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당신이 떨고 있을 때2022.01.27.
“나는 내 안사람이 안락한 데서 안전히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전장에 간 거요. 그런데 대체 그댄, 내가 없는 사이 어떻게 지낸 거지?”
레이나는 말문이 막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상한 생선을 먹은 적 있다는 말실수를 한 걸 신경 써야 할 텐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전부 웃기지도 않은 연극인데……. 가슴이 이상하게 먹먹했다. 후작가의 생활이 그렇게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사실 힘들었던 걸까. 몸이 편해지고 나니 엄살이 는 걸까. 먹먹해지려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레이나는 고개를 숙이고 진정하려 애썼다. 내 남편이 아니다. 아가씨의 남편이다. 착각해선 안 된다.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에게 돌아가야 해.
「네 역할은 그냥 지금의 난리를 잠재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후작 부인이 일러주었던 말을 되새기는 것이 아주 조금 도움이 되었다. 레이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하지만 목소리는 왠지 울 듯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당황한 레이나는 짐짓 씩씩하게 고개를 쳐들며 큼,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누가 감히 저한테 상한 생선을 먹게 하겠어요.”
다행히 두 번째 목소리는 훨씬 침착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그러나 무어라 변명을 잇기도 전에. 아서가 굳은 얼굴로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레이나의 말을 끊었다.
“부인.”
이어진 아서의 말에 레이나의 심장은 쿵 바닥에 떨어졌다.
“난 후작가의 하녀 대우가 꽤 좋다 알고 있었소. 줄리어스 저택이 하녀들에겐 선망하는 일자리란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고.”
“……!”
아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댈 볼수록 아닌 거 같아.”
그녀를 응시한 채 그의 입이 움직였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소?”
레이나가 숨을 멈추고 멍하니 아서를 바라보았다. 쿵 쿵 심장이 뛰며, 피가 식어 갔다.
“당신 잘 지낸 거 맞아?”
아서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나는 그의 앞에서 낱낱이 발가벗겨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워어, 워. 끼익. 마부의 소리와 함께 마차가 줄리어스 교외의 조그만 낡은 집 앞에 멈추어 섰다. 앨빈 로렌슨이 작은 짐꾸러미를 들고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며, 줄리어스 일가의 마부가 인사를 남겼다.
“그럼 두 시간 정도 있다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천천히 일 보시고 나오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이랴.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마차가 떠났다.
“…….”
로렌슨 선생은 떠나는 후작가 마차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았다.
“아버지!”
마차 소리를 들은 건지 금세 테일러가 집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 들린 짐꾸러미를 가져가 들었다.
“고생하셨어요. 오늘은 다른 짐은 없으세요?”
싹싹하다. 빠릿빠릿하고 표정이 좋았다.
“…….”
앨빈 로렌슨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들이 왜 이러는지 빤했다.
“아무나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 것 같은데. 왜 이미 결혼식 날짜까지 잡은 놈처럼 굴지?”
테일러는 아버지의 지적에 동그란 눈을 했다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짐을 들고 슥 앞서가는 아들놈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자식새끼 키워 봐야……. 앨빈 로렌슨이 눈을 부라렸다.
“너……. 그새 쪼르르 편지를 보내서 아버지가 허락했느니 어쩌느니 하는 식으로 주책없이 떠들어 댄 건 아니겠지?”
“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사귀고 있지도 않아요. 저 혼자 좋아하는 거라니까요.”
앨빈 로렌슨이 쏘아붙였다.
“이놈아. 너 같으면 그 말을 믿겠냐?”
