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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못 만나게 하고 싶어 (50/210)

#50. 못 만나게 하고 싶어202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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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66452624.png“…….”

정말이지 이 여자는 재능 있는 첩자는 못 되었다. 레이나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아 아서는 그냥 모르는 척 그걸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레이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나는 뭔지 보지도 않고 흠칫 뒷걸음질 쳤다.

16549666452629.png“…….”

내 참. 덮어 줄래도. 영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의 태도라 트리스탄 앞에서 뭘 어떻게 해 줄 수도 없었다. 아서가 쓰게 웃었다.

16549666452624.png“……됐어. 알고 있었으니까.”

트리스탄이 뒤에서 묘하게 눈썹을 찡그리며 아서를 쳐다보았다. 아서의 뒤에서 지은 표정이니 아서는 보지 못했지만, 레이나의 눈엔 ‘……뭐라고요?’ 하는 듯한 트리스탄의 싸늘한 표정이 뻔히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나 앞에서 아서가 손을 까닥여 그녀를 재촉했다.

16549666452624.png“손.”

16549666452629.png“……?”

레이나가 그제야 얼떨떨하게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서가 결혼반지를 들고 있었다. 아. 얼굴이 벌게진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겹친 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어 그걸 받아들려고 했다.

16549666452624.png“…….”

아서는 건네주지 않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뒤집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 * * 신방에서 하녀를 부른다는 트리스탄의 말이 전해지자 곧 시중 하녀가 찾아왔다. 브로디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한 뒤 엉망이 된 화장대를 정리해 주고, 귀퉁이가 부러진 귀걸이 진열대 대신 새것을 가져와 거기에 착, 착 아가씨의 장신구들을 다시 걸어 주었다. 바닥에 진주 귀걸이가 엉망으로 떨어져 있는 걸 보고는 흠칫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장갑을 끼고 마른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들어서 삭삭 닦은 다음, 흠집이 없는 걸 확인하고 안도하며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예쁘게 걸어 주었다. 그동안 레이나는 내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16549666452651.png“…….”

브로디는 티 나지 않게 레이나의 안색을 살폈다. 영 표정이 좋지 않은 게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치마폭 위에서 초조한 듯이 꼼지락거리는 레이나의 손에 평소에 그녀가 끼지 않고 있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보고 브로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안심했다. 쟤가 저 스스로 저걸 꼈을 리는 없고. 아서 경이 반지 끼워 준 모양이지? 히히. 그리고 레이나는 그게 너무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고? 헤헤. 어쨌든 표면적으로 여긴 아가씨의 방이었고, 레이나는 ‘크리스티나 아가씨’ 였기에, 결혼반지도, 저 유명한 ‘순례자의 진주 귀걸이’도 전부 레이나의 곁에 있는 상태였다. 레이나는 언감생심 개선식 날 이후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화장대에 고이 모셔 두기만 하는 모양이었지만. 브로디는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16549666452651.png“아가씨, 귀걸이도 끼워 드릴까요?”

하지만 레이나는,

16549666452629.png“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하고 풀이 죽은 채 대답했다. 역시. 브로디는 너무 흐뭇해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를 하며 재빨리 일을 마치고 물러갔다. 아서 경은 레이나랑 둘이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왠지 신이 난 브로디와 어딘지 모르게 굳은 얼굴인 트리스탄이 물러간 후. 둘만 남자 아서는 커프스 링크를 풀며 주머니에 언제 쪽지 따위를 넣었냐는 듯이 말을 돌렸다.

16549666452624.png“의사는 잘 만났소?”

레이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16549666452629.png“……네.”

아서는 그녀의 죄책감 어린 반응을 모르는 척해 주며 겉옷을 벗었다.

16549666452624.png“이마 상처는 다 나았던데. 의사가 굳이 매일 올 필요 있나?”

레이나가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16549666452629.png“……매일 처방해 주시는 약차 때문에요.”

그런가. 몸에 좋은 약차라던 말을 스치듯 기억 저편에서 떠올린 아서는 그녀가 건강한 편은 아니라는 걸 상기했다. 아서가 그녀의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16549666452624.png“로렌슨 선생이 뭐라고 해?”

16549666452629.png“…….”

아서는 이미 리오넬에게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날도 로렌슨 선생이 레이나를 만날 때 리오넬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해 들은 티를 내기보다는 그녀가 말해 주는 걸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16549666452629.png“…….”

그가 묻는 내용이 무엇인지 레이나도 짐작한 듯했다. 레이나는 포갠 손의 위치를 바꾸고 손가락을 감싸 쥐며. 체념한 듯 아래로 시선을 내린 채 짧은 틈을 두고 대답했다.

16549666452629.png“내일…… 출장 나가신다고 하셨어요. 아드님을 대신 보내신대요.”

그녀는 자백하는 죄인처럼 조용히 말했다. 내일 테일러 로렌슨이 온다는 것을.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스스로의 손끝을 내려다보며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16549666452629.png“…….”

알고 있었다는 말이 그나마 가장 빠르게 당황한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는 말 같아 그렇게 말해 준 것이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렘브란트에게는 ‘언제부터 아셨어요?’ 같은 말을 묻기도 했었으면서. 나에게는 그런 소릴 묻지 않는다. 아서는 목덜미를 쓸며 의자에 조용히 등을 기대었다.

16549666452624.png“…….”

쪽지를 들켰으니 차마 면목이 없어 날 보지 못하는 것일 거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지만. 삐딱한 마음은 제멋대로 비약해 버린다. 테일러 로렌슨은커녕 렘브란트보다도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건가. 아서는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쪽지를 들킨 게 그렇게 충격인가.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썼길래 그래. 어차피 알고 있었고 그다지 상관도 없었다.

