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채워지지 않는2022.01.20.
저녁 시간, 후작 저택. 케이가 ‘렘브란트’와 ‘프랜시스 포드’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떠난 후. 집무실에 혼자 남은 아서는 케이가 두고 간 몇 개의 보고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
「부실 보급 건 배상 누락된 병사들 명단입니다.」
「이건 전쟁 포상금 및 유족 연금 지급 내역입니다. 애매한 케이스로 구제해 달라 신청한 사람들의 유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못 받은 사람들이나 억울한 케이스가 있는지, 오지급이 있는지 이야기 계속 듣는 중입니다. 시간 조금 더 걸릴 것 같은데, 조사 진행되는 대로 더 가져오겠습니다.」
보고서를 받아 든 그는 웃으며 짧게 끄덕였다.
「수고.」
· · ·
“…….”
아서는 조용히 보고서 표지를 바라보았다. 【 참전 용사 포상금 및 유족 연금 지급 내역과 누락자 명단 】 ……아마도 그런 비슷한 말이 쓰여 있는 것일 테지만.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글씨는 읽을 수 없는 형태로만 인지되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
더 이상 미룰 수 없겠군. 아서는 담담하게 천정을 쳐다보았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눈에 오러를 집중시키면 어떻게든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러로도 보조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시력은 돌이킬 수 없게 된 상태였다.
“…….”
그럼에도 오러의 부작용에 대해 알고 있는 황태자를 제외하고, 그의 부하들은 아직 누구도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말을 타고 검을 다루며 놀라운 육체 능력과 동체 시력을 보여 주는 그가 눈이 멀었다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장애물의 존재나 사물의 형태 같은 것은 그냥 알 수 있었다. 예민한 청각으로 보완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시각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더 이상 글자를 읽을 수 없다는 거였다. 가문의 주도권을 놓고 줄리어스와 정치적 힘겨루기를 해야 할 상황에, 노출되어선 안 될 약점이었다.
“…….”
아서는 가만히 보고서 위에 손가락 끝을 움직여 보았다.
“…….”
조금 더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닥쳐왔다.
「……다친 데는 없으세요?」
아서는 덤덤하게 생각했다. 나의 시력 문제는 못 알아낼 것이다. 그런 허술함으론. 희망 사항이 아닌, 경험에 의한 믿음이었다.
“…….”
시력을 잃은 직후엔 솔직히 금방 부하들에게 들킬 줄 알았다. 하지만.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를 밀착 보좌하는 트리스탄도. 언제나 그와 서류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케이도. 짐승 같은 본능을 가진 루칸도. 두 달이 넘도록 눈먼 아서와 가까이 있으면서 누구도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실명을 피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아슬아슬하게 오러를 운용했다는 걸 유일하게 알고 있던 황태자만이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걸 알아챘다. 그것도, 아닌 척하는 그를 몇 번이나 날카롭게 시험한 후에야. 아서는 손을 들어 묵묵히 눈을 문질렀다.
“…….”
피할 수도 없었고, 후회하지도 않지만……. 상황이 위태위태하긴 했다. 내가 시력을 잃었다는 걸 알면 후작은 신나서 동네방네 떠들어 대고, 동정하고 보호하는 척하며 날 제 발밑에 깔려고 하겠지. 그럼 나는 동정 어린 시선 속에 배제될 거고. 가문의 주도권은 ‘줄리어스 후작’에게, 그리고 그다음에는 ‘크리스티나’의 것이 될 거다. 그럼 그 밑의 병사들과 줄리어스의 영지민들에게는 아서가 뜻하는 대로 해 줄 수 없게 된다. 언젠가 시력을 잃은 걸 들키더라도. 가문의 주도권을 확실히 손에 쥔 후에.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지의 일을 공고히 맡기게 된 이후가 되어야 했다.
“…….”
아서는 눈을 가린 손을 내리고 다시 물끄러미 읽을 수 없는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를 구하고, 승전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던 길에는 서류를 볼 일이 많지 않았다. 케이와 트리스탄에게 시킬 수도 있었고. 앞뒤 정황과 눈치로 넘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시력을 잃은 걸 아는 황태자가 그에게 서류 일을 맡기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황태자는 떠났다. 눈먼 그는 혼자가 되었고. 아서에게는 저택의 일과 영지의 일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개선장군의 일. 논공행상과 부실 보급 건. 혼인계약서와 관련된 법적 자문. 그리고 이런 서류들……. 더 이상은 피할 수 없었다. 후작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의 가장 신뢰하는 이들에게 이제는 말해야 했다.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
자기들 때문이라고 괴로워하겠지. 트리스탄. 그래도 그는 알아야 한다.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하지 않고 내 입으로 말해 주는 게 예의일 것이다. 당황스러워할 것이다. 케이는. 그래도 그에게는 현실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루칸은 화를 내겠지. 그 친구 성질 감당하기 힘든데……. 흥분해서 말실수하면 곤란하다. 어쨌든 후작이 알게 된다면 가문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힘들어질 테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일이었다. 일단 트리스탄과 케이까지만 염두에 둘까.
