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거절2022.02.24.
“못 만나게 하고 싶어.”
그가 내놓은 말에, 레이나는 멍하니 아서를 바라보았다. 아서도 한동안 레이나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는 숨죽인 채 고요했다. 그러나 그 소리에 점점 불안감이 섞이고 있었다.
“…….”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며 문밖에서부터 느꼈던 그녀의 들뜬 심장 소리를 생각했다. 조심스럽게 들떠 있던 울림들은 사라지고, 초조한 애원만이 그 자리를 채워 가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하지만 차마 만나게 해 달라고도, 만나지 않겠다고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그를 본다. 그녀의 입에선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아서는 그녀의 체온이 낮아지는 것으로 그녀가 창백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내 제안은, 고민 안 해 봤소?”
“…….”
아서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만나지 못하게 하고 싶어서…… 꽤 애타는 중인데.”
한낮의 가을바람에 신방의 커튼이 흔들린다. 그 사이로 유리 같은 하얀 햇살이 산란했다. 그 속에서, 아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탁. 테일러 로렌슨의 손이 약재 장을 닫았다. 정해진 레시피의 순서대로 약재는 끓거나, 걸러지거나, 태워지거나 하며 유리그릇과 종이 포 사이를 오갔다. 차분한 시선 속에서, 젊은 의사의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줄리어스 일가에서 일하면서 넌 깨끗한 것만 보게 되지는 않을 게다.」
네, 알고 있어요.
「아가씨한테 매일 내려 드리는 약차가 있는데 그거 처방해 드리고.」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하다, 일 잘하고 있다 말씀드리고.」
「할머니 건강에 대해 말씀드리고 이야기 듣고 오면 된다.」
크리스티나 아가씨한테요? 레이나나 후작 부인이 아니고?
「가서 보면 알게 될 게다.」
…….
「검은사슴뿔버섯이랑 화룡나무 껍질, 아타실 열매. 그리고 알루치노 뿌리 태워서 우린 물.」
“…….”
아버지가 일러준 조제법을 떠올린 테일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건 가장 성공적인 유산약으로 알려진 ‘검붉은 물’의 조제법이었다. 대개 이런 종류의 약이 그렇듯, 몸에도 피할 수 없이 무리가 가는 약이었다. 손이 귀한 집안의 귀족 아가씨가 마실 리 없는 약이었다.
「……임기응변 능력과 판단력이 필요할 일들이 있을 게다.」
「내가 너를 시험해 봐도 되겠느냐.」
“…….”
전쟁에 나갔던 남편과 오 년 만에 재회한 아가씨가 급히 유산약을 먹어야 하는 이유. 처음에는 설마하니 아가씨의 부정 따위를 상상했지만……. 일시적으로 독하게 마시는 것이 아닌 매일 희석하여 복용하고 있는 거라면, 검붉은 물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는 유산이 아니라 피임일 것이었다.
“…….”
「줄리어스 일가에서 일하면서 넌 깨끗한 것만 보게 되지는 않을 게다.」
「가끔은 너의 가치관에 용납 안 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의사고, 세상에 의사는 우리뿐이 아니다.」
「네가 거부한다면 결국 너 아닌 누군가가 하게 될 일이야.」
「네가 돕지 않으면 당장 환자들에게는 그게 더 큰 불행일 수 있다.」
“…….”
테일러는 묵묵히 눈앞의 약재들을 후처리한 뒤, 검붉은 물의 독성을 약화시키는 해독환을 조제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물’의 피임 효과를 유지하면서도 그 독성과 몸에 가는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 약이었다.
“…….”
테일러는 이미 그런 약을 여러 번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임기응변 능력과 판단력이 필요할 일들이 있을 게다.」
「가서 보면 알게 될 게다.」
「내가 너를 시험해 봐도 되겠느냐.」
약재가 우러난 물이 종이 포를 거쳐 걸러지는 동안. 말없이 테이블을 짚은 테일러의 눈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많은 부모가 그렇듯. 그의 아버지도 테일러가 또래보다 순진하다고, 세상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자란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역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테일러는 앨빈 로렌슨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있었다. 하녀들은 후작 부인에게 보고될 가능성이 높은 로렌슨 선생보다 테일러를 선호하여 그에게 더 많은 비밀스러운 요청을 하곤 했고 그중에는 ‘검붉은 물’에 대한 다급하고 절망적인 요청도, 몇 번이나 있었다. 줄리어스와 관계없는 다른 가문의 아가씨나 귀부인, 영지의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종류의 비밀 의뢰를 받은 적도 수차례나 있었다. 자연히 그 경과도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어떤 경과는 다행스러웠지만, 어떤 경과는 그렇지 못했다. ‘검붉은 물’은 위험한 약이었다.
「내가 너를 시험해 봐도 되겠느냐.」
“…….”
똑……, 똑. 약재를 냉침한 검은 물이 투명한 유리 플라스크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테일러의 기억은 그보다 조금 더 이전으로 올라갔다.
「……사정이 있어서 후작가에서 특별히 후의를 베풀어 주시기로 하셨다.」
「레이나 아스타린이라는 애.」
「여기부턴 기밀이다.」
조용히 가라앉은 테일러의 시선이 누군가를 위해 구해 온 소식지 속 ‘크리스티나’의 삽화 위에 머물렀다.
