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위험한 여자2022.02.13.
“아서 경.”
“…….”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던 아서가 눈을 떴다. 흰 잠옷 원피스 차림의 레이나가 놀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 뒤에 있던 머리카락이 앞으로 미끄러져 쏟아졌다. 레이나가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조금 당황하여 물어보았다.
“여기서 주무셨어요?”
조용히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올려다보던 아서가 팔짱을 풀며 몸을 일으켰다.
“…….”
평소보다 살짝 깊게 들이쉬는 숨. 얕게 뜬 눈과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는 손이 그를 평소보다 나른해 보이게 만들었다. 아서가 피로한 듯 미소를 지으며 빙긋 입매를 올렸다.
“일찍 깼소? 왜, 좀 더 자지.”
레이나가 잠든 아서를 발견할 정도로 일찍 일어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서가 늦잠을 잔 것도 처음 있는 일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왠지 옆자리가 허전해 잠이 깨었다고 말하기는 쑥스러워 레이나는 어색하게 목덜미를 눌렀다.
“전 충분히 잤어요. 왜 불편하게 여기서 주무세요.”
아서가 묵묵히 웃었다.
“그냥.”
이상한 대답이었다. 레이나의 얼굴에 설마하니 스스로에 대한 의혹이 떠올랐다.
……내가 아서 경을 발로 차거나 코를 골기라도 했나?
레이나는 아서가 일어서며 몸에서 걷어 낸 시트를 받아들며 물었다.
“……침대에 잠깐 누우실래요?”
“아니, 괜찮아. 깨워 줘서 고맙소. 아침 일정이 있어.”
목소리가 평소보다 잠겨 있었다. 피로한 건지, 아니면 잠에서 막 깬 그를 처음 봐서 그런 건지. 그에게선 어딘지 평소보다 묵직하고 짙은, 나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레이나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뒤로 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몸을 돌려 그가 덮고 자던 시트를 침대에 정리해 놓고, 그가 소파에서 잔 이유를 무척 신경 쓰여 하던 레이나는 아서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몸을 돌리며 물었다.
“경, 제가 혹시 잠버릇이…….”
“…….”
레이나는 말을 하다 말고 굳어 버렸다. 그가 아직 옷을 다 갖춰 입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의 벗은 몸을 바라보았다.
넓은 어깨와, 큰 키. 자신의 몸과는 전혀 구조가 다른, 골격이 크고 근육이 꽉 잡힌 가슴 아래로 탄탄한 복근이 이어졌다.
“…….”
어딘지 얼이 빠진 기분으로, 이른 아침의 햇살을 받아 빛나는 남자의 벗은 몸을 멍하니 눈에 담다 말고. 레이나는 기겁해 몸을 돌렸다.
“죄죄죄죄송합니다.”
“…….”
잠시 침묵하던 아서가 뒤에서 피식 웃었다.
“……미안. 오늘 입어야 할 걸 밖에 둔 게 지금 생각나서.”
“…….”
뒤에서 아서가 소파 쪽으로 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가 의자에 걸어 두었던 제복을 집어 드는 소리가 났다. 사락, 사락. 다시 그가 멀어져 가며 옷이 피부를 스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런 저 자신이 황당하게 느껴져서 흠칫 얼굴을 붉혔다. 침을 왜 삼켜, 침을? 언제나처럼 아서 경이 완벽한 제복 차림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고개를 든 건데. 갑작스럽게 벗은 몸을 봐서 당황한 것뿐이다. ……상체만 벗은 건데 뭐. 바지는 입고 있었다구. 하지만 너무…… 너무 오래 쳐다봤어. 레이나가 스스로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
실수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후에 너무 넋을 놓고 그 사람 몸을 계속 쳐다보지 않았나.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서가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났다.
“……그대는 딱히 곤란한 잠버릇 없소. 그냥 내가 실수할까 봐 신경 쓰여서.”
레이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한참 생각하다가 간신히 자기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경이 실수할까 봐 신경 쓰여서라고? 잠버릇? 그가 신경 쓸 건 하나도 없었다. 아서는 항상 곱게, 조용히, 바른 자세로 잤으니까. 레이나는 대답했다.
“겨겨경도 자자잠버릇 없으세요.”
“…….”
나 대체 뭐라니? 사락 사락 옷 갈아입는 소리 사이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느른하고 기분 좋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미안. 내가 그대를 놀라게 했군.”
* * * 트리스탄이 심란한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걸 다 보여 드리셨습니까?”
오전 일정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아서에게 던져진 첫 번째 질문이었다. 아서가 다트를 손 안에서 굴리며 담담하게 답했다.
“응. 아예 주고 왔는데 펼쳐 보지도 않더군. 만져 볼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야.”
그리고 낮게 웃었다.
“간이 작아, 그 여자. 그래도 언젠간 궁금해지면 열어 보겠지.”
“…….”
트리스탄이 착잡함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어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서가 웃었다.
“괜찮아. 어제 봤잖아.”
“…….”
그랬다. 지난밤, 트리스탄은 아서가 얼마나 완벽하게 서류를 외우고 있는지를 보았다. 휙. 아서가 다트를 던졌다. 깔끔하게 날아간 다트는 벽에 걸려 있는 다트판의 트리플 20에 명중했다. 이미 트리플 20만 네 개째였다.
“…….”