“…….”
아서는 문 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피식 웃었다.
“부인.”
침실로 이어진 집무실의 문 쪽에서, 레이나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살짝 웃었다.
“아서 경.”
아서가 웃으며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덮어 옆으로 치웠다. 레이나가 그걸 보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일하시는데 제가 방해되었나요?”
“아니. 쉬려던 참이오.”
레이나가 그의 말에 비로소 살짝 웃으며 살그머니 집무실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
발걸음이 가볍다. 곧 테일러 로렌슨이 온다는 소리 때문인가. 그녀가 들뜬 게 느껴진다. 만날 수 있게 해 줄 것 같아? 하고 뒤틀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저런 심장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그녀가 황태자에 대해 묻자 기분이 나빠졌다가도 아, 별로 카일을 만나는 걸 내켜 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쉽게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는 것처럼. 그녀가 다가왔다. 조용한 걸음걸이를 따라 드레스 자락이 나풀나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아서는 가만히 그녀가 다가오는 걸 바라보았다. 테일러를 만나게 해 줘야 한다면. 나한테도 둘만의 시간을 내줬으면 좋겠어.
“노을이 예뻐요.”
레이나가 짐짓 그의 앞에서 뒷짐을 지고 웃었다.
“……밥시간이라는 뜻이에요.”
덧붙인 말에, 아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항상 저녁 시간이 되면 방 안이 석양빛으로 물드는 걸 알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 대한 표현으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군.”
레이나는 그를 웃긴 것이 뿌듯한 듯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향하며 말했다.
“이쪽 방들은 전부 남서향이라 저녁 시간이 되면 늘 멋있는 일몰을 볼 수 있는 게 참 좋아요.”
아서는 물끄러미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부인은 퍼뜩 입을 다물고 어설피 정정했다.
“……물론 평생 보아 왔지만요…….”
아서가 묵묵히 미소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시야 속. 그의 아내의 모습을.
“식사, 가지고 올라와 달라고 할까요?”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따스한 얼굴 위로 석양이 미끄러졌다. 또렷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렴풋한 색으로. 저런 목소리로 말할 때 어떤 얼굴일지 새삼 궁금했다.
“그럴까.”
오 년 전에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던 벽안을. 비로소 다시 당신을 눈앞에 두었는데, 이제는 그 눈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아마도 평생 볼 수 없을 거라는 게. 아서는 가만히, 흐릿한 형태로만 아른거리는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부서지는 바람. 그녀의 몸 위로 흐르는 옷자락.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반짝이는 햇살이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가끔은 창백하고, 가끔은 상기되는 흰 뺨에 오 년 전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아마도 벽안이었던 것 같은. 그 희미한 빛. 나는 이제 그런 것으로만 너를 느낄 수 있었다.
“아서 경?”
아서는 미소 지었다. 너의 모습을 한 번만 더 또렷하게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있소?”
그가 물었다.
“저야 뭐……. 다 좋아요. 아서 경은요? 밖에서 드셨죠? 점심 뭐 드셨어요?”
그녀가 얼른 덧붙였다.
“저 점심에 먹은 것도 맛있었는데. 닭고기 요리였거든요. 그거 한 번 더 해 달라고 할까요? 경은 못 드셨잖아요. 저는 같은 거 또 달라고 해도 좋아요.”
아서는 재잘거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살짝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나의 곁으로 다가가며 아서는 보이지 않는 그녀를 느꼈다. 긴장하는 것 같은 어깨. 온기가 오르는 뺨. 나를 반기는 것만 같은 떨림. 다른 연인이 있는 것 같지 않은 그 모든 숨죽임을 듣고 있으면 오 년 동안 날 기다린 것만 같다고 착각하게 된다.
“……아서 경?”
왜 나를 기다린 것 같을까. 왜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을까. 왜 나는, 너와 괜찮은 분위기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나는 너의 인생에, 온전히 불청객이었을 텐데. 내 귀로 확인하고도. 다 내가 눈먼 탓일까.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다르게 느껴질까. 그러면 이 착각이 가실까.
“…….”
아서가 가만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가 그를 마주 보았다. 아서는 주치의의 아들 테일러를 생각했다. 그는 당신을 볼 수 있겠지. 지금의 당신을. 다음으로 렘브란트와 프랜시스를 생각했다. 그들 모두 당신의 눈을 볼 수 있으리라. 그는 그 사실에 참기 힘든 질투를 느꼈다. 아서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고 그 머리 위에 속삭였다.
“무엇이든 좋소.”
살짝 입술을 대고 그녀의 떨림을 느끼며. 아서는 채워지지 않는 독점욕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