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후계자들 (39/210)

#39. 후계자들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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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64017171.png“어머니는 어때?”

황태자는 황후 마리아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16549664017176.png“고모님요? 뭐 여전하시죠. 내색은 하지 않으셔도 전하 걱정 많이 하십니다.”

황태자는 좀 묘한 표정으로 콧잔등을 만졌다. 걱정……. 이걸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까. 그녀의 걱정이 오히려 카일 황태자는 걱정이라고 해야 할까.

16549664017171.png“……아서에 대해선 별말 없고?”

렘브란트도 좀 쓰게 웃으며 미간을 좁혔다.

16549664017176.png“네……. 저한테 그런 말씀 하실 분은 아니시죠.”

그나마 조금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황태자는 싱겁게 웃으며 마차 등받이에 기대어 말했다.

16549664017171.png“……황실에서 보낸 줄리어스 영지 파견이니까. 혹시 무슨 말 했을까 싶어서 물어봤어.”

렘브란트는 잠시 망설이다, 괜히 황태자에게 불편한 화제일까 싶어 어제는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말을 물어보았다.

16549664017176.png“……많이 곤란하십니까?”

16549664017171.png“좀 두렵지.”

황태자가 인정하며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16549664017171.png“나한텐 은인이야. 형제고. 아서한테 빚이 많아. 하지만 어머니에겐 ‘잠깐만 은인이고 곧 원수’일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좀.”

잠깐 틈을 두고 황태자가 말했다.

16549664017171.png“아서도 이해하고 있는지 나한테 거리 두기 시작했고.”

16549664017176.png“…….”

렘브란트는 웃음기 없이 입매만 올리며 말했다.

16549664017176.png“서운하세요?”

16549664017171.png“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냥 미안하지.”

황태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16549664017171.png“좀 부탁할게. 아서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머니가 이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더라도…….”

황태자가 말을 골랐다.

16549664017171.png“날 위해 그러시는 거니, 내가 어머니를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16549664017176.png“…….”

16549664017171.png“혹시 ‘누군가’가 명령해서 거절할 수 없거든…….”

황태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간단히 말을 맺었다.

16549664017171.png“나한테 말해줘.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잘 정돈된 길에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마차 안을 채웠다.

16549664017176.png“…….”

묵묵히 그를 보던 렘브란트가 담담하게 웃었다.

16549664017176.png“……아서 경께서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사셨네요.”

황태자가 한숨을 쉬며 웃었다.

16549664017171.png“내 마음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어. 괜히 나 때문에 아서가 업보나 샀지.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될까 걱정이야.”

황태자가 헛헛하게 중얼거렸다.

16549664017171.png“그놈은 행복해져야 하는데.”

렘브란트는 잠자코 그를 쳐다보았다.

16549664017176.png“……전하께서는 좋은 지도자가 되실 거예요.”

황태자가 웃었다.

16549664017171.png“벌써 아첨꾼이 있는 걸 보니 성군이 되긴 글렀는데.”

16549664017176.png“진심입니다.”

황태자가 웃으며 화제를 그에게로 돌렸다.

16549664017171.png“넌 어때?”

16549664017176.png“네?”

16549664017171.png“가문을 이어받겠다는 생각은 아직 그대로야?”

아……. 렘브란트가 웃었다.

16549664017176.png“오 년 전 한마디인데 그걸 기억하시네요.”

16549664017171.png“어떻게 잊겠어. 내가 하는 거랑 같은 고민이었는데.”

그런가. 렘브란트는 황태자를 보며 손가락 끝을 몇 번 떼었다 붙였다 하다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었다.

16549664017176.png“……네. 제 생각은 아직 그대로입니다. 제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죄송합니다.”

16549664017171.png“뭘 나한테 죄송해?”

16549664017176.png“난 그러고 싶어도 못 벗어나는데 넌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왜 안 벗어나냐고 하실 것 같아서.”

황태자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16549664017171.png“아하. 뭔가 낭만적인 비난이네.”

16549664017176.png“전하랑 어울리지요.”

16549664017171.png“고평가 고맙다. 하지만 실망시켜서 어떡하지? 이 나락에 나 혼자가 아니라 안심했거든. 나도 못 벗어나는데 너도 그래서 다행이야. 넌 나랑 끝까지 함께하는 거다?”

렘브란트가 소리 내 웃었다.

16549664017176.png“하하하. 그것도 전하랑 어울리네요.”

황태자가 쭉 뻗은 다리를 꼬고 팔짱 낀 팔을 베개 삼아 기대며 말했다.

16549664017171.png“에휴. 너나 나나 라이언 달튼은 못 될 운명이다.”

