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후한 급료2022.01.30.
아서는 레이나를 안은 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
“…….”
레이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가 레이나의 떨리는 몸을 안고 중얼거렸다.
“오 년 전이랑 똑같네. 조그만 것도. 덜덜 떠는 것도.”
“…….”
귓가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낯설었다. 레이나는 이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던 개선식의 그 밤보다 더 이상했다. 아직도 레이나의 몸은 춥기라도 한 듯 덜덜 떨리고 있어, 아서는 그녀의 등 뒤로 팔을 교차시켜 그녀를 더 꽉 안아 주었다.
“…….”
방 안은 주홍색 석양으로 가득했다. 노을 물 번진 듯 발간빛으로 물들어 있는 방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레이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듯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어 버렸다. 눈앞이 새카매져서인가.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
레이나가 제 쪽으로 푹 고개를 숙이자 그는 더 부드럽고 강하게 레이나를 안아 주었다. 아서가 그녀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부인, 혹시…….”
아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줄리어스로부터 협박당하고 있거나, 약점 잡힌 거 있으면.”
“…….”
“나한테 도움을 청하면 안 되나, 고민해 봐요.”
아서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테니.”
오래 안겨 있던 레이나는 흠칫하거나 파드득 놀라지 않았다. 레이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아서의 목소리를 들었다. 레이나의 떨림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아서가 천천히 말했다.
“난 당신이랑 같은 편에 서고 싶어.”
아서가 커다란 손으로 레이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당장 믿어 달라고 안 할게.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거지?”
“…….”
한동안 그렇게, 아서는 아무 말 없이 레이나를 안아 주었다. 아서가 그녀를 꽉 안은 채, 레이나의 뒷머리를 살짝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기다릴 테니. 천천히 고민해 봐.”
“…….”
레이나의 떨림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숨소리는 전보다 편해져 있었다. 아서는 희미하게 웃고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머리를 꾹 자신의 품에 눌렀다가 천천히 놓아주었다.
“…….”
“…….”
레이나는 몹시 어색하게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비로소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마주한 채 아서가 웃었다. 그리고 레이나의 뺨을 감쌌다.
“내 편에 서. 내가 보호해 줄 테니.”
그는 조용조용히 약속하듯 말했다.
“당신……. 탓하지 않을 테니까.”
“…….”
“울지 말고.”
두려움이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 대신 다른 것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품은 무척이나 넓고 안온해서 오히려 레이나를 진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 * 그들은 비로소 조금 늦은 식사를 시작했다. 레이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아서가 놓아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요리들에 올라간 버섯들을 쏙쏙 골라 먹었다. 아서는 그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만하고 먹고 싶은 거 먹어요. 버섯 같은 건 상관없으니.”
그를 보는 레이나는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졌으니까. 하지만 레이나는 그가 웃든 말든 상기된 얼굴로 묵묵히 버섯을 먹었다. 아서는 여러 가지 맛있는 요리를 그녀 앞에 놓아 주고 먹고 싶은 거나 편히 먹으라 웃으면서도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러면서 그는 레이나 근처에서 생선 요리가 담긴 접시를 치워 주었다. 아서가 그런 행동들을 하는 걸, 레이나는 붉어진 얼굴로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 * *
“후작가 고용인들의 대우가 후하다는 건 사실이오?”
레이나는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네……. 줄리어스는 제국에서 가장 높은 급료를 주는 곳이라고 유명하거든요. 그래서 멀리서 굳이 이곳으로 상경해 취업하는 하녀들도 많아요.”
레이나는 그저 줄리어스 영지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이라 운 좋게 대륙 최고의 일자리를 구한 거였지만, 사실 저택엔 멀리서 줄리어스 저택을 목표로 취업하러 온 하녀들이 더 많았다. 아서가 물었다.
“얼마를 받고 있어?”
“…….”
레이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하자 아서가 자신의 실수라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가만히 제 이마를 만졌다. 그리고 레이나가 대답할 수 있도록 질문을 바꾸었다.
“보통 얼마 정도를 받소? 그대 나이 정도의 하녀라면.”
“……하녀…… 급료요?”
그가 자신의 급료를 왜 궁금해하나 어색해하고 있자니, 아서가 ‘크리스티나’에 맞추어 담담하게 덧붙여 주었다.
“나도 이 저택을 그대와 함께 관리하려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소. 저택에 가장 많은 고용인이 하녀이니까.”
그런 걸 신경 쓰는 건 사실 가주나 후계자가 아니라 안주인과 하녀장이긴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와 함께 저택을 관리하기 위해 그가 하녀들의 봉급을 알아야겠다면 피할 일도 아니긴 했다. 오 년 동안 전장에 있다 오신 분이니, 도시의 저택 경영비에 대한 감을 키울 필요도 있으실 것 같고……. 레이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한 후 입을 열었다.
“제 나이 정도의 하녀라면 아마 30골드 정도를 받을 거예요.”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내 봉급을 알까? 레이나는 슬그머니 덧붙였다.
“허스트 부인이 주로 관리하셔서 저는 정확하게는 모르긴 해요…….”
“…….”
아서는 대답이 없었다. 새삼 초라한 나를 보이는 기분이었다. 줄리어스에서 일하며 하녀로서 내 급료가 적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래도 하녀의 벌이일 뿐이라. 왠지 그의 앞에 털어놓자니 마음이 어려웠다.
