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 번뇌의 밤 (47/210)

#47. 번뇌의 밤2022.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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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 경은 대단한 협상가가 틀림없었다. 그런 도박은 너무 무모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포기한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니까.

16549665799391.png“…….”

레이나는 멍하니 욕조 속에 처박힌 채, 속으로 아서에게 할 말들을 가정해 보기 시작했다. 아서 경. 제가 당신 곁에서 오래 일하지 못하더라도…… 혹시 말씀하신 돈을…… 얼마 정도 보장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 주급 30골드도 엄청 과분한 거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 일이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고민이 좀 되어서요. 어쨌든 제게는 생계니까…… 오래 일하지 못하면 저는 곤란해서……. 저는 보장된 급여가 필요하거든요. 그리고 사실 제가 한동안 의사가 필요한데요……. 그리고 평생직장도 필요하거든요…….

16549665799391.png“후우…….”

레이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뭐 이렇게 필요한 게 많지? 레이나는 스르륵 미끄러지듯 몸을 낮추어 욕조 물속에 잠수했다.

16549665799391.png‘아서 경…….’

16549665799391.png‘제가 어차피 당신 곁에 계속 있을 수가 없잖아요.’

16549665799391.png‘혹시 절 여기 아닌 다른 데서라도 일할 수 있도록 소개해 주실 의향이 있으세요……?’

16549665799391.png‘제가 많이는 안 바라고…….’

16549665799391.png‘할머니 살아 계실 때까지만 딱 주급 30골드 주시고…….’

16549665799391.png‘그다음엔 평생 10실버만 주셔도 되거든요.’

16549665799391.png‘……아무래도 그건 아서 경께서 생각한 고용 기간에 비해 너무 길까요?’

16549665799391.png“…….”

16549665799391.png‘저를 평생 고용해 주실 수는…… 없겠죠……?’

16549665799391.png‘아무래도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저를 보기 불편해하실 테니까…….’

16549665799391.png“…….”

결심은 아직 서지 않았지만, 아마 뭔가를 결심한다 해도 다음 주에 일단 테일러를 만나 본 다음이겠지만. 생각을 정리할 겸 레이나는 말이라도 이래저래 다듬어 보고 있었다. 가능할 것 같은가, 아닌가. 조금 염치가 없게 들리는가, 많이 염치가 없게 들리는가. 레이나는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말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이렇게도 고쳐 보고 저렇게도 고쳐 보고……. 하지만 어떻게 고쳐도 황당하고 염치없게 들리긴 마찬가지였다. 레이나는 물 위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16549665799391.png“후우…….”

눈앞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16549665799391.png“…….”

……아서 경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면 다시는 줄리어스 저택에서 일할 수 없겠지. 다른 일자리를 소개받는대도 어디든 줄리어스만한 급료는 못 받을 거다. 결국 아서 경이 주는 돈에 의존하게 될 거야.

16549665799391.png“…….”

아서 경이 돈이 엄청 많다는 것도 알았고, 그런 급료를 충분히 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주급 30골드를 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서 경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해 주진 못할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설령 줄리어스를 배신하고 그의 편에 서는 게 지금 당장은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되더라도, 과연 그 가치가 몇 년 후에도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일까 하면. 그건 아무래도 아닐 것 같았다. 결국 어느 날엔가는 ‘나한테 사기 친 하녀인데 내가 왜 몇 년째 돈까지 주고 있는 거지?’하고 생각하게 될 날이 올 것만 같았다. 그런 건 싫었다.

16549665799391.png“…….”

후우……. 레이나는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는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기를 훔쳤다. 그를 속였던 가짜 신부였던 주제에, 그의 돈만 초조하게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싶지 않았다. 레이나는 욕조 안에 앉은 채 거울을 쳐다보았다.

16549665799391.png“…….”

……아서 경은 젖어 있으니까 퇴폐미가 흐르면서도 청량하게 보였는데 나는 그냥 비 맞은 생쥐 같다. 처량맞아 보여. 레이나는 물끄러미 거울을 보다 다 식어 빠진 욕조에서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몸을 가리며 욕조 안에 다시 주저앉았다.

16549665799391.png“브브브브로디?”

접은 수건과 목욕 바구니를 들고 막 들어오던 브로디가 살그머니 미소 짓더니 말했다.

16549665855648.png“아가씨. 벌써 나오세요? 목욕하신다는 거 듣고 입욕제 풀어 드리려고 가져왔는데…….”

옆에는 며칠만에 보는 마리나까지 와 있었다. 마리나가 몸을 낮추어 욕조에 살짝 손을 담그더니 말했다.

16549665855653.png“……어머. 물이 식었네. 따뜻한 물도 보충해야겠다.”

16549665799391.png“……??”

레이나는 얼이 빠져 그 둘을 쳐다보았다. 브로디가 입욕제를 풀고 마리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부어 주었다. 그리고 향기로운 장미 꽃잎에 금가루까지 띄워 주었다.

