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두 번째 첩보2022.02.17.
【 ― 아서 경은 정어리도 편식합니다. 】 레이나는 영 꺼림칙한 얼굴로 제가 쓴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
후작 부인이 원하는 게 정말 이게 맞을까? 뭔가 이상했지만……. 흡족해하셨다니…… 나쁘지는 않은 거라고 믿어도 되는 거겠지? 후작 부인이 그녀가 전달한 쪽지에 화를 내며 할머니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레이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레이나는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 두 분께서 몹시 흡족해하셨습니다. 】 【 후작님께서 특히 ‘편식’에 대해 알게 되셔서 무척 기뻐하셨어요. 】
“…….”
영문을 모르겠네. 후작 부인은 아서 경이 싫어하는 요리를 식탁에 올려 경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건가? 겨우 그런 용도로 하녀한테 주급을 5골드씩이나 준다니……. 돈 있는 사람들의 심리란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 황태자 전하를 만난 것에 대해선 논의 중이니 나중에 말씀 있으실 거예요. 】 【 밖에 나돌아 다니지 말고 방에만 있어요. 】 ……모르겠다. 시키는 대로나 하면 되겠지. 레이나는 멍한 얼굴로 자기가 쓴 쪽지를 팔랑팔랑 흔들어 잉크를 말렸다. 어쨌든 약속대로 내일은 테일러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신다니……. 레이나야 그저 다행이구나 하면 되는 일이긴 했다. 처음에 후작 부인에게 아서 경의 약점을 알아내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복잡한 심경으로 마음 졸였던 걸 생각하면 차라리 안심이 되는 결과이기도 했고. 사실 처음 그 명령을 받았을 땐, 훨씬 위험한 일이라고 지레짐작했었으니까…….
“…….”
왠지 좀 머쓱하기도 했다. ……나 너무 음모론 같은 거에 심취해 있었나?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봐. 의외로 ‘아서 경의 약점’을 요구한 후작 부인의 의도가 그렇게 위험하거나 음습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냥…… 후작님을 망신 주고,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는 아서 경에게 싫어하는 요리를 좀 보내는 정도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그래도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긴. 나한테 무슨 대단한 첩보를 기대했겠어. 자의식 과잉이다. 이 쪽지를 전달하고 나면 정어리 푸딩 따위가 식탁에 올라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아서 경한테 그 이상의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레이나는 솔직히 꽤 안도했다. 덕분에 레이나는 조금이나마 덜 무거운 마음으로 테일러를 만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
여기서 만나게 되겠지? 로렌슨 선생님 대신 날 보러 오는 거라면. 레이나는 거울에 비친 신방을 바라보았다. 넓고 고급스러운 침실과 그 안의 자신이 새삼 낯설었다. 레이나는 슬그머니 쪽지를 두고 의자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화장대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살짝살짝 몸을 돌려가면서.
“…….”
크리스티나 아가씨의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무척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안목이 높은 데다 까다롭고, 무엇보다 돈이 무척 많은 크리스티나 아가씨는 언제나 금전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의 드레스들만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
테일러. 기분 되게 이상하겠다. 늘 하녀복만 입고 있던 애가, 세상에서 제일 비싼 드레스를 입고 이런 방에서 아가씨 행세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황당하겠지? 나도 이 방에서 드레스를 입은 채로 테일러를 보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다.
“…….”
아가씨 행세……. 레이나는 거울 앞에 선 채, 무의식적으로 아가씨의 레이디다운 자태를 슬쩍 흉내 내 보았다. 그리고 황급히 그만두었다.
“…….”
그리고 이번엔 조금 더 조심스럽게. 황태자 전하 앞에서 아가씨인 척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러니까, 귀족 아가씨로서 예를 표하며 인사 올렸던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재연해 보았다. 무릎 굽히며, 치마 살짝. 그때 너무 경황없이 허둥지둥했던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보였을지 어땠을지를 한 번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아닌가. 아가씨는 이렇게 하던데……. 레이나는 거울을 보며 이번에는 아가씨의 도도하고 귀족적인 인사를 흉내 내 보았다. 목을 곧게 하고 허리를 편 채 드레스 자락은 한 손으로만 들어 올리며, 살짝 몸을 튼 채, 도도하고 우아한 표정으로. 무릎을 굽히고 시선을 내리며 인사…….
