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시작되는 변화2022.03.03.
아서의 전용 응접실. 미간을 찌푸린 트리스탄은 불편한 표정이었다. 루칸이 트리스탄을 바라보다 픽 웃으며 혀를 찼다.
“레이디가 형님한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셨나 본데.”
트리스탄이 대꾸했다.
“딱히 예쁜 털이 박힐 짓을 하진 않으셨지.”
“왜요? 불쌍하고 귀엽잖아요.”
트리스탄이 정색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트리스탄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루칸이 그의 표정에 대답하듯 미간을 찡그리며 휙 손을 저었다.
“아니, 제 딴엔 나름대로 애쓰는 것 같지 않아요?”
루칸이 말을 이었다.
“명령을 받은 거야 그 여자가 어쩔 수 없었겠지. 하녀 입장에서 후작 부인이 명령을 하는데, 못 한다, 안 한다, 그 입 닥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얌전히 서서 예에, 알았습니다, 하고 듣기야 들었겠죠.”
“…….”
“하지만 실제로 뭘 했는지 봐요. 우리한테 피해를 끼쳤습니까?”
생각해 보라는 듯 루칸이 턱짓했다.
“그 쪽지 내용. 어쩌다 그런 쪽지가 나왔겠냐고요. 그런 거 넘기고 후작 내외한테 좋은 반응을 못 얻었을 게 뻔한데. 왜 그랬겠어요? 저 나름대로는 아등바등 어떻게든 시간 끌며 피해 보려고 하는 게 안 느껴져요, 형님은?”
트리스탄은 냉담하게 말했다.
“지나치게 호의적인 해석이다.”
루칸은 어련하시겠습니까 하는 얼굴로 픽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흘겨보는 눈매가 ‘그래요, 뭐. 그래야 트리스탄 경이지.’ 하는 눈빛이었다. 트리스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그 여자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봐.”
루칸이 방만한 자세로 이마에 거수경례했다.
“예에.”
* * *
“아침에 오는 로렌슨 선생이나 하녀에게 쪽지를 넘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리오넬이 케이에게 ‘레이나’의 호위 겸 감시가 완벽하지 못했음을 사과했다. 케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지키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저도 알아채지 못했는데요.”
짧은 한숨이 이어졌다.
“그리고 몸에 숨기고 있다가 쪽지를 넘긴 거라면 어차피 저희로선 알 방법이 없긴 합니다. 잠옷 차림의 레이디를 몸수색하거나 가까이서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케이도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레이나’의 성향과 보안의 빈틈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녀가 이쪽에 우호적이라 내용상 별다른 걸 안 넘기고 있었다 해도, 애초에 뭔가 ‘넘길 수’ 있었다는 건 문제였다. 조금 신경 쓰이긴 했는데……. 역시 따로 곁을 지킬 시중 하녀를 붙여야 했나. 케이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방법들을 고민해 보며 물었다.
“평소에 그 레이디에게 다른 수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리오넬이 답했다.
“네.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각하께서 데리고 나가실 때 외에는 방 안을 벗어나는 일도 없고요. 하녀들이나 로렌슨 선생과 나누는 대화는 각하께 전부 보고드리고 있습니다.”
“보고드릴 때 각하의 반응은요?”
“뭐…….”
리오넬이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기듯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무언가 모호한 생각은 있는데, 입에 담을 정도로 분명하지는 않아 판단을 보류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여느 때와 같으십니다. 각하께 별다른 해를 끼치지는 못할 거라고 여기시는 듯합니다.”
리오넬은 표정을 정돈하고 말했다.
“좀 더 면밀히 살피고 경계하겠습니다.”
케이는 리오넬의 태도에서, 그가 자신과 비슷한 것을 느꼈다는 것을 직감했다. 케이가 작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며 운을 떼었다.
“……각하께서 그 여자를 정부로 들여 보호하고 싶어 하실까요?”
리오넬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부로요?”
길지 않은 고민 후 그가 말을 이었다.
“……각하의 성격에 정부를 두실 것 같지는 않으신데요. 정치적 리스크를 도외시할 정도로 여자한테 혹하거나 과시하는 성격도 아니시고, 데릴사위라는 입장도 그렇고요.”
케이가 피로한 듯 미간을 눌렀다.
“저도 각하의 성격에 대해선 같은 의견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이라서 오히려 그러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네?”
케이의 말이 이어졌다.
“드러내질 못하니…….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제 자리로 돌아온 이후, 그 여자 처지가 위태로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손을 내리며 그는 덤덤하게 덧붙였다.
“증거 인멸이라는 게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듯, 리오넬의 표정이 고민스레 변했다.
“……그럴 수 있겠군요.”
케이가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정부로 공인해 그 여자를 공개적으로 보호하는 걸 염두에 두실 가능성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 적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한다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요.”
남편의 정부를 좋아할 안주인이야 없겠지만, 그 어떤 부인도 남편의 정부를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싶어 하진 않을 것이다. 더욱이 지금의 줄리어스라면. 케이가 살짝 눈썹을 찌푸려 웃었다.
“각하께는 손해이긴 합니다. 깨끗한 영웅의 이미지에 흠집이 나겠죠.”
케이가 모노클을 검지로 밀며 말을 골랐다.
“하지만 줄곧 그 여자의 안전이 아서 경 마음에 걸린다면, 오히려 그게 각하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정부로 공인하여 안전한 곳에 두시고 그만 마음을 쓰시라 조언 드리는 방향도 염두에 두고는 있습니다.”