16549665799391.png“??”

레이나는 멍하니 두 하녀들이 움직이는 걸 쳐다보았다. · · · ‘크리스티나’와 ‘레이나’의 일에 얽히게 된 이후 마리나와 브로디는 직속 시녀 명목으로 이인실을 배정받아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마도 입단속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었다. 그곳에서 마리나와 브로디는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온 참이었다. 본인들이 처해 있는 이 애매하고 난감한 상황에 대해 그들에게도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로디가 먼저 야심 차게 자신의 추리를 펼쳤다. 둘뿐인 방인데도 잔뜩 목소리를 낮춘 채였다.

16549665855648.png“……레이나가 사실 후작님의 숨겨둔 딸이었던 거야.”

16549665855653.png“…….”

마리나가 멍하니 브로디를 쳐다보았다. 브로디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16549665855648.png“그러고 보니 레이나 걔,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꽤 닮았잖아.”

마리나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부정했다.

16549665855653.png“……그건 내가 아가씨랑 비슷하게 보이게 화장했기 때문에 그런 거고. 메이크업하지 않았을 땐 그렇게까지 닮은 얼굴은 아니야.”

이번엔 마리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16549665855653.png“내 생각엔…… 이건 완전히 사고인 거 같아.”

그녀가 자신의 추리를 펼쳤다.

16549665855653.png“오 년 전에 아가씨랑 아서 경 혼인 결정되고 그 결혼 안 한다, 못 한다 난리였잖아. 아가씨가 그렇게 결혼 거부하니까, 레이나를 아가씨인 척 바꿔치기 해서 대신 들여보낸 거지.”

마리나가 말을 이었다.

16549665855653.png“근데 지금 아서 경이 돌아와서 그걸 알게 됐고, 후작님네랑 신경전을 벌이는 중인 거야. 감히 나한테 사기를 쳤어?! 하고.”

이번엔 브로디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얼굴로 부정했다.

16549665855648.png“에이. 그럼 후작님네가 레이나를 순순히 개선식에 내보냈겠어? 그 지경이 되기 전에 애초에 걔를 어디에 숨겼겠지.”

브로디가 다시 주장했다.

16549665855648.png“사생아라니까? 결혼 계약하면서, 황실도 사생아니까 나도 사생아를 내보내겠다. 하고 후작님이 이렇게 딱!”

마리나가 반박했다.

16549665855653.png“그럼 ‘크리스티나 아가씨’와의 정략혼이라고 일파만파 소문이 나기 전에 후작님 쪽에서 해결을 했겠지. 크리스티나 아가씨 아니고 사실 다른 딸이랑 결혼했다고.”

브로디는 곧바로 답했다.

16549665855648.png“말할 타이밍을 놓친 거지! 그러니까 후작님은 고민 끝에 이렇게 된 거 아예 사생아랑 적장녀를 바꿔치기 해야겠다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브로디의 목소리가 더욱 속삭이듯 낮아졌다.

16549665855648.png“아서 경이 너무 거물이 되고 나니까 사실 결혼시킨 게 적장녀가 아니라 사생아였다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잖아. 다들 크리스티나 아가씨로 알고 있고, 후작님은 선제후까지 됐는데. 사생아가 있다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고.”

마리나가 혼란에 빠졌다. 후작님 딸? 레이나가?

16549665855653.png“에이 설마……. 후작님 딸이면, 그동안 그렇게 하녀들이랑 똑같이 구르면서 살았던 게 말이 안 되지 않아?”

브로디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16549665855648.png“그건 후작님이 자기 딸을 아까워하거나 예뻐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말이 되는 거지. 솔직히 후작님, 적장녀인 크리스티나 아가씨도 그렇게 애지중지 안 하잖아? 오 년 전에도, 싫다는 딸한테 그런 결혼을 밀어붙인 걸 봐! 후작님한텐 가문뿐이라구. 마님이랑 달라. 자식은 수단이지!”

어……. 왠지 점점 설득되는데. 맞는 말이 섞이기 시작하자 마리나의 표정이 흔들렸다. 브로디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65855648.png“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후작님은 마님이랑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버리고 레이나를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은 거야. 황실이 아서 경한테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버려뒀던 사생아한테 투자해 보기로 결정하신 거지.”

마리나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곱씹었다.

16549665855653.png“……그러니까, 바꿔치기가 있긴 있었던 건데…….”

16549665855648.png“그냥 하녀가 아니라 사생아로 바꿔치기한 거다! 이거지. 그러니까 이대로 원상 복귀가 안 될 수도 있다구!”