“…….”
레이나는 거울을 보며 어색하게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곤 흉내를 관두었다. 그리고 머쓱함에 뺨을 긁었다.
“…….”
테일러는 대충 다…… 알고 오는 거려나. ……혹시라도 테일러가 당황해서 날 쳐다보거나,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다거나 하진 않겠지? 그럼 나도 솔직히 좀 당황스러울 것 같다.
“…….”
테일러 생각을 하던 레이나는 조금 다른 의미의 근심이 뻗어 나가려 하는 것을 겸연쩍어하며 고개 저어 떨쳐냈다. ……옛날이야기지. 전부. 이것도 다 자의식 과잉이다. 레이나는 도로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쪽지를 들어 올렸다.
“…….”
으음……. 그런데……. 의사를 만날 때는 항상 아서 경의 기사님이 자리를 지키지 않나……? 지금의 내가, 아가씨의 신방에서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테일러한테 ‘레이나의 할머니’ 이야기를 자세히 물어봐도 되는 건가? 기사님이 계실 때, 철저히 크리스티나 아가씨로 있으라던 후작 부인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있는 모습을 테일러한테 보이면 안 될 것 같은데……. ……역시 테일러한테도 쪽지를 적어서 전달해야 하나?
“…….”
고민이 되어 레이나는 쪽지 끝을 만지작거렸다. 쪽지는 조그맸다. 할머니에 대해 듣고 싶은 게 많은데……. 쪽지만으로 충분히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로렌슨 선생님한테 전달하는 쪽지처럼 할 말이 짧지 않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의사가 아니어서, 진단을 위해 의사가 뭘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는걸. 얼마 전 몸살을 앓았을 때, 명의인 로렌슨 선생님이 이것저것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물어보며 몸 상태를 진단해 주셨던 걸 떠올리고 레이나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의학적 지식은 없었지만, 레이나도 테일러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며 알게 된 것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때론 질병과 상관없어 보이는 의사의 질문들이 생각보다 진단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
그러니까, 테일러에게 필요한 정보가 뭔지 알아야 제대로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아무래도 후작 부인이 했던 명령이 마음에 걸렸다.
「실수로라도 하녀라는 걸 드러내는 말을 하지 않게 조심하고.」
「저택 안에 눈과 귀가 많다는 걸 명심해라.」
“…….”
레이나도 알고 있었다. 저택에는 귀가 많았다. 크리스티나 아가씨 행세를 하고 있는 내가 테일러에게 ‘레이나’로서 이런저런 질문을 잔뜩 하고 있는 걸 후작 부인이나 어디 다른 방문자가 우연히 듣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로 다 끝장나는 대참사였다. 렘브란트 경 때처럼 운이 좋길 바랄 순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에게 이 상황을 들켰고, 아슬아슬한 상황이라는 걸 레이나도 자각하고 있었다. 몇 번 운이 좋게 넘어갔다고 방심하고 풀어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할머니의 안위를 생각하며 레이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
그래도 할머니를 생각하니 솔직히 좀 기분이 좋아졌다. 할머니한테 상주 의사가 붙어 있다. 그것도 줄리어스의 젊은 주치의, 테일러 로렌슨이. 할머니가 귀부인처럼 대접받고 계신 것 같아서 레이나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레이나는 너무 들떠 보이지 않으려고 거울 속에 보이는 상기된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식혔다. 너무 들뜨지 말자. 어쨌든……. 아서 경의 정보를 팔아넘기고 받은 호의니까. 게다가 난 조만간 줄리어스의 배신자가 될지도 모른다. 태평하게 기뻐할 때가 아냐. 양심 챙기자, 레이나. 정신 바짝 차리고.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자. 테일러와 대화를 나누면서, 상황 파악하고. 할머니에 대해 충분히 물어보고. 그리고……. 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그거에 대한 대비도.