렘브란트가 웃었다.

16549664017176.png“라이언 달튼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죠.”

그러더니 목소리 톤을 바꾸고 툭 던졌다.

16549664017176.png“하지만 전하는 일단 피앙세부터 만드시고 다시 말씀하시는 걸로. 전하 때문에 저희 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 하고 있는 건 아시죠?”

황태자가 앓는 소릴 내며 이마를 짚었다.

16549664017171.png“그래, 그래. 정말이지 미안하게 됐다.”

이 업보를 어떻게 감당하라고 이렇게 했는지. 한두 해도 아니고 혼인 적령기의 한창 젊은이들을 오 년 동안 붙들어두고 혼인 금지라니.

16549664017171.png“내가 원한 게 이런 그림은 아니었어.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전쟁에 차출된 귀족 자제들을 위해서라는 말에 순간 그럴싸하다 싶어서 뜻대로들 하시라고 했던 건데. 오 년이나 걸릴 줄도 몰랐고…….”

16549664017176.png“알아요.”

16549664017171.png“정말이지 정신 나갔지. 대체 누가 그런 미친 생각을 해낸 거야? 미혼 황태자가 전쟁 나갔다고 금혼령이라니. 역사에서 두고두고 내 선례를 가지고 앞으로 다신 이런 머저리 같은 짓을 해선 안 됩니다, 하는 예시로 아이들 앉은 교실마다 회자 될 게 선하다.”

렘브란트가 웃었다.

16549664017176.png“즉위도 하시기 전에 벌써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셨네요. 역시 성군의 자질이 충만하신 거 아닙니까?”

황태자가 투덜거렸다.

16549664017171.png“쪽팔리니까 그만해.”

머리를 쓸어 넘긴 뒤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16549664017171.png“나도 오 년 전에 결혼할걸 그랬다. 그땐 나도 꽤 인기 있었는데……. 나 출정한다고 눈물 흘려준 아가씨들도 꽤 많았다고.”

렘브란트가 물었다.

16549664017176.png“어떻게, 염두에 둔 레이디는 있으세요?”

16549664017171.png“글쎄다……. 어머니나 아버지께서 염두에 두신 레이디야 있으시겠지만 나는 뭐……. 이렇게 체면 구겨져서 누가 나랑 결혼하겠다 할지 모르겠다.”

렘브란트가 피식 웃었다.

16549664017176.png“별걱정을요. 골든 트로피로서 데뷔탕트의 레이디들에게 에워싸일 걱정이나 하시는 게 더 현실적일 겁니다. 마음의 준비나 해 두세요.”

오 년 동안 칼을 연마하며 기다린 사냥꾼들일 테니. 황태자가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 렘브란트를 향해 눈짓했다.

16549664017171.png“‘렘브란트 이튼 폰 클라인’이야말로 남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않나? 너야말로 영애들이 가만 안 둘 텐데.”

그동안은 일신상의 목표와 금혼령을 핑계 삼아 미룰 수 있었겠지만, 공식적으로 가문을 잇기로 결정했다면, 이제 렘브란트도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 렘브란트가 담백하게 받아쳤다.

16549664017176.png“저는 황태자 전하 뒤에 숨을 예정입니다.”

황태자가 눈을 가늘게 하며 턱을 괴었다.

16549664017171.png“……글쎄? 내가 네 뒤에 숨어야 하지 않을까.”

16549664017176.png“……예?”

황태자가 그를 향해 턱짓했다.

16549664017171.png“내가 아가씨라면 솔직히 황태자비보단 클라인 대공비가 더 되고 싶을 것 같거든.”

부담은 덜 되고 명예는 비슷한 자리니까.

16549664017171.png“게다가 나만 해도 나 같은 남편보단 너 같은 남편이 좋아.”

렘브란트는 순간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되었다.

16549664017176.png“……와우. 그거 참 끔찍하게 영광스럽네요…….”

이야기는 바람과 마차 소리를 타고 가볍게 흘러갔다.

16549664017171.png뭐, 너는 누가 봐도 책임감 있고 좋은 남편이 될 놈이니까. 네가 먼저 가게 될 수도 있겠다.

16549664017176.png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요.

16549664017171.png가는 데 순서 없다.

16549664017176.png이런 데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요…….

16549664017171.png누가 방패가 될지 보자고.

16549664017176.png……골든 트로피가 옆에 있는데 굳이 실버 트로피에…….

16549664017171.png정신 차려. 넌 플래티넘이야.

16549664017176.png……실버든 플래티넘이든 골드 옆에 있으면 티 안 나요.

16549664017171.png하긴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인 건 똑같겠다. 골드든 뭐든.

16549664017176.png…….

