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안주인 (45/210)

#45. 안주인2022.02.03.

1654966537578.png“……?”

주급 30골드? 너무 현실감이 떨어져 놀랍지도 않았다. 일 년 일해야 받는 연봉을 주급으로 주겠다니. 그냥 한 번 떠보는 건가……? 레이나는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아서 경에게 그런 돈이 어디 있어. 그러나 아서는 따라 웃지 않았다.

1654966537578.png“……?”

아서는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불퉁한 얼굴로 턱을 괴고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아서가 입을 열었다.

16549665375793.png“……나는 줄리어스 일가의 후계자요. 지금은 가문에 대한 권한뿐이고 줄리어스의 사유 재산이 당장 나의 것인 건 아니지만.”

1654966537578.png“……?”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16549665375793.png“난 황실이 보증한 혼인 계약서에 의해 줄리어스 후작의 유산 중 절반의 상속권을 가지고 있소. 황실의 포상도 약속받았고.”

레이나는 얼떨떨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줄리어스 일가의 후계자……? 그랬다. 레이나도 물론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던 사실이긴 한데……. 그에 대해 떠드는 세상의 온갖 소식지와 신문 기사를 섭렵한 레이나였지만. ‘아서’와 ‘줄리어스 일가’의 혼인 계약서의 구체적 내용까진 세상도, 소식지들도, 레이나도 몰랐다. 아서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16549665375793.png“참전의 대가로 나는 줄리어스 후작으로부터 향후 10년 동안 매년 1만 골드의 연금을 받게 되어 있소. 일시금으로 이미 10만 골드를 받았고.”

1654966537578.png“…….”

레이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서가 어렴풋이 쓴웃음을 지었다.

16549665375793.png“……아무래도 당신이 너무 나에 대해 모르는 것 같군.”

1654966537582.png

  * * * 욕실로 들어선 뒤.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아서는 질끈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16549665375793.png“…….”

……꼴사납게. 과시하듯 재산 목록을 줄줄 읊어 대다니.

16549665375793.png“…….”

매수하려 드는 게 밉게 보였으면 어쩌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서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물을 틀었다. * * * 후작 저택, 마틸다 줄리어스의 방. 저택 안주인이 굳이 동반하지 않아도 되는 일정만 남게 되자마자 마틸다는 자체적으로 그날의 일정을 끝낸 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바로 집무실로 들어가 책상 위에 저택 도면을 펼쳤다. 촤라락! 말려드는 도면의 귀퉁이에 문진을 올리며 마틸다는 저택의 비어 있는 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부분에 ‘아서에게 내어준 공간들’이라는 의미로 푸른 잉크로 사용 불가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후작 부인의 상기된 얼굴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의욕과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안주인이 될 사람으로서 저택의 일을 돕겠다는 딸의 기특한 이야기를 듣고 불현듯 아주 좋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새 신방. 내 딸을 위해 새 신방을 꾸며주어야겠다. 레이나가 쓰고 있는 방 대신 더 크고 좋은 방으로. 더 비싸고 좋은 가구들을 넣어서 말이야.

16549665409508.png‘진작 이랬으면 됐을 걸 왜 부글부글 속을 끓였을까!’

후작 부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그 방을 꾸미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갔고 한 달을 넘게 공을 들였으니 아깝긴 했지만, 후작 부인은 깔끔하게 미련을 버렸다. 하녀 애 따위가 먼저 손댄 물건들을 크리스티나가 쓰게 할 순 없지. 그게 신방과 침대라면 더더욱 말이야. 마틸다는 당찬 딸의 말에서 새삼스러운 사실을 환기했다. 어차피 크리스티나가 이 저택의 안주인이 될 거다. 그럼 그 아이가 쓰는 방이 곧 안방이지. 하녀 애가 차지한 방이 소중한 신방이라며 속 끓이고 화낼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그 방은 그냥 버리면 그만이었다. 마틸다는 반짝이는 눈으로 저택 도면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는 넓은 방들을 훑었다. 어디 보자……. 그러고 보니 후작 저택에 밀려들고 있는 선물들 가운데서도 쓸만한 것들이 제법 있었지? 워낙 좋은 물건들이 많았으니 그것들을 활용한다면 이전에 꾸몄던 방은 조금도 아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방을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예전 신방을 꾸미는 데 들어간 돈보다 무조건 두 배 이상의 돈을 쓰겠다 결심한 참인데, 돈을 쓰고 싶어도 많이 못 쓰겠네 생각하며 마틸다는 웃었다. 그녀는 집사장을 불렀다.

16549665409508.png“짐. 들어온 선물 목록 기록해 둔 장부 있지? 그것들 가져와 봐.”