상류계급 전문직인 데다가, 이렇게 젊고 잘생기고 멀쩡한 놈이 좋아한다는데 저택 하녀가 그걸 마다할 리가 있나.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직업이겠다, 그렇다고 아예 고위 귀족이라 못 오를 나무도 아니겠다. 착하고 순진해 빠졌겠다……. 어휴. 줄리어스 저택에서 이놈을 키운 게 실수지. 높은 급료로 유명한 줄리어스의 하녀들 중에는 제법 미인이 많았다. 하지만 역시 이런 데서 험한 일 하는 애들이란 팔자가 꼬이기 십상이었다. 그 레이나라는 애만 해도 상당한 미인이지만, 처지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높은 고위 귀족의 정부라면 어떻게 팔자라도 바꿔 볼까 꿈이라도 꿔 보겠지만, 그 애 신세는 정말이지 답도 없다. 그냥 정부도 아니고 존재를 드러낼 수도 없는 신부 대역에, 몸은 몸대로 버리고. 차라리 정식으로 정부가 되기라도 한다면 아서 경의 이름 아래 보호라도 받을 수 있을걸. 하지만 ‘크리스티나 줄리어스의 남자’라는 건 아서 경에게도 중요한 이미지일 텐데, 이런 상황에 아서 경이 그 애를 정부로나 받아 주겠어? 아서 경이나 후작가가 어디까지 책임져 줄지도 모르는 마당에. 아주 그냥 양쪽에서 등 터지는 꼴이 아닌가. 줄리어스의 하녀면 뭐, 어지간하면 미인이겠고 사람 하나는 야무지겠지, 싶다가도. 그런 애를 보면 아 역시 하녀는 아닌 것 같은데 싶어 심란하다. 물론 그 애 정도로 신세가 답 없는 경우는 드물지만…….
“진짜 아니에요.”
문 앞에서 돌아보는 아들놈의 얼굴에 붉은 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더니 다른 데로 시선을 향하고 몸으로 문을 밀어 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고백하고 진지하게 만나 보자고 하려고…….”
갑자기 복장이 터지네?
“…….”
아들놈이 민망해하며 딴청을 했다.
“……아버지, 어깨 좀 주물러 드릴까요?”
더 복장이 터지네?
“됐다, 이놈아.”
앨빈 로렌슨이 그를 따라 들어서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 다음 주에 출장 강의 있다. 그러니 그날 네가 저택에 와서 내 대신 일 좀 보거라. 마님과 아가씨께도 말씀드려 놨으니.”
“아……. 네!”
다음 주. 드디어 레이나를 보겠구나. 앨빈이 한숨과 함께 불퉁하게 확인했다.
“보고드릴 내용 정리 끝났댔지?”
테일러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렌슨 선생은 잠시 망설였다. 후작 부인은 입단속 항목에 대해선 앨빈 로렌슨을 믿을 테니 알아서 하라 했다. 테일러에게까지는 앨빈 로렌슨이 아는 내용들을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이었으며, 그 방식은 앨빈 로렌슨에게 맡기는 처분이었다.
“…….”
선하고 순진한 아들에게 자신이 오래 몸담은, 그리고 아들도 오래 몸담아야 할 모시는 귀족가의 치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유쾌하진 않았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었다. 앨빈 로렌슨은 잠시 침묵하다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줄리어스 일가에서 일하면서 넌 깨끗한 것만 보게 되지는 않을 게다.”
테일러는 입을 다물고 아버지를 마주하고 섰다.
“네, 알고 있어요.”
줄리어스가 온화하고 정의로운 귀족가가 아니라는 건 테일러도 알고 있었다. 집안에 자신이 다 모르는 공개되지 않은 치부가 많다는 것도. 아버지는 정식으로 줄리어스의 일을 맡게 된 자신에게 처음으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일. 황당한 일……. 가끔은 너의 가치관에 용납 안 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의사고, 세상에 의사는 우리뿐이 아니다. 네가 거부한다면 결국 너 아닌 누군가가 하게 될 일이야.”
앨빈 로렌슨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돕지 않으면 당장 환자들에게는 그게 더 큰 불행일 수 있다.”
앨빈 로렌슨은 테일러의 눈을 보며 말했다.
“네가 그걸 이해할 정도로 어른이면 좋겠구나.”
“…….”
앨빈 로렌슨은 너무 오래 무게 잡지 않고 담백하게 말을 돌렸다.
“아가씨한테 매일 내려 드리는 약차가 있는데 그거 처방해 드리고.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하다, 일 잘하고 있다 말씀드리고. 할머니 건강에 대해 말씀드리고 이야기 듣고 오면 된다.”
테일러가 눈을 깜박였다.
“……크리스티나 아가씨한테요?”