트리스탄은 아직도 아서가 시력을 잃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두 달 동안 아무도 몰랐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대체 그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있는 걸까. 기밀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기에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트리스탄은 어렴풋이 아서가 초감각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예민한 청각 정도로 생각했지, 그것이 시각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다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트리스탄은 어젯밤 아서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나는 시각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감각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된 것은 조금 곤란하고, ‘크리스티나’나 후작이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으니, 앞으로 자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다며. 충격과 당혹으로 말을 잃은 트리스탄의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금은 갑작스럽게 알게 돼 자네도 혼란스러울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 했다. 다만, 가기 전에 이 서류의 내용이 이것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며, 자신이 읽어 보일 테니 틀렸거나 부자연스러운 곳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혼인 계약서를 비롯해 아서의 재산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서류들을 트리스탄 앞에 내놓았다. 그리고 아서는 그것을 멀쩡하게 읽어 보였다. 눈이 멀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류를 군데군데 짚기까지 하며 정확하게. 트리스탄이 아서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하자, 아서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한 듯이 웃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외웠다 했다. 서류의 두께와 종이의 재질, 몇 페이지짜리 서류인지 따위로, 각각의 서류가 어디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고.
“…….”
트리스탄은 묵묵히 아서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시력을 잃을 가능성에 대비했다. 그렇다는 건 이게 예기치 못한 사고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이 눈이 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견한 불행.
“저 외에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주어는 없었지만 아서는 답했다.
“카일 황태자가 알고 있다.”
휙. 아서가 다시 다트를 던졌다. 다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다시 트리플 20에 명중했다.
“…….”
트리스탄은 어제 물어보지 못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마지막 전투가 원인입니까?”
아서가 다트를 만지작거렸다.
“‘원인’은 아니지만. 시기는 그때가 맞다.”
“그럼 원인을 여쭤봐도 됩니까?”
아서는 담담하게 말했다.
“지병 때문이다. 무리하면 시력을 잃게 되는 문제가 있어.”
“어느 정도의 ‘무리’입니까?”
아서가 짧은 틈을 두고 답했다.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정도의 무리. 목숨이 걸린 정도의 상황이 아니면 괜찮다.”
마지막 전투 때문이 맞구나. 트리스탄은 얼굴을 굳혔다. 트리스탄은 감정적 동요를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서는 가볍게 웃었다.
“거기까지만.”
문제는 원인이 아니라, 타개책이라는 뜻이었다. 탁. 다시 아서가 가볍게 던진 다트가 트리플 20에 명중했다.
“…….”
트리스탄은 마음을 추슬렀다. 아서가 더 빨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 화가 났지만,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감상적인 부관이 아니라 냉정하고 도움이 되는 부관이었다.
“치료의 여지가 있습니까?”
“아니.”
담담한 대답에 트리스탄은 이를 악물었다. 또 다른 다트가 트리플 20에 깔끔하게 명중했다. 트리스탄은 마음을 다스리며 뒤이어 물었다.
“지금보다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아서는 새 다트를 집어 들며 답했다.
“다시 무리를 하면 악화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괜찮을 거야.”
탁. 여덟 번째 다트가 트리플 19에 명중했다. 트리스탄은 아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트리플 20에만 일곱 개, 트리플 19에 한 개의 다트가 꽂힌 다트판을 바라보았다.
“…….”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눈이 멀었다고? 눈이 보이는 사람도 저렇겐 못 할 텐데.
“…….”
전부터 아서는 보지도 않고 새를 쏘아 떨어뜨리는 걸로 유명하긴 했다. 근데 진짜 안 보고 맞히는 거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아서가 다시 새 다트를 집었다. 트리스탄은 한숨을 쉬며 완벽하게 그가 원하는 점수를 만들어 가는 다트판을 바라보았다.
“……다트 쇼는 그만하셔도 됩니다. 지장 없으신 거, 잘 알았으니까요.”
아서가 조용히 입매를 올리며 말했다.
“잔소리 들을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생색낼게.”
탁. 아홉 번째 다트가 더블 12에 명중했다. 정확하게 501점. 퍼펙트 나인*이었다. * * *
아서가 분위기를 바꾸며 물었다.
“아내에 대한 추가 조사는?”
트리스탄이 한 템포를 쉬고 답했다.
“루칸과 제가 평민의 방법으로, 케이 경과 리오넬 경이 귀족의 방법으로 진행 중입니다. 소득이 있으면 보고드리겠습니다.”
아서가 말했다.
“그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지 쪽으로 포커스 맞춰 봐.”
트리스탄이 아서를 바라보았다.
“무슨 단서가 있으셨습니까?”
아서가 피로한 듯이 눈을 문지르며 웃었다.
“아니.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다시 그녀가 아서의 재산 관련 서류를 봤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아서가 그녀를 포섭하려는 이유를 납득하긴 했지만. 굳이 서류까지 보여 주는 건 위험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그 여자는 아서 경과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나.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트리스탄은 다시 그에게 충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크리스티나 줄리어스’보다 딱히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포섭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첩자입니다.”
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었다. * * *
“…….”
레이나는 주치의 로렌슨 선생님이 아침 진료 후 남겨 두고 간 새로운 쪽지를 펼쳐 보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 【 두 분께서 몹시 흡족해하셨습니다. 】 【 후작님께서 특히 ‘편식’에 대해 알게 되셔서 무척 기뻐하셨어요. 】
“……?”
레이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그다음 쪽지에 적었다. 【 ― 아서 경은 정어리도 편식합니다. 】 ――――― *퍼펙트 나인: 501점을 깎아 정확하게 0점으로 만드는 ‘제로원 다트’에서 가장 좋은 기록. 9개의 다트만으로 단 한 번의 미스도 없이 정확하게 501점을 만든 것을 말한다. 점수가 가장 높은 트리플 20을 여러 번, 다른 스코어의 트리플과 더블을 섞어 501점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