레이나의 다리 뒤에 팔을 넣어 훌쩍 그녀를 안고선 침대에 앉았다.

16549667409274.png“…….”

레이나는 그의 다리 위에서 옆으로 앉혀진 자세가 되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서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16549667409269.png“트리스탄은 무슨 암호인 것 같다고 기사들한테 가져갔다가 바보 취급만 당하고 돌아온 모양이야.”

16549667409274.png“…….”

레이나는 어색하게 아서를 보았다. 씩 웃는 모습이 거짓말처럼 근사했다.

16549667409269.png“트리스탄이 그러는 건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내가 괜찮다 하는 일에 대해 괜찮지 않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이 그의 일이니.”

16549667409274.png“…….”

왜 후작 부인은 나한테 유도 신문 따위를 조심하라고 걱정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인계를 걱정했어야 했던 것 같은데. 레이나는 어딘지 우울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들뜨는 기분으로 그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아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667409269.png“뭐,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거지. 그게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 방향인 건 유감이야.”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약하게 웃으며 다시 훌쩍 코를 들이켰다. 당연한 거지……. 오히려 당신이 괜찮다는 듯이 구는 것이, 알고 있었다면서 날 다독여 주는 것이 이상한 거 아닌가. 레이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작게 중얼거렸다.

16549667409274.png“……저 같아도…….”

그리고 면목이 없어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수그렸다.

16549667409274.png“왜 그런 여자한테 잘해 주시냐고……. 배은망덕한 사람이니 가까이 두지 마시라고 했을 거 같아요.”

아서가 웃었다.

16549667409274.png“…….”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힐끔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아서는 “아.” 하고 생각났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레이나는 멍청한 기분으로 그걸 받아 들었다.

16549667409274.png“…….”

아서가 말했다.

16549667409269.png“다음 주쯤 보내려던 거지? 예정대로 편할 때 보내도록 해요. 우린 모르는 걸로 할 테니.”

16549667409274.png“…….”

아서가 말을 이었다.

16549667409269.png“그런데 저번에 보낸 쪽지에는 버섯을 편식한다고 적었나 보군. 카일 황태자를 만난 이야기를 적었을 줄 알았는데…….”

16549667409274.png“…….”

레이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아서가 한쪽 눈썹을 꺾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667409269.png“그걸 먼저 알려 줘야 하지 않았소? 아, 둘 다 적었으려나? ……그랬겠군. 내 ‘약점’을 보고해야 했지?”

16549667409274.png“…….”

레이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버렸다. 알고 있다는 게…… 이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거였어? 레이나는 얼이 빠진 채 그를 바라보았고 아서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아서는 자세를 고치며 슬쩍 그녀를 당겨 더 편하게 앉혔다.

16549667409269.png“그런데 후작 부인한테 그런 걸 써서 보내도 돼? 그쪽에서 그런 보고를 기대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장난치는 거냐고 화내지 않았어?”

16549667409274.png“…….”

레이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황망함에 아무 말도 나오질 않았다. 아서가 웃는 낯으로 턱을 만지며 말했다.

16549667409269.png“아. 그런데 내가 가리는 건 버섯뿐이오. 정어리는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아. 식사 때는 당신이 생선은 별로라기에 치운 거였어.”

16549667409274.png“아…….”

레이나는 정말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서의 말은 여상히 이어졌다.

16549667409269.png“뭐, 그대로 보내도 상관은 없소. 그런데, 이걸 보내면 우린 한동안 정어리 요리를 받게 되는 건가?”

16549667409274.png“…….”

정신이 하나도 없는 레이나의 넋 나간 얼굴을 보고 아서는 뻔뻔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허리 뒤로 다시 손깍지를 꼈다.

16549667409269.png“혹시 그렇게 되면 정어리는 내가 먹어 줄게요. 버섯은 당신이 먹어 줬으니.”

16549667409274.png“…….”

레이나는 얼이 빠져 그를 쳐다보았다.

16549667409274.png“……어떻게 그렇게 다 아세요?”

아서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칫하다, 어딘지 묘하게 알 수 없는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레이나를 바라보며 툭 던졌다.

16549667409269.png“……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레이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말을 들은 적 있었다. 그것까지 다 아는 거야? 아서는 레이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16549667409269.png“뭐 어쨌든.”

아서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16549667409269.png“보고는 당신 원하는 대로 계속해요. 굳이 우리가 다 안다는 걸 후작 내외 쪽에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럼 당신도 곤란하지?”

16549667409274.png“…….”

아서가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 정돈해 주었다.

16549667409269.png“우린 모르는 걸로 해 둘 테니. 후작 내외한테 받아낼 수 있는 건 다 받아 내.”

16549667409274.png“…….”

16549667409269.png“물론 내가 주는 것도.”

그리고 아서는 그녀의 치마폭 위에 두 개의 금화 꾸러미를 다 올려놔 주었다.

16549667409269.png“다 당신 거요.”

16549667409274.png“…….”

아서는 산뜻하게 말을 이었다.

16549667409269.png“혹시 보고할 내용이 마땅찮은 거면 물어보시오. 내가 적당한 걸 골라 줄 테니. 당신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정어리를 편식한다는 보고 같은 건, 후작 내외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레이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에게 뭘 숨기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16549667409274.png“……좋아하셨다더라고요.”