16549665409522.jpg“예, 마님.”

크리스티나의 신방에 써 준다면 선물을 보내온 사람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되겠지. 집사장 짐이 나가며 교대하듯 하녀장이 들어왔다. 후작 부인은 반갑게 그녀를 불렀다.

16549665409508.png“아, 올가! 이리 와서 이것 좀 같이 봐 줘. 이 방이 지금 무슨 용도로 쓰이고 있었지?”

올가가 다가오며 물었다.

16549665409531.jpg“드레스부터 편히 갈아입지 않으시고요?”

후작 부인은 마음이 달아서 재촉했다.

16549665409508.png“일단 이것부터. 내가 크리스티나가 쓸 안주인 침실을 다시 꾸며주려고 방을 고르고 있거든.”

올가가 그녀의 옆으로 와 함께 도면을 살펴보았다. 아서에게 저택의 삼 분의 일을 빼앗기고 말아 쓸 수 있는 공간이 꽤 줄어들어 있었지만, 후작 저택은 워낙에 넓었다. 후작 부인에게는 아직 백 개가 넘는 방들이 남아 있었다. 활용할 만한 공간은 충분했다. 후작 부인은 그중 가장 넓고 위치가 좋으며 쓸만해 보이는 공간을 몇 개 골랐다.

16549665409508.png“올가. 이 방은 어떨까? 안 쓰는 곳이지?”

하녀장이 보더니 답해 주었다.

16549665409531.jpg“거긴 대부인께서 아끼는 물건들을 두는 곳이긴 한데요. 정리해도 되는지 서신으로 한 번 여쭤볼까요? 저택에 돌아오실 때도 드물게만 사용하긴 하십니다.”

아, 어머님께서 쓰시는 곳이군. 후작 부인은 곧바로 포기했다.

16549665409508.png“아니야. 그럼 되었어. 그럼 여긴? 꽤 넓은 곳이고 위치도 좋은데. 이 방 뭐에 쓰고 있었지?”

아서가 쓰기로 한 공간에 아슬아슬하게 포함되지 않은 널따란 방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하녀장이 살펴보고 답했다.

16549665409531.jpg“보석들과 사치품을 모아두는 방입니다. 요사이에 그림이 많이 들어와서 비싼 그림들도 걸어두고 있습니다.”

기억났다. 가끔 방문자들이 왔을 때 자랑하는 용도로 쓰는 너른 방이었다. 보석들 모아둔 방이라.

16549665409508.png“…….”

딱이다. 크리스티나에게 어울렸다.

16549665409508.png“아마 햇살도 잘 들었지?”

16549665409531.jpg“네. 지금은 그림들 상하지 말라고 암막 커튼을 달아두기는 했습니다만, 창문도 넓고 남향이라 커튼을 걷어내면 밝을 겁니다.”

좋아. 이 방이 괜찮아 보이네. 다른 방을 몇 개 더 살펴보았지만 그 방만한 곳은 없었다. 마침 아서가 쓰는 구역과도 인접해 있는 방인데다가, ‘아서’와 ‘줄리어스’ 사이에 위치했다는 것도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하녀장도 마틸다의 의견에 동의했다.

16549665409508.png“여기 있는 물건들 치울 수 있어?”

16549665409531.jpg“네. 사흘 정도 주시면요.”

후작 부인이 모처럼 기분 좋게 명령했다.

16549665409508.png“좋아. 이 방, 다시 꾸밀 테니 도와줘. 새 안주인의 침실로. 무조건 1000골드 이상 쓸 거니까 돈 아끼지 말고.”

크리스티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 * *

16549665433787.jpg

  잠시 다녀오겠다며 아서가 자리를 비운 후. 혼자 남은 레이나는 멍하니 벽난로 앞에 서 있다가 쭈그리고 앉았다.

1654966537578.png“…….”

내가 아서 경을 모른다니. 레이나는 의외로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줄리어스의 후계자이자 세기의 개선장군이고 황실의 보상까지 약속받은 아서 경을 돈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를 거라고 착각한 건 내가 너무나도 그를 몰랐던 게 맞았지만……. 하지만 그 외에는 당신에 대해 정말 잘 아는데. 뭔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아서 경이 플람베르 평원 전투에서 어떤 전략을 사용했는지. 아서 경이 어떻게 카일 황태자를 구해냈는지. 그게 얼마나 긴박한 전투였는지…….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그가 어떤 시가를 태웠는지. 전부 소식지로 접했을 뿐이지만, 나는 다 외우고 있는데…….

1654966537578.png“…….”