“…….”
생각할수록 레이나는 욕심을 부리고 싶어졌다. 할머니에게 테일러도 계속 보내 드리고 싶었고, 자신의 편에 서면 보호해 주겠다는 아서 경의 제안도 받아들이고 싶었다. 아서 경에게 테일러를 함께 매수해 줄 수 없는지 물어보고 싶다는 것이 지금 레이나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뻔뻔하면서도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서 경이 그렇게 해 준다고 해도, 테일러에게 그럴 의향이 있는지가 문제였다. 테일러는 이곳이 좋다고 했었다. 재능 있는 의사인데 독립 안 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언제나, 자기는 여기 사람들이 익숙하고 좋다고, 정도 들었다고. 아마도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며 웃었었다. 아서 경이 테일러를 매수할 수 있을까? 로렌슨 선생님은 좋은 분이지만, 오랫동안 함께한 후작님 편에서 의리를 지키고 계신 분이기도 했다. 테일러도 비슷할 가능성은 높아 보였다.
“……후우.”
결국 아서 경에게, 그리고 테일러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테일러랑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마음이 흔들려 섣불리 판단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하지 않아야 할 텐데……. 내일의 만남이 그 확신을 주었으면. 레이나는 내일 테일러에게 물어볼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았다. 할머니는 잘 지내시는지. 식사는 잘 하시는지. 가끔 열이 오르는 건 요새는 괜찮으신지. 그리고 기억을 자꾸만 깜박깜박하시는 것. 악화되지는 않으셨는지. 할머니가 오 년 전에 얻으신 화상 염증이 아직까지 낫지 않는 건 왜 그런지. 테일러가 보기에는 어떤지. 나을 방법이 있을지……. 레이나는 촛불에 로렌슨 선생님의 쪽지를 태워 없앤 후 화장대 앞에 앉아 자신이 쓴 쪽지를 작게 접었다.
“…….”
그래도 이 쪽지는…… 좀 나중에 전달할까? 아서 경이 식탁에서 매일같이 싫어하는 요리를 보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나도 정어리는 싫다. 똑똑.
“네.”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에 레이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접은 쪽지를 황급히 움켜쥐고 급하게 일어나느라 레이나는 화장대에 세워져 있는 귀걸이 진열대를 강하게 밀치고 말았다.
“!”
와장창 소리가 나며 요란하게 넘어진 귀걸이 진열대가 화장대에 놓인 중요한 장신구 몇 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레이나는 깜짝 놀라 바닥에 떨어진 진주 귀걸이와 저쪽으로 굴러가는 결혼반지를 바라보았다.
“……!”
큰소리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아서가 먼저 들어서고, 그 뒤로 놀란 트리스탄이 따라 들어왔다. 데구르르. 결혼반지가 빠른 속도로 바닥을 굴러갔다. 아서가 슬쩍 발을 틀어 제 쪽으로 굴러오는 결혼반지를 구두 안쪽으로 멈춰 세웠다. 거의 동시에 트리스탄이 옆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고갯짓을 해 시중 하녀를 불러오라 지시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
몸을 숙인 아서가 구두 앞에 멈춘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가와서 레이나에게 물었다.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접은 첩보 쪽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
“…….”
아서와 레이나의 시선이 동시에 거기에 닿았다.
“……?”
그리고 아서의 뒤를 따라 들어온 트리스탄이 그걸 집어 들었다. 레이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서가 이마를 짚었다.
“…….”
“…….”
어색한 침묵속에서 아서가 트리스탄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
트리스탄이 아서에게 그걸 건네주었다. 창백해진 레이나는 망연자실하여 아서에게 넘어가는 쪽지를 쳐다보았다. 망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이 세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