……레이나나 후작 부인이 아니고? 짧은 틈을 두고 앨빈 로렌슨이 끄덕였다.
“그래. 가서 보면 알게 될 게다.”
아버지의 대답이 어딘지 묘했다. 어쨌든 테일러는 끄덕이며 물었다.
“네. 그럴게요. 어떤 약차예요?”
로렌슨 선생이 답했다.
“검은사슴뿔버섯이랑 화룡나무 껍질, 아타실 열매. 그리고 알루치노 뿌리 태워서 우린 물이다.”
“…….”
테일러는 아버지가 말한 살벌한 약재들의 이름을 듣고 멈칫했다.
“……예?”
앨빈 로렌슨은 장갑을 벗으며, 테일러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테일러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거……. 유산약이잖아요. 그걸 아가씨께서 매일 드신다고요?”
* * * 아서 경 앞에선 철저히 크리스티나 아가씨로 있을 것. 실수로라도 하녀라는 게 드러나는 말을 하지 말 것. 다 알고 있다며 솔직한 대화를 유도한다 해도 넘어가지 말고 입조심 할 것. 무심결에 지껄인 말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유도 신문에 넘어가지 말 것. 유도 신문에, 넘어가지 말 것. 하지만 아무리 후작 부인의 명령을 되새기려 애써도, 자꾸만 물밀듯이 그의 말들이 가슴에 밀려들어 왔다.
「나는 내 안사람이 안락한 데서 안전히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전장에 간 거요.」
「그런데 대체 그댄, 내가 없는 사이 어떻게 지낸 거지?」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틀어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아서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곤 의자를 끌어다 자신의 바로 앞에 놓았다.
“…….”
아서가 눈을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앉아 봐요. 우리 터놓고 이야기 좀 해 봅시다. 이제 그럴 때도 되지 않았나?”
이런 게 유도 신문일 수가 있을까? 이런 눈을 한 사람이 유도 신문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내가 어리석은 걸까? 먹먹하게 가슴이 무너져 내리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슬픈 두려움이 고개를 쳐들었다.
「일이 틀어지면 너도, 네 할머니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겠지?」
할머니. 할머니…….
“앉아요.”
레이나는 슬프고 막막해서 덜덜 떨었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앉는 순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
레이나가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가 미세하게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레이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닿자 떨림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아서가 그녀의 차가운 손을 쥐며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떨어.”
“…….”
그가 그녀의 차게 식은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차례로 가져가 테이블 위에 옮겨 놓았다. 달각. ……달각. 그리고 두 손을 모두 뻗어 레이나의 양손을 감싸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나한테 확신이 없어?”
“…….”
레이나는 계속 서 있었다. 그저 하얗게 질린 채 가늘게 떨면서. 아서가 시선을 내려 다시 그녀의 손을 보았다. 겁을 먹기라도 한 듯한 레이나의 떨림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시간 더 필요해요?”
레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잡아떼지도 못하고. 그가 하는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아서가 말했다.
“부인.”
아서는 어느새 완전히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아서가 앉은 채 두 손으로 레이나의 양손을 감싸 잡았다.
“왜 이리 떨어. 내가 무서워?”
“…….”
레이나는 벌벌 떨며 멍하니 눈만 끔벅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던 아서가 살짝 씁쓸하게 웃는 것 같았다.
“…….”
가슴이 죄어들었다.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 마리나처럼 아서 경도 차가운 표정으로 비웃고는 ‘그럼 그렇지. 너는 그런 사람이지.’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겠지. 그런 건 슬펐다. 하지만 그보다 나은 결말을 상상할 수 없었다. 달리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레이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우두커니. 나는 당신이 그냥 날 답답하게 여기며 기다리길 관두고 차라리 빨리 포기해 줬으면 좋겠어.
“…….”
아서가 잠시 그녀를 기다리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
“…….”
아서가 그녀를 불렀다. 그는 레이나의 손 대신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내가 지금 당신을 안아 줄 건데. 싫으면 밀쳐요.”
“…….”
레이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서가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미끄러뜨려 팔을 잡을 때까지도.
“아무 말도 못 하겠으면 그냥 나한테 기대.”
나직이 말할 때까지도. 그리고 아서는 레이나를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