레이나는 시무룩해졌다. 하긴……. 아무리 소식지를 열심히 모으고 외워도 그 사람을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긴 하지……. 아서 경이 버섯을 먹지 않는다는 것도. 시가를 태울 때 엄청 멋있다는 것도. 무척이나 품이 넓다는 것도. 목소리가 굉장히 좋다는 것도. 무엇하나 신문 기사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었으니까.

1654966537578.png“…….”

레이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아서 경은 결국 나에게 신문 너머 사람이라는 게 새삼 실감 났다. 레이나는 멍하니 벽난로 안에서 타는 장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1654966537578.png‘주급으로 30골드…….’

일 년은 일해야 버는 돈을 주급으로 준다는 것의 의미는 그것이 단순히 큰돈이라는 걸 넘어서, 생활비가 나가지 않고 빠르게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파격적인 봉급으로 일 년에 30골드를 벌어도 이래저래 두 사람의 생활비를 쓰고 나면 모을 수 있는 돈은 겨우 일 년에 10골드 남짓이었으니까. 평생을 일해서 간신히 모은 게 60골드인데 일주일에 30골드를 준다니, 믿기지도 않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밀려왔지만, 머리는 과연 아서 경의 그 제안이 진짜 가능한 이야기일까 의심하면서도 착실히 계산을 해 나가고 있었다. 만약 아서 경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한 달이면 120골드……. 그럼 줄리어스 후작가의 후한 급여를 포기하더라도 당장 독립해 꽤 괜찮은 집을 살 수 있었다. 원래 목표로 했던 조그만 집보다 훨씬 좋은 집을. 너무 사치스러운 집을 욕심 내지만 않는다면 한동안 일하지 않고 버틸 생활비도 어느 정도 남길 수가 있을 것이다…….

1654966537578.png“…….”

안 돼……. 레이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생활비……. 생활비를 생각해야지. 당장 순간의 큰 금액에 현혹돼선 안 된다. 집만 있다고 저절로 공짜로 살아지는 게 아니잖아. 애초에 아서 경은 주급을 30골드 주겠다고 했지, 몇 주나 일하게 해 준다고 보장해 주지도 않았는걸. 후작님이 아서 경이랑 이야기를 잘 끝마친다면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올 테니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잘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평생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할머니를 돌봐주기만 한다면 50실버만 해도 충분했다. 그동안 돈이 필요했던 이유는 오로지 할머니와 독립할 집 때문이었는데, 줄리어스에서 할머니에게 의사를 붙여주기로 한 이상, 레이나는 더는 위험한 돈이 간절하지 않았다. 어차피 매주 30골드를 준대도 집이랑 할머니 외엔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큰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미 할머니에게 테일러가 가 있었다. 다음 주에는 테일러를 만나서 이야기까지 듣기로 했는걸. 이런 상황에 아서 경이 이야기한 30골드 주급에 넘어가 줄리어스를 배신한 걸 들켰다가, 한 달도 못 되어 아서 경이랑 줄리어스 후작님이 평화롭게 화해하고 나는 평생직장과 테일러를 모두 잃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더없이 멍청한 짓이 될 거다. 어차피 난 이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할 테니까……. 레이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얼굴을 감쌌다.

1654966537578.png“…….”

후회하게 될 거야. ……그렇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난……. ……그러니까 살아 계실 때까지는.

1654966537578.png“…….”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언제나처럼 목이 메어왔다. 레이나는 꾸욱 입술을 다물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이랑 은혜를 무엇하나 갚지 못했다. 할머니는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주지 않는다. 갚을 수 있을 때 갚아야 했다.

1654966537578.png“…….”

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레이나에게는 할머니가 가장 중요했다. 이미 검증된 보살핌. 그리고, 그걸 버리고 선택해야 하는 도박. 생각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서 경은 조만간 개선식을 하러 수도로 떠나야 한다. 이런 상황에 내가 섣불리 줄리어스를 배신한다면. 아서 경 없는 줄리어스 영지에서, 할머니는 몇 달 동안 누가 보호해 주겠어.

1654966537578.png“…….”

레이나는 멍하니 거울을 보았다. 화장이 지워진 창백한 얼굴은 날 것으로 보였다.

1654966537578.png“…….”

……솔직하게 말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할머니에게 의사가 필요하다고. 혹시 그것까지 약속해 주실 수 있냐고……. 그리고 말씀하신 돈을…… 혹시 당신 곁에서 오래 일하지 못하더라도…… 얼마 정도 보장해 주실 수 있냐고. 할머니랑 안전하게…… 여생을 몇 년이라도 함께 보낼 수 있도록.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1654966537578.png“…….”

레이나는 멍하니 벽난로에 타는 장작을 바라보았다. 다음 주……. 다음 주. 테일러를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