* * *
“…….”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듯했다. 아서는 빤히 레이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그대를 시험에 들게 했군.”
“…….”
그리고 아서는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하오. 더 고민해 보시오.”
“…….”
그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순간 레이나가 손을 뻗어 그를 잡았다.
“…….”
새하얘진 손이 그의 소매 끝자락을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옷자락 끄트머리만 간신히 잡은 미약한 힘이었지만 아서는 가만히 잡혀준 채 멈추었다.
“…….”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서는 그녀가 자신을 부른 듯이 대답해 주었다.
“응.”
“…….”
여전히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하지만 아서는 그녀가 자신을 잡아 주었다는 데에 만족했다. 아서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재회했던 개선식 날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서는 싱겁게 웃었다.
“당신이 반지를 낀 건 그날 이후 처음 보는군.”
그리고 슬쩍 자신의 반지 낀 손을 들어 보이며 미소했다.
“나는 내내 끼고 있었는데.”
“…….”
짐짓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녀가 쉬이 결혼반지를 끼기 어려워하는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머뭇거림 끝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상할까 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귀한 물건이니까요…….”
그리고 고개를 떨군 채 그녀는 화장대 쪽을 가리켰다.
“보석함에…… 계속 두고 있었어요.”
알고 있다. 침대 뒤에 세 번 접은 쪽지를 숨겨 둔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화장대의 보석함 안에 결혼반지가 들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다시 침묵이 흘렀다.
“…….”
잠시 후, 레이나가 움직였다. 그녀는 주저하며, 조금 느리게 왼손 손목의 드레스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손목에 레이스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레이나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말했다.
“……대신 저는 이걸 하고 있었어요.”
“…….”
아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그의 소맷자락 끝만 붙든 채 말을 이었다.
“……이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
레이나는 입술을 말아 물더니 괜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듯, 후회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슬며시 소매를 내렸다. 그녀의 소매 속에 다시 손수건이 감추어진다. 아서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끝에 아서가 조용히 말했다.
“반지도 당신한테 준 거요.”
“…….”
레이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시선을 피한다.
“…….”
반지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대신 레이나가 말했다.
“해 주신 말씀은…… 고민하고 있어요.”
아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내일…….”
떨지 않기 위해, 힘주어 드레스를 틀어쥐고. 그녀가 힘겹게 입술을 다시 열었다.
“테일러를 만나 보고, 결정하고 싶은데…….”
체온. 심장 소리. 떨림. 오러가 무의식처럼 그 모든 절박함을 더듬는다.
“안…… 될까요…….”
어려워하면서도 그녀가 기어이 그 말을 쥐어 짜내는 것을 아서는 가만히 응시했다.
“…….”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만나게 하기 싫다고 했지.”
“……!”
레이나가 숨을 멈추기 전에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만나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소.”
그리고 아서는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위로하듯이 그녀의 뺨을 짧게 쓸었다가 손을 떼었다. 전과 달라진 것 없는 가벼운 스킨십으로, 레이나를 향한 아서의 제안과 호의가 여전히 변치 않고 남아 있음을 떠올리게 해 주는 것이었다. 레이나는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마도 그를 상대로 첩자 일을 한 것에 대한 사과일 것이다. 하지만 아서는 왠지, 고백을 거절당한 남자 같은 기분을 느꼈다. * * *
“쪽지 주십시오.”
“…….”
아서는 별 이의 없이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건네었다. 어차피 그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던 거긴 했다. 하지만 영 타이밍과 그림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에 대한 유감과 의심이 가득한 싸늘한 분위기를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
“…….”
트리스탄은 레이나를 완전히 적으로 인식해 버린 모양이었다. 괜히 제가 감싸면 더 반발감만 불러일으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서는 순순히 쪽지를 건네고 그 내용이 트리스탄이 크게 화낼 내용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별 내용이야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지만, 신중하고 충성스러운 트리스탄이 언짢을 만한 내용일 가능성은 없지 않았다. 트리스탄은 쪽지를 받아 들고, 그걸 펼치려다 말고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아서를 바라보았다.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알고 계셨다면서.”
아서는 좀 머쓱하게 웃었다.
“……정리 좀 되면 말하려고 했어.”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조심하고 있어.”
트리스탄이 믿지 않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자신에게 쪽지를 달라고 손을 내민 순간, 트리스탄은 아서가 그녀를 감싸 주려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어쩌면 아서가 그녀에게 일말의 마음을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런 게 아니더라도, 아서 경은 약자에게 너그러운 사람이니 동정심에 그녀를 대충 넘어가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불쌍해서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아서가 그녀에게 무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트리스탄은 더더욱 쉽게 그녀를 보아 넘기지 않을 셈이었다. 트리스탄은 씁쓸하게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걸 펼치려다 말고 다시 울컥한 듯이 아서를 쳐다보았다.
“말해 주시려다가 말 못 하신 거, 더 남은 것 있습니까?”
“지금은 없어.”
“정말 없는 거죠? 저 믿습니다?”
아서가 웃었다.
“그래.”
트리스탄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분노에 찬 눈으로 쪽지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