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쪽지의 내용2022.02.27.
그래. 어쩌면 나도 이 여자를 불쌍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함께 유가족 방문을 했던 날, 뒤에서 울음을 참던 모습은 인간적으로 보였으니까.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손수건을 건네줄 정도로는. 가식적인 것 같진 않았다. 그의 주군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는 듯도 했다. 몇 가지 사건을 거치며, 그녀에 대해선 조금 누그러지는 마음이 들 뻔도 했었다. 하지만 수상한 쪽지 같은 걸 넘기고 있었다면 얘기가 다르지. 트리스탄은 쪽지를 노려보았다. 숨기고 있다가 들키고는 무척이나 켕기는 듯 당황스러워 한 쪽지라니. 이게 무엇일지 뻔했다. 아서 경을 배반하고 뒤통수를 치는 쪽지겠지. 아서 경이 그녀를 과분하게 대해 주고 있고, 기사들이 그녀를 적으로 생각지 않고 포용하려 한다는 신호를 꾸준히 주고 있었음에도.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니.
“…….”
미약한 배신감에 트리스탄의 눈빛이 냉담해졌다. 그런 여자에게 잠깐이나마 동정하는 마음을 가질 뻔했다는 게 더 화가 났다. 줄리어스의 끄나풀이니, 후작 부인으로부터 뭔가 지시를 받았을 거라곤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무언가를 수행 중이라는 증거를 확인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트리스탄은 이번에야말로 아서가 그녀를 감싸게 두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턱에 힘을 주었다. 그래. 일단 내용을 보고 생각하자. 그 여자가 무슨 스파이 짓을 하고 있었던 건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 쪽지의 내용을 듣고 나면 아서도 그녀에 대한 시각이 조금이나마 달라질 것이다. 그 후에 객관적으로 상황의 위험성을 들어 그녀를 가까이에 두지 않는 게 좋겠다 충언하면 아서도 인정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서 경은, 그쪽에 넘어가선 안 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트리스탄은 쪽지를 펼쳤다.
“…….”
【 ― 아서 경은 정어리도 편식합니다. 】
“……?”
* * * 【 ― 아서 경은 정어리도 편식합니다. 】
“…….”
트리스탄은 굳은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다, 도로 쪽지를 접었다.
“무슨 내용이야?”
아서가 물었다.
“…….”
뭐지? 트리스탄은 한껏 뇌에 힘을 줬다.
“무슨…… 암호인 것 같습니다. 분석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암호?”
아서가 고개를 기웃했다.
“……그런 걸 익힐 시간은 없었을 텐데?”
“…….”
트리스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
“…….”
“트리스탄?”
트리스탄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시간 조금만 주십시오. 분석해 오겠습니다.”
“…….”
트리스탄이 내키지 않는 듯한 낌새로 대답하지 않으려 하자, 아서가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쓰여 있는 그대로 말해. 명령이다.”
“…….”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거기엔 공적인 질책이 담겨 있었다. 순간 트리스탄이 멈칫하고 입 안쪽을 물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아서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걸로 감히, 그에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첩보의 내용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숙이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각하. 정어리 싫어하십니까?”
“뭐?”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찌푸리는 아서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
트리스탄이 결국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실토했다.
“……아서 경이 정어리를 편식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 * * ‘레이나’가 줄리어스 쪽에 아서의 정보를 유출하고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케이가 소리 없이 모노클을 빼 내려놓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루칸은 ‘뭐야.’ 하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고, 리오넬도 표정이 평소보다 가라앉으며 진지해졌다. 루칸이 삐딱하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물었다.
“중요한 정보가 유출됐습니까?”
트리스탄의 표정이 묘해졌다.
“…….”
그렇진 않을 거라는 걸 짐작한 듯 기사들도 대답을 재촉하진 않았다. 아마 그랬으면 트리스탄이 그걸 가장 먼저 말했을 거고, 트리스탄의 표정이 훨씬 험악했을 것이며, 좀 더 심각한 분위기에서 말을 꺼냈을 테니까. 트리스탄이 마침내 고개를 한 번 저으며 입술을 축이고 탐탁잖은 낌새로 입을 열었다.
“그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좀 상의를 하고 싶은데요.”
트리스탄이 쪽지를 꺼냈다. 기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음…….”
트리스탄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민하다 떨떠름하게 옆 사람에게 그걸 넘겼다.
“……일단 보십시오.”
트리스탄의 가장 가까운 곳, 오른쪽에 있던 리오넬이 가장 먼저 쪽지를 건네받았다.
“……암호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지 봐 주셨으면 합니다.”
트리스탄이 덧붙였다. 리오넬은 트리스탄을 한번 올려다본 뒤, 묵묵한 얼굴로 한동안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
잠시 후 그는 루칸에게 쪽지를 넘겼다. 그리고 조용히 트리스탄을 올려다보았다. 리오넬에게서 쪽지를 건네받은 루칸은 그걸 보며 이상한 표정으로 눈썹을 번갈아들었다.
“…….”
그리고 리오넬과 달리 오래 보지 않은 채, 곧바로 마지막 사람, 케이에게 쪽지를 넘겼다.
“?”
제게 그걸 넘기며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는 루칸을 한 번 힐끗 보고, 케이도 쪽지를 받아 들여다보았다.
“…….”
케이가 그걸 채 이해하기도 전에 루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트리스탄 경. 아니…… 형님.”
“…….”