“주급이 30골드요?”
“……네?”
레이나는 아서의 반문에 어리둥절해졌다. 농담하는 건가? 아무리 물가를 몰라도 그렇지. 아무리 재벌가여도 아무렴 하녀 주급이 30골드일 리가 있나. 그럼 레이나는 진작 바닷가의 집을 열 채 정도는 샀을 거다.
“아뇨. 연봉이요.”
“……?”
이번에는 아서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아서는 정말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감이 안 온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연봉이라고? 그럼 주급은 얼마인 거지?”
레이나가 답했다.
“50실버 정도요. 그 외에 자잘한 수당이랑 식비 같은 게 나와서 많을 때는 60실버 가까이도 돼요.”
“…….”
아서는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줄리어스가 제국에서 가장 후한 급료를 쳐 주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소?”
“네, 맞아요.”
아서가 눈매를 좁히며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물었다.
“……그게 후한 급료요?”
아서 경에게는 그게 적게 느껴지는 건가? 레이나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후하죠. 일반적으로 제 나이대의 저택 하녀가 받는 주급이 20실버 정도인데요. 다른 곳에 비하면 거의 두세 배의 급료인걸요.”
“…….”
레이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아서의 표정에 의아해졌다. 그건 정말 후한 주급이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잘 숨어 있다 오면 주급의 두 배를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주급으로 매주 1골드를 받기로 되어 있었던 거다. 세상에 매주 금화를 받는 하녀가 몇이나 있겠나. 보통 한 달을 꼬박 일해야 금화 한 개가 될까 말까 한걸. 생활비도 써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매주 금화를 받는 파격 봉급은 레이나의 특수한 상황에만 있었던 횡재고. 사실상 일주일에 60실버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하녀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대우였다.
“…….”
아서는 물끄러미 레이나를 볼 뿐 대답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서 경은 오 년이나 전장에 다녀오느라 정말 물가에 대한 감이 없는 듯했다. 저도 모르게 하녀의 생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듯이 말한 것 같아 조심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전쟁을 치르고 오느라 통상의 물가를 모르는 그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어 레이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상세히 말했다.
“……어지간한 저택에서는 수석 풋맨이나 중견 요리사 정도는 되어야 그 정도 급료를 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줄리어스 저택은 하녀들에게 정말 후한 거예요. 어딜 가도 20대 초반의 하녀에게 그 정도 급료를 주진 않아요. 마님을 모시는 전문 시녀면 모를까…….”
물론 허스트 부인은 그거보다는 훨씬 높은 급료를 받으실 테지만……. 레이나는 슬그머니 덧붙였다.
“……줄리어스는 입이 무겁고 일을 절대 그만두지 않는 하녀를 원하는 대신, 정말 후한 급료를 쳐주는 거예요. 이런 급료를 받다가 관두고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 일을 구할 생각은 보통 못 해요.”
“…….”
레이나도 줄리어스 저택의 일이 녹록지는 않은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돈이 급한 하녀에게 줄리어스만한 일자리가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레이나는 가만가만히 솔직하게 말했다.
“힘든 일을 견디게 해 주는 건 결국 후한 주급이에요. 어차피 다른 저택에 가도 운 나쁘면 아주 힘든 곳일 수 있으니까요. 몹쓸 주인을 만날 확률은 어디나 똑같고……. 그렇다면 당연히 확정적으로 돈이라도 많이 주는 곳이 낫거든요. 그래서 줄리어스 저택이 하녀들에겐 선망하는 일자리인 거예요.”
그것만은 정말 줄리어스의 미덕이라 생각했다. 레이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다들 입이 무겁고, 일이 가혹한 편인데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어요. 애초에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 하녀는 받지도 않구요. 여긴……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일자리예요. 아마 황궁에 들어가는 것 다음으로 어려운 게 줄리어스 저택일걸요.”
처음 고용될 때, 한번 들어오면 맘대로 나갈 수 없게 비밀 유지 각서를 쓰기도 했지만……. 사실 그거보단 급료가 높아서 안 나가고 버티는 게 컸다. 아마 다른 하녀들도 마찬가지겠지. 어쨌든 대륙 제일의 재벌인 줄리어스 저택은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는 일자리였다. 내부의 사정이야 얼마나 치열하든, 밖에서 봤을 때는 그랬다. 입이 무겁고 수준 높은 하녀들만 고용한다는 것 외에 알려진 건 높은 급료뿐이니까. 아서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
아 참. 생각해 보니 내 급료, 두 배가 아니구나. 잊고 있던 후작 부인의 새 약속이 뒤늦게 떠올랐다. 레이나는 후작 부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대가로 열 배의 주급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그럼 매주 금화 다섯 개네.
“…….”
그때도 그런 주급이 가능한 거였나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남아 있었지만, 할머니에게 테일러를 보내준다는 소리에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주일에 5골드. 그럼 한 달이면 20골드였다. 새삼 레이나는 자신이 약속받은 거금이 실감 났다. 그만큼 위험한 일의 대가인 거겠지만…….
“당신.”
문득 아서가 그녀를 불렀다. 레이나는 퍼뜩 그를 쳐다보았다. 아서가 물끄러미 레이나를 응시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지금 내가…… 당신을 매수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
아서가 말을 이었다.
“……내가 그 돈 주겠소. 아니, 주급으로 내가 30골드를 주겠소. 그러면 그대, 내 사람이 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