16549666452629.png“…….”

그보다는 저 체념한 듯한 태도가 신경을 긁었다. 내일 테일러 로렌슨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는 것과. 조금 전까지 그녀가 꽤나 설레며 들떠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를 기다리면서는 보여 준 적 없었던 예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 후에 그녀가 저렇게 풀이 죽었다는 것이. 날아갈 생각에 남몰래 기뻐하던 가녀린 새를 무자비하게 족쇄 채워 새장에 가둔 기분이었다. 아서는 가만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16549666452624.png“…….”

삼십 골드……. 꽤나 갈등하는 것 같기에. 내 제안, 고민 정도는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은 줄리어스와 테일러 로렌슨이라는 건가.

16549666452624.png“…….”

로렌슨 선생이 떠나간 후, 아서는 물어본 적이 있었다.

16549666452624.png「로렌슨 선생이랑 있을 때 편해 보이는군. 주치의와 사이가 좋습니까?」

자신이 그랬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했는지 그녀는 조금 멈칫하고는, 머쓱한 얼굴로 목을 눌렀다.

16549666452629.png「그냥…… 오래 뵈었으니까요. 늘 저를 돌봐 주시고요.」

아서는 그녀를 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16549666452624.png「내가 허락한다면 대대로 모시고 싶다 하니. 고려해 볼까 해서.」

16549666452624.png「오래 지켜본 사람의 의견을 들어 봤으면 싶은데.」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주치의가 언제나 쟁반에 약차와 환을 준비하는 자리를 무심결인 듯 바라보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16549666452629.png「……존경할 만한 분이시고, 저택 사람들에게도 인망이 있으세요. 유능하신 의사 선생님이신 건 말할 것도 없구요.」

16549666452629.png「……일을 맡기신다면 잘 해내실 거예요. 그만한 분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서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16549666452624.png「개인적으로도 좋게 생각하고?」

레이나는 제가 뭐라고 그분을 평가하겠냐는 듯 어색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목덜미를 누르며 머쓱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16549666452629.png「네, 그럼요. 이래저래 감사하기도 하고…….」

16549666452629.png「의지가 되는 좋은 분이세요.」

불편하고 어려워하는 목소리가 아닌, 남몰래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연인의 아버지를 향한 거라면. 그 목소리보다 더 이상적인 감정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16549666452624.png“…….”

아서는 가만히 레이나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내려 빈손을 깍지 꼈다.

1654966653904.png「네가 쉽사리 사람에게 곁을 주는 애가 아닌데.」

1654966653904.png「테일러 로렌슨은 예외라고 들었다.」

1654966653904.png「……너와 각별한 사이인 걸로 알고 있는데……」

1654966653904.png「……로렌슨 선생도 어느 정도 알게 된 마당이고……」

16549666452624.png“…….”

솔직히 그런 저열한 생각도 들었다. 왜 로렌슨 선생은 ‘레이나’를 반대하지 않을까. 하나뿐인 아들의 상대인데. 그 정도 집안에. 대를 이은 의사에. 트리스탄을 통해 조사한 바로는 얼마든지 귀족도 만날 수 있을, 부정할 수 없는 상류 계급이던데. 그녀가 매일 내 밤 시중을 든다는 그의 착각을 내가 부정하지 않았는데도. 왜. 반대하지 않지? 아직 결혼하진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레이나는 계속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오러가 그녀의 초조한 손과, 목덜미와, 움츠러든 어깨를 탐색한다.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닌데도 그녀의 떨리는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보게 된다. 뭔가 보이기라도 할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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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바라는 건 돈일까? 아니면 그의 계급일까. 혹은, 당신에게 안정감을 주는 좋은 가족. 아니면 정말로 그 사람을. 툭. 레이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서가 그녀 옆에 조그만 비단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레이나의 시선이 거기 닿았다. 아서가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16549666452624.png“후작 부인이 전해 달라 했다더군. 당신에게 매주 주는 용돈이라고.”

16549666452629.png“…….”

내용물은 다섯 개의 금화였다. 툭. 그리고 아서는 그 옆에 더 무게가 있는 공단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16549666452624.png“이건 그냥 내가 주는 품위 유지비.”

16549666452629.png“…….”

내용물은 서른 개의 금화였다.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16549666452624.png“…….”

갈등하는 눈일까? 혹은 죄책감이 어린 눈일까. 아니면 돈으로 저를 사겠다는 사람에게 느끼는 모멸감일까. 차라리 당신 목적이 돈이었으면 간단할 텐데. 아서는 이내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16549666452624.png“이 돈이 큰 무례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16549666452629.png“…….”

그가 가만히 말을 이었다.

16549666452624.png“당신에게 필요한 걸 당신이 직접 말해 주면 좋겠지만. 말해 주기 전에는 난 알 수 없으니까.”

16549666452629.png“…….”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아서는 아무 표정 없이 그냥 빈손을 깍지 끼고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 놓인 두 개의 금화 꾸러미. 레이나는 어떤 것도 택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 있다. 누구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16549666452629.png“…….”

열린 창문을 통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와 평화로운 새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그녀의 말을 기다리다가. 아서가 입을 열었다.

16549666452624.png“꼭 만나야 해?”

레이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16549666452629.png“……네?”

아서가 가만히 그의 이름을 읊었다.

16549666452624.png“테일러 로렌슨.”

쿵. 그녀의 심장이 떨어진다. 아서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16549666452624.png“못 만나게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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