케이가 가볍게 분위기를 바꾸며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지금 드린 말씀은 그저 최악을 염두에 두는 겁니다. 최대한 그렇게까진 안 하는 방향으로 해야죠. 어차피 줄리어스도 선제후 지위를 얻고 운신에 조심하는 상황이니, 심각한 문제로 비화되진 않을 겁니다.”
리오넬이 대답했다.
“네.”
케이가 일어서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각하와 그 여자 사이의 분위기는 계속 살펴 주십시오. 저는 다른 방향으로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리오넬이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 * * 똑똑.
“네.”
흠칫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이나는 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신방으로 들어오는 아서를 맞이했다.
“…….”
레이나는 평소보다 굳은 얼굴로 손을 포개어 잡은 채 어색하게 그를 마주하고 섰다. 크리스티나의 드레스를 입고 그저 멀리서. 그녀의 왼손 약지엔 여전히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무표정을 꾸며내지만 큰 잘못을 저지른 후 처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이 무거운 기색이었다. 쪽지를 들키고 당황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혼자 있게 해 주었지만, 그녀는 홀로 그 어떤 심란함도 해결하지 못한 듯했다. 테일러를 못 만나게 하고 싶다는 아서의 말이나. 당신을 매수하고 싶다는 아서의 제안이나, 쪽지를 들키고 만 것에 대한 고민. 그가 손에 끼워 준 결혼반지. 그 무엇도. 그 어떤 때보다도 속에 담은 말이 많아 보이는 한편, 평소처럼 말을 걸거나 다가오지 못한다. 그가 돌아올 때면 어쩔 줄 모르고 서서 저도 모르게 그를 찾던 무의식적인 반가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저렇게 고민할 거면서도 용케 테일러를 만나고 나서 결정하고 싶다고는 말했군 싶었다. 침대에는 그가 두고 간 두 개의 금화 꾸러미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서가 그쪽을 보는 듯이 시선을 향하자 레이나는 손가락 끝을 초조하게 움찔하고는,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제서야, 그걸 어디 치워 두기라도 할 걸 그랬다는 데에 뒤늦게 생각이 미친 듯했다.
“…….”
아서는 싱겁게 미소 지으며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그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언제나처럼 망토 장식을 풀고 그것을 벗으려다 말고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몇 걸음 앞에 선 채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저렇게 레이나를 세워 두고 싶지 않았다. 아서가 그녀를 불렀다.
“부인.”
“…….”
그녀가 흠칫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는 살짝 팔을 벌리며 말했다.
“도와주겠소?”
“…….”
레이나는 주춤하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요청이 무엇인지 확인하듯, 그의 망토를 고정하고 있는 장식과 가슴에 있는 휘장 따위를 살짝 내려다보았다가, 조금 조심스러운 빛으로 다시 올려다봤다. 아서가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그녀를 응시했다.
“나한테 오는 게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면…… 한번 부탁하고 싶은데.”
레이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잠깐 그를 바라보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리고 반쯤 끄덕이는 듯이 약하게 고개를 숙인 뒤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아서가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
“…….”
레이나는 살짝 고개를 내리며 젓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망토 장식을 풀었다. 툭…….
“……!”
제가 풀어 놓고 왜 제가 놀라는지. 레이나는 미세하게 흠칫했다가 아서의 등 뒤로 흘러내리는 망토를 두 손으로 황급히 눌러 잡았다. 이런 식으로 흘러내릴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키 차이가 제법 나는 그의 어깨 뒤로 툭 미끄러지는 망토를 어쩌지 못하고, 떨어지는 걸 그의 어깨 위에서 붙잡느라 약간 허둥거린다. 레이나는 그에게 매달리기 직전의 쩔쩔매는 자세로 아서의 양쪽 어깨 위 망토를 움켜잡았다. 아서가 한쪽 손만 들어 오른쪽 어깨 바깥으로 떨어지려 하는 망토를 잡아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죄, 죄송해요.”
“…….”
아서는 그냥 웃었다.
“…….”
스륵. 레이나는 당황해서 상기된 얼굴로 그의 망토를 건네받은 뒤 갈무리해 팔에 걸었다. 그리고 꿀꺽 마른침을 삼킨 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겉옷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얼굴로 방황했다.
“…….”
레이나는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스스로 벗어서 건네주면, 받아 들어 정리해 주는 정도나 생각했지. 차마 이 이상 그를 벗길 엄두는 나지 않는 모양. 하지만 아서는 스스로 외투를 벗어 주지 않고, 가만히 미소 지은 낯으로 레이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가끔 그랬던 것처럼, 어딘지 조금 레이나를 놀리려는 것도 같았다.
“부인.”
“네, 네?”
아서가 웃었다.
“그렇게 기죽어 있지 마시오. 마음이 아프군.”
“…….”
아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져 주었다. 스치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내가 말했지. 당신, 탓하지 않을 거라고.”
“…….”
창가의 커튼이 흔들렸다.
“알고 있었다고 했잖아.”
감정을 숨기려는 듯 굳은 얼굴로 스스로의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레이나의 아랫입술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턱에 눈물을 참는 것 같은 불쌍한 모양이 잡혔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레이나가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려 그를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쪽지…….”
“…….”
눌린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서가 작게 웃었다.
“괜찮다니까.”
아서는 잠시 레이나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그녀를 안아 주었다. 부담스러운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포옹이었다. 토닥토닥. 아서의 손이 레이나의 등을 두드렸다.
“…….”
입 밖으로 내고서야, 레이나는 그것이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나는 훌쩍 코를 들이켜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상했다. 그는 그녀를 가장 불안한 상황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녀를 가장 안심하게 해 주는 것도 그 사람이라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