  혼인 대기를 당한 채 오 년. 경쟁률은 다섯 배. 진짜 전쟁일 거다. 다시 아서가 미친 듯이 부러워졌다. 그들은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 * * 아서의 앞에서 케이가 보고를 시작했다. 렘브란트 이튼 폰 클라인. ‘클라인’ 일가의 후계자입니다. 마리아 황후의 친오빠인 선제후 ‘카를 클라인 공’의 둘째 아들이고요. 음. 이제는 사실상 맏아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원래 차남이었는데, 형이었던 장남이 죽었거든요.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렘브란트 경에게는 본래 가문을 이어받을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이 사망하며 렘브란트 경에게 그 의무가 떠넘겨지게 되었죠. 그래서 지금은 렘브란트 경이 ‘클라인’ 일가의 후계자입니다. 보통 이럴 때 가문과 작위를 이어받게 된 차남은 행운아라고 여깁니다만……. 렘브란트 경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게……. 사실 날벼락에 가까웠을 겁니다.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의 의무라는 건 기량이 뛰어난 예술가에게는 날개를 꺾이는 거나 다름없는 의무니까요. 근 몇 년간은 화가로서의 활동이 뜸했습니다만, 그 나이대에선 겨룰 상대가 없는 독보적인 화가로 유명했습니다. 하여, 당시 예술계에서도 화제였습니다. 렘브란트 경은 상당히 앞날을 촉망받는 화가였던지라 그분이 갑작스럽게 장남의 의무에 발목 잡히게 된 걸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가문을 이어받게 된다면 예술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건 포기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게라도 어떻게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미룰 수 없겠느냐 말이 많았습니다. 이런 경우, 차남이 원치 않으면 다른 형제들이 맡아줄 법도 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본인이 맡기로 한 듯하더군요. 역량 면에서 렘브란트 경 정도로 가문을 이끌어갈 수 있을 만한 다른 형제가 없긴 했거든요. 귀족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안정적인 사교술이나, 건강 면에서도. 가문을 보호하며 다른 귀족들로부터 가문의 형제들을 지켜 줄 수 있을 만한 가주로서의 기량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클라인 공께서는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다면 가문을 이어받지 않아도 좋다’ 하셨던 듯합니다만. 렘브란트 경은 자신이 아니면 가문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신 모양입니다. 그래도 클라인 공께서는 그분이 포기하지 않길 바라시는 건지. 아직까지 후계자의 의무를 떠넘기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게 해 주고 계신 듯합니다. 이번 초상화 파견도 사실은 그 일환이지 싶습니다. 선제후 줄리어스를 위한 황실의 부탁인 척하지만. 사실 ‘그림’을 그리라고 보내신 거니까요. * * *

16549664017176.png“…….”

돌아온 렘브란트는 이젤에 걸린 하얀 캔버스 앞에 섰다.

16549664017171.png「……하지만 렘브란트. 가끔씩은 책임감을 내려놔도 괜찮아.」

  황태자가 찡그린 콧잔등을 손가락 끝으로 긁으며 웃었다.

16549664017171.png「의외로 땡땡이 좀 쳐도 일이 크게 잘못되진 않더라고.」

  렘브란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연필을 들어 빈 캔버스 위에 아무 의미도 없는 선을 하나 주욱 그어 보았다.

16549664017176.png“…….”

황태자 전하. 땡땡이는 사실 이미 치고 있습니다.

16549664220365.png「렘브란트 경, 클라인 공과 황후 폐하의 전언입니다.」

  프랜시스가 전해 준 말을 떠올렸다.

16549664220365.png「그쪽 상황이 번잡한 것 같으니, 초상화 일이 지지부진하거든 이만 돌아오라 하십니다.」

  렘브란트는 이젤 앞에서 반쪽 팔짱을 꼈다.

16549664017176.png“…….”

이쪽 상황을 전해 들은 아버지께선 내가 줄리어스에서 머무는 게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신 것 같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16549664220365.png「줄리어스 후작에게 말씀 전하고 돌아가실 준비 할까요?」

  렘브란트가 빙긋 웃었다.

16549664017176.png「아뇨. 좀 더 있다가 돌아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프랜시스는 그 대답이 조금 의외라고 생각한 것 같았지만 이내 웃었다.

16549664220365.png「더 있다가 가시게요?」

16549664220365.png「이런 일에 의욕을 보이시는 거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16549664220365.png「이곳 생활이 마음에 드시나요?」

  의욕이라.

16549664017176.png「글쎄요. 생활이 맘에 든다기보다…….」

  며칠 전이었다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라고 말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눈물 젖은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16549664017176.png「그냥,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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