레이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16549667409274.png“……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아서가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16549667409269.png“……뭐?”

레이나는 소심한 한숨과 함께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슬그머니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16549667409274.png“……그 정도로 만족하시나 봐요. 다행히…….”

무언가 큰 벽 하나가 자신의 내면에서 휑하니 사라진 느낌이었다. 아서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을 잊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16549667409274.png“…….”

레이나는 처음으로 자신이 저지른 금기의 위반이 가져온 결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은 뒤, 웃음이 터진 그를 보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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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저택의 본관을 나서던 케이는 고개를 들어 올려 아서가 머무는 신방을 올려다보았다.

16549667534437.jpg“…….”

처음엔 짧게만 지나갈 일이라 생각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그 여자에게 후작가의 시중 하녀가 붙게 한 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도 마찬가지고……. 줄리어스 후작과의 협상에 그 여자의 존재가 실제로 도움이 되고 있고, 기간도 당초의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이상. 관리해야 할 것 같다. 【 ― 아서 경은 정어리도 편식합니다. 】

16549667534437.jpg“…….”

케이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여자를 이쪽으로 포섭하여 품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으니……. 아무래도 따로 시중 하녀나 몸종을 구해서 붙여야 할 듯했다. 하지만 하녀를 구한다 해도 어떤 명목으로 저택에 들이느냐가 문제였다. 기사들이야 아직 소집 해제가 되지 않은 아서 경의 직속 소속 군인들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후작 부인의 관할이 아니라는 핑계로 은근슬쩍 뭉갤 수 있었지만, ‘하녀’들을 총괄하는 것은 어느 저택에서나 안주인과 하녀장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러니 아서로서는 그쪽의 허락 없이 월권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저택 내에 별도로 그들만의 하녀를 들일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자칫하면 가문의 본 주인과 대립한다는 느낌을 주게 될 것이었다. 그건 아서에게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오만하게 군다는 인상을 주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가주와 안주인에 대한 ‘데릴사위’의 월권은, 황태자와 황후에 대한 ‘사생아’의 월권과 겹쳐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마리아 황후의 견제에 틀림없이 꼬투리를 주게 될 테니. 아서는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라는 제스처를 보여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16549667534437.jpg“…….”

‘군’의 일부라고 우길 수 있는 여기사나 종군 간호원 중에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야 하나. 하지만 아서 경의 직속 휘하엔 여자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 명분이 썩 좋질 않았다. 전쟁에서 돌아온 데릴사위가, 전장에선 없던 여자 측근을 갑자기 만든다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소지가 높았다.

16549667534437.jpg“…….”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린 케이의 발걸음이 줄리어스 저택의 귀빈 별채, 렘브란트 경의 숙소로 향했다. 그의 형, 프랜시스 포드가 지내는 곳이었다. * * *

16549667561088.png“흠. 저택 안에서 아서 경의 명령만 받는 하녀를 따로 들이고 싶다고?”

케이가 말했다.

16549667534437.jpg“각하께서 말씀하신 건 아니고 나 혼자 생각해 본 거긴 해요.”

케이의 이야기에 프랜시스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사기 결혼 같은 곤란한 기밀과 연관될 만한 정보를 제거한 채, 케이는 아서가 후작가와 약간의 긴장감 속에서 후계자 권한 조율 절차를 밟고 있다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렸다. 지나치게 비현실적 화목함을 강조하지 않고 현실적인 수준의 마찰과 긴장감을 자연스럽게 암시하여 아서가 줄리어스 후작가의 공동 지배권자로서 권한 분배의 수순을 정상적으로 밟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간접적으로 황실은 자신의 편이라 생각한다는 신뢰의 제스처를 보인 것이었다. 더불어 이쪽이 황실이 마련해준 혼처에서 충실히 해내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프랜시스도 일부러 말을 흘리는 케이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을 테니, 이 정보는 렘브란트 경 쪽으로도 공유될 것이다. 아서가 견제하는 대상은 줄리어스지 황태자나 황후가 아니라는 쪽으로.

16549667534437.jpg“…….”

황후의 견제가 미묘한 상황이긴 했지만 어쨌든 줄리어스를 상대할 때 그들은 아군의 범주에 있었다. 프랜시스가 다리를 꼰 채 턱을 괴었다.

16549667561088.png“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한데……. 저택에 하녀를 들이려면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동의만으로는 안 돼. 무조건 후작 부인 쪽 허락을 받아야 할 거야.”

16549667534437.jpg“…….”

케이는 가만히 침묵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동의라. 우리가 그걸 당연히 얻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하긴, 아서 경이 레이디 크리스티나랑 사이가 괜찮다고 여기고 있겠다 싶기는 했다. 아서 경이 ‘레이디 크리스티나’에게 푹 빠져서 침실에서 도통 안 놔준다는 소문이 저택 안에 퍼지고 있었으니……. 프랜시스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67561088.png“정식으로 후작 부인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그쪽에서 불쾌해할걸. 그럼 괜한 빌미를 주게 돼.”

케이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16549667534437.jpg“네. 그건 저희도 예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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