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전쟁에서 얻은 것2022.02.06.
그날 밤.
“……?”
침실로 돌아온 아서는 레이나에게 한 뭉치의 서류들을 건네어 주었다. 씻고 왔는지 머리가 젖어 있었고 덜 마른 머리에서 살짝 물방울이 떨어졌다. 레이나는 얼떨떨하게 받아들었다가 그게 뭔지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건네준 것이 그의 재산과 관련된 서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나는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아서 경? 이건…….”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아서는 서류를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말했던 연금 관련 서류요. 이건 줄리어스로부터 받은 돈. 이건 황실 쪽에서 받기로 한 포상.”
“…….”
“이건 전쟁 과정에서 얻은 재산. 주로 포로 몸값이고.”
“…….”
“이건, 내가 내 밑에 있는 기사들에게 지급하고 있는 급여 명세서.”
아서가 서류들을 짚어 주며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
“열어서 살펴봐도 돼요.”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레이나는 손이 떨려 차마 펼쳐 볼 엄두가 안 났다. 펼치지 않고 첫 페이지에 적힌 것들만 봐도 아서의 재산 규모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아서는 줄리어스에게서 받는 돈이 가장 큰 수입도 아니었다. 몇 개는 기밀 아닌가? 내가 봐도 되는 서류가 아닌 것 같은데. 레이나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이건.”
“…….”
수건을 내린 아서가 잠시 말을 멈추고 레이나를 보며 웃었다. 레이나는 그걸 보고 더더욱 당황스러워졌다. 【 혼인 계약서 】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의 혼인 계약서요.”
아서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옴으로써 확정된 지참금 리스트가 포함되어 있소.”
레이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계약서를 보자마자 가슴이 쪼그라들며 쿵쿵거렸다. 이 혼인 계약의 대가로 아서 경은 전쟁에 나가고, 크리스티나 아가씨랑 결혼하기로 돼 있었던 건데, 내가 끼어들어서 그걸 사기 결혼으로 만든 거잖아. 아서가 잠시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이런 식으로 꼴사납게 늘어놓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서는 살짝 찌푸린 채 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톡 손가락을 튕겨 레이나의 이마를 건드렸다. 그리고 민망해하는 듯이 웃었다.
“내 부인 한정으로 소인배요. 익히 아는 바겠지만.”
“…….”
레이나는 그를 보며 멍하니 자기 이마를 만졌다. 혼인 계약서를 보고 자신이 생각한 것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짓는 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서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믿는 것 같아서. 증명.”
레이나는 현실감이 없는 얼굴로 서류를 바라보았다.
“…….”
내가 아서 경의 재산과 제안에 대해 안 믿는 것 같아서, 이걸 보여 주는 거라고? 사기 결혼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내 신뢰를 얻기 위해?
“…….”
수건으로 다시 머리를 문지르다가, 아, 하고 아서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혼인 계약서는 사본이오.”
레이나는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쪽의 원본은 황실이 보관 중이고. 후작의 것은, 뭐.”
아서는 슬쩍 스스로의 손톱을 보며 딴청하는 척 툭 던졌다.
“후작의 금고에 있으려나?”
“…….”
아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건 당신 가져요. 난 다른 사본이 또 있으니.”
레이나는 화들짝 놀랐다.
“네?”
아서가 젖은 머리를 살짝 털며 말했다.
“당신도 다 아는 내용이겠지만. 한 번 봐두는 것도 좋겠지.”
레이나는 서류를 쥔 손을 어쩔 줄 몰랐다. 사제의 앞에서 상징적으로 맹세하는 ‘혼인 서약서’에는 레이나가 직접 사인을 했지만, 진짜 혼인 계약의 실질적 내용이 담긴 ‘혼인 계약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걸 자신의 눈으로 볼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했고…….
“…….”
레이나는 차마 서류를 들춰 볼 생각도 못 하고 안절부절 쥐고 있기만 했다. 아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건을 치운 뒤, 혼인 계약서의 표지만 쳐다보고 있는 레이나의 눈앞에 그것을 손수 펼쳐 주며 웃었다.
“자, 보고 고민해 봐요. 다른 서류들도 전부.”
“…….”
그가 다시 서류를 향해 눈짓하며 웃었다.
“내가 오 년 동안 모아 온 재산도 꼼꼼히 봐 주고.”
“…….”
재산 목록을 자랑하는 것이 민망하다면서도, 살짝 젖은 머리를 터는 그는 조금은 뿌듯하고 자랑하고 싶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줄리어스 영지 외성, 트리스탄의 집. 트리스탄은 의자에 앉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깍지 껴 맞잡은 손이 그의 미간에 닿은 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평소 같지 않은 분위기에 아들을 재우고 돌아온 그의 아내가 다가와 트리스탄 앞의 의자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여보.”