쪽지를 보며 케이의 표정이 이상해지는 동안. 맥 빠진 얼굴이 된 루칸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트리스탄을 쳐다보았다.
“형님 눈엔 저게 암호로 보입니까?”
“…….”
“아니……. 대충 암호문이 어떻게 생겼나 아시잖아요?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래? 그 여자 맘에 안 들어요?”
트리스탄이 말했다.
“……무슨 종류의 암호인지는 모르는 거니까.”
“무슨 뜻이 숨겨져 있는 암호라기엔 내용이 너무 짧잖아요. 어떤 종류의 암호든 뭐 좀 길이가 있어야 속뜻을 숨기지.”
리오넬이 루칸의 말에 비슷하게 긍정하는 의견을 냈다.
“……저렇게 짧은 구조에서 사용 가능한 암호 방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배경지식 없는 분이 할 수 있을 만한 암호는 더 뻔하고요. 구조상 세로로 읽는 방식도 아니고, 건너뛰기식 암호도 아니네요. 스펠링을 밀어내는 대응 방식도…… 당연히 아니고요. 아예 문장 자체가 통째로 무슨 뜻인 거면 모를까.”
“…….”
“하지만 그 레이디는 그런 걸 준비할 시간은 없었을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저도 모르게 그 결론에 동의하게 되며 황망해질세라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원래부터 항상 그런 걸 암기하고 있던 훈련된 인력이었다고 가정하면…….”
루칸이 말했다.
“그런 훈련된 인력이었다기엔 너무 허술하잖아요. 당황하면 딱 숨부터 멈추면서 얼굴에 다 드러나더만. 그리고 이렇게 쪽지를 홀라당 들켜 버렸고.”
“…….”
곰곰이 쪽지를 보던 케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각하께선 뭐라 하십니까?”
“…….”
트리스탄이 탐탁지 않은 듯 머뭇거렸다.
“그게…….”
트리스탄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딱히 정어리를 싫어하진 않으신답니다.”
“…….”
“각하께서 싫어하는 건 버섯뿐이라고.”
“…….”
뭔가 머저리 같게 느껴졌다. 하지만 트리스탄은 꿋꿋하게 케이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암호문일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케이도 영 애매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신중한 케이는 좀 더 물어보아 주었다.
“이 쪽지, 발견 당시의 상황은요? 어떤 경로로 손에 넣은 겁니까?”
트리스탄은 말해 주었다. 실수로 보이는 갑작스러운 사고. 바닥에 떨어진 쪽지. 레이나의 몹시 찔리는 게 있어 보이던 반응과, 이미 알고 있었다던,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아서의 말까지. 케이가 가만히 쳐다보며 턱을 만졌다.
“흠……. 후작 부인 측 지시를 받은 건 맞나 보군요.”
트리스탄이 긴장해서 케이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각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뭐, 포섭에 성공한다면 이중 첩자로 쓴다거나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생각이 있으시겠죠.”
“…….”
트리스탄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실 아서도 이중 첩자 계획이 있었다고 말하긴 했다. 하지만 케이는 쩔쩔매는 그 여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던 아서를 직접 보지 못했다. 아서가 치명적인 약점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걸 알고서도 지금처럼 말할 수 있을까? 케이의 말이 이어졌다.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암호문일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제가 아는 암호화 방식은 다 떠올려 봤지만 일치하는 건 없네요.”
케이가 쪽지를 들며 말했다.
“다만 회유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케이가 머리를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제가 한번 대화해 보겠습니다.”
* * *
“…….”
기사들의 반응을 전해 들은 아서가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만지듯 얼굴을 가렸다. ……웃고 계시는군.
“각하. 웃을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음.”
아서가 이마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렸다.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하지만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젠장. 「아서 경은 정어리‘도’ 편식합니다.」라는 건 이전에 그의 다른 편식에 대한 정보도 전달했다는 뜻인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
그래 봤자 경각심이 생기기는커녕 비웃음만 두 배가 될 것 같다. 크흠. 아서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그 쪽지는 암호 같은 거 아니라고. 우리끼리 한 얘기였어. 정어리는 내가 아니라 부인이 싫어하는 요리다.”
아서가 손을 내리며 말을 덧붙였다.
“생선을 안 좋아한다길래 식탁에서 멀리 치웠더니 그걸 내가 싫어한다고 오해했나 싶군.”
“…….”
아서는 침착한 얼굴로 트리스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이야기해 볼게. 쪽지 줘.”
“…….”
트리스탄이 마지못해 쪽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아서는 좀 즐거워 보이는 기색으로 쪽지를 돌려받았다. ……보이지도 않으면서 뭘 웃으신담.
만일을 대비해 쪽지에서 글씨가 쓰여 있는 위치와 특징적인 필치 따위를 짚어 주며, 그걸 듣고 있는 아서를 보자니 갑자기 속이 아렸다. 트리스탄은 아서의 실명에 대해 감정적으로 빠지지 않으려 의식하며 말을 돌렸다.
“케이 경께서 부인과 대화해 보고 싶으시답니다.”
“내 아내랑? 왜?”
“그 쪽지를 보시더니, 부인의 회유 가능성을 높게 보신 듯합니다. 포섭 시도를 하실 것 같습니다.”
“흠…….”
아서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직은.”
“……아닙니까?”
아서는 싱긋 웃었다.
“케이는 나중에. 일단 내가 먼저 말해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