주먹을 입가에 댄 마리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들을수록 그럴싸하게 들려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마리나의 머릿속에선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또 다른 가능성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그 말이 진짜고, 혹시라도 레이나가 정말로 아서 경의 신부가 된다면……. 테일러는? 브로디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65855648.png“이대로 레이나가 크리스티나 아가씨 자리를 차지하고 영영 크리스티나 아가씨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니까? 후작님은 어차피 걔도 자기 딸이니까 사이도 안 좋은 마님이랑 크리스티나 아가씨 대신 순순히 말 잘 듣는 레이나를 밀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브로디가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16549665855648.png“게다가 아서 경, 솔직히 레이나 좀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16549665855653.png“…….”

마리나는 설득되기 시작했다. 브로디의 말이 가능성 있게 들렸다. 브로디가 다시 말했다.

16549665855648.png“우리 줄 잘 서야 해. 솔직히 모시는 아가씨로서 크리스티나 아가씨보단 레이나가 백배 낫다? 너도 그건 인정하지?”

그 애가 아서 경과 다른 기사님 앞에서 자기를 감싸 주었다더니. 브로디는 레이나 생각을 하고 마음이 훈훈해졌는지 살짝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16549665855653.png“…….”

반면 재떨이가 날아다니는 크리스티나 아가씨 시중을 생각하며 마리나는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브로디가 턱을 괴며 미소 지었다.

16549665855648.png“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레이나한테 굳이 지금 미움을 살 이유는 없잖아. 눈치껏 양쪽에 다 잘하면 되지.”

마리나는 눈을 굴렸다. 맞는 말이었다. 아서 경이 씻고 나와서 레이나가 목욕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 · · 레이나는 갑자기 도와주겠다고 하는 두 하녀 애들을 당황하여 바라보았다. 브로디는 원래도 상냥한 편이었지만. 마리나는 약간 어색해하면서도 레이나에게 조심스럽고 친절하게 대해 주기 시작했다. 사양하는 것도 통하지 않아 결국 레이나는 강제로 목욕 도움을 받고, 아가씨의 풀코스 마사지까지 당했다. 알몸을 생판 남에게 맡겨본 적 없는 레이나에게는 당황스러운 경험이었지만, 향기 좋은 오일을 바르고 온몸을 주물러 주는 재벌가의 귀족 아가씨가 받는 마사지는 신세계였다. 그건 심란해하고 있던 레이나의 긴장을 풀어 주면서도 체력을 쪽 빠지게 만들었다. 온몸을 노곤하게 풀린 레이나는 비몽사몽간에 향기를 폴폴 풍기면서 침실로 돌아갔다. 브로디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욕실을 정리하고 오일과 입욕제를 챙겨 마리나와 함께 돌아갔다. 브로디가 야심 차게 발라준 자스민 오일은 몸을 특별히 나른하게 풀어 주는 걸로 유명한 명품이었다. * * * 아서는 흠칫 눈을 떴다.

16549665912508.png“…….”

잠든 레이나가 자신의 품에 굴러 들어와 있었다.

16549665912508.png“…….”

이게 무슨 일인가……. 이 여자…… 이런 식으로 선을 넘어오는 일은 없었는데. 당연히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 갑자기 벌어지자 당황스러웠다. ……왜 이래. 언제나 닿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 사람처럼 침대 끄트머리에서만 잤잖아. 잠자리가 익숙해지니 긴장이 풀려 실수가 나오는 건가.

16549665912508.png“…….”

……곤란하다. 아서는 불편하게 몸을 꿈틀거렸다. 그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천천히 팔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편하게 베고 있던 어깨가 빠져나가려 하자 레이나는 칭얼거리듯 머릴 부비며 그의 몸에 더 심하게 파고들어 왔다.

16549665912508.png“…….”

아서는 숨을 멈췄다. 좋은 냄새가 나는 게 몹시 위험했다. 아서는 최대한 침착하게 무엇이든 분석하고 아무 생각이나 하려고 애썼다. 내 아내가 왜 이럴까. 그냥 잠꼬대라면 왜 없던 잠꼬대가 갑자기 생겼는가. 이 침대의 넓이와 아내가 잠꼬대로 내 위까지 올라올 확률은.

16549665912508.png“…….”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어깨를 베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목에 닿고 있었다. 아서는 숨을 멈춘 채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 아서는 그녀를 내팽개치지 않고 조금 더 침착할 수 있었다.

16549665912508.png“…….”

아서는 애써 숨을 골랐다. 식은땀이 났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아서는 필사적으로 침대 구석을 노려보았다. 조금만, 힘이 풀리길 기다렸다가 옆으로 옮기면……. 아서는 다시 숨을 멈췄다.

16549665912508.png“……!”

레이나가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더니 옷을 움켜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히잉 하고 웬 강아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중얼거렸다.

16549665799391.png“삼십 골드…….”

16549665912508.png“…….”

아서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정말 머릿속이 비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아서는 한참 동안 경직된 채 그러고 누워 있었다. 파르스름하게 창백한 하늘이 밝아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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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65912508.png“…….”

아서는 레이나에게 붙들린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돈……? 돈인가……? 돈이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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