“…….”
“오늘 당신 분위기 이상하네. 왜 그래?”
트리스탄은 다정한 남편이었다. 지난 오 년, 아이와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늘 집에 돌아오면 다섯 살 난 아들 벤자민에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열성적으로 아이의 부름에 좋은 아버지로 응했다.
「아빠! 아빠가 아서 경이랑 제일 친한 기사님이죠? 그쵸?」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퇴근한 트리스탄의 첫 번째 일과였다. 들어오자마자 그의 목에 매달려 눈을 반짝이는 벤자민의 질문에, 트리스탄은 언제나 단단한 팔뚝으로 아이를 받쳐 들고
「그러엄! 아빠가 아서 경이랑 제일 친하지! 다른 기사들도 다 알아!」
너스레를 떨며 반짝이는 훈장을 자랑하듯 아서와 함께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으로 아들의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딘지 이상했다. · · ·
“아빠! 아빠! 저 다음 주에 친구들 데려와서 아빠 자랑해도 돼요? 아빠가 아서 경이랑 제일 친한 기사님이라구 해도 돼요?”
평소보다 조금 늦은 그는, 언제나처럼 춤추는 벤자민을 안아 들며 활짝 웃어주었다. 그러나 오늘은 갑자기, “그러엄! ……아빠가…….” 하다 말고 별안간 입술을 떨며 울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두어 걸음 뒤에 떨어진 채, 평소처럼 못 말린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웃고 있던 트리스탄의 아내는 그의 이상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얼른 다가와 트리스탄에게서 벤자민을 받아 안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벤자민! 너 또 친구들한테 자랑하려고 그러지?”
그녀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벤자민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자랑하고 싶은 건 알지만, 너무 맨날 그러면 친구들이 쟤는 맨날 아빠 자랑만 하는 애다, 하고 너를 질투하고 흉본다?”
아들이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간지럽히는 엄마의 얼굴을 밀었다.
“엄마! 간지러워!”
아내는 아이에게 뽀뽀를 하며 아이를 안고 부엌 쪽으로 멀어져갔다.
“요놈! 요놈! 아빠가 남작위 받는 얘기, 밖에서 자랑하구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 요놈! 받지도 않은 작위를 자랑하는 놈! 하고 작위를 뺏어 가신다!”
“꺄하학! 얘기 안 했어요!”
“우리 아들! 오늘 아빠 식사 준비 도와주기로 약속했어, 안 했어!”
“응! 했어요! 간지러워, 그만, 엄마!”
웃느라 숨이 넘어가는 아이를 안고 그녀는 부엌으로 멀어져갔다.
“…….”
꺄르륵 하는 어린 아들의 웃음소리가 멀어져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트리스탄은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서 있었다.
「아서 경이랑 제일 친하죠?」
매일 듣던 그 말을 곱씹으며. 트리스탄은 아서가 그들에게 돌려준 평화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왜 그래?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
아내가 재차 물었지만, 트리스탄은 대답이 없었다. 아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여보……. 왜 그래? 이러면 나 불안해. 무슨 일 있었어? 말해 줘. 뭔가 잘못된 거야?”
트리스탄이 입술을 말아 물더니,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들어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아니야. 잘못된 거 없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애써 웃는 얼굴이었다.
“아무 일도 없어.”
“여보.”
다시 트리스탄의 입술이 떨렸다. 트리스탄은 결국 일부의 진실을 고했다.
“……아무 일도 없는 건 아닌데. 당신이나 우리 가족이 관계된 일은 아니고. 그냥…….”
그리고 그는 끝내 고개를 숙였다. 트리스탄의 아내는 놀라서 그를 안아 주었다.
“왜 그래, 여보. 응?”
트리스탄은 무너지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아서 앞에선 차마 보이지 못한 슬픔이었다. * * * ……트리스탄. 당황하지 말고 들어. 심각한 건 아니니까. 내가 자네한테, 나에 대해 아직 말하지 못한 게 하나 있는데. 나한테 지금, 약간의 어려움이 있거든.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고. 그대들 탓이 아니니. 너무 슬퍼하거나 자책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나? 앞으로 내가 그대의 도움을 청할 일들이 좀 있을 것 같은데. 그때마다 내가, 자네에게 내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걸 주저하게 되지 않도록. * * *
“…….”
무슨 서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트리스탄으로부터 모종의 문서를 건네어 받고, 그것에 대해 한참을 열변을 토하던 트리스탄을 한동안 미소 지은 얼굴로 묵묵히 바라보던 아서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며 웃었다. 그는 서류를 옆으로 밀어 치운 뒤. 책상 앞에 앉아, 몇 마디 서두로 트리스탄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고. 담담하게 자신이 눈이 멀었음을 고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