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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남편처럼 (38/210)

#38. 남편처럼20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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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서가 의자를 끌어다 놓고 레이나의 바로 앞에 가까이 앉았다. 무릎이 겹쳐질 정도로 가까워 레이나는 어색하게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서가 얼굴을 가린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것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1654966371961.png“…….”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얹은 레이나의 얼굴이 아서의 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아서가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레이나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빨개졌다.

16549663719615.png“…….”

레이나는 아서가 곧 짧은 농담을 던지며 놀리거나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서는 묵묵히,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잡은 채 오른손 엄지로 화장한 눈꺼풀 위를 살짝 덧그릴 뿐이었다.

1654966371961.png“……지워주면 돼?”

16549663719615.png“네?”

1654966371961.png“전부 다?”

아서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그녀의 눈으로 돌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1654966371961.png“마음에 안 드는 거지?”

16549663719615.png“…….”

레이나는 눈을 깜박였다. 우스꽝스러울 텐데. 아서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레이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진지한 얼굴이 낯설어 머뭇거렸다.

16549663719615.png“……이상하지 않아요? 제 얼굴…….”

아서는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그 말이 웃기다는 듯 살짝 바람 빠지는 미소를 지었다.

1654966371961.png“별로.”

그리고 엄지로 그녀의 눈꺼풀 위를 가볍게 문질렀다.

1654966371961.png“평소보다 조금 더 반짝이긴 하네.”

그리고 손을 내려 살짝 입술에 손끝을 댔다.

1654966371961.png“평소보다 좀 더 붉고.”

아서가 웃으며 레이나를 마주 보고 무릎 위에 손을 내렸다.

1654966371961.png“그래도 예쁜데.”

16549663719615.png“…….”

……예쁘긴 뭐가 예뻐. 뻔한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이나는 당황스럽고 간질간질한 기분 속에서 그를 쳐다보았다.

16549663719615.png“……아서 경, 의외로 립서비스를 할 줄 아시네요.”

아서가 피식 웃었다.

1654966371961.png“당신 외모를 칭찬하는 데 립서비스 능력은 딱히 필요하지 않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순간 진짜 괜찮은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레이나는 얼떨떨하게 거울을 다시 쳐다보았다.

16549663719615.png“…….”

끔찍했다. 놀림 당했다는 생각에 좀 억울해져서 레이나는 원망하는 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16549663719615.png“……거짓말쟁이시네요. 아니면 아주 보는 눈이 없으시거나.”

아서가 짧게 소리 내어 웃고는 웃음기가 담긴 눈으로 다시 그녀를 보았다.

1654966371961.png“그럴지도.”

16549663719615.png“…….”

아서가 화장대에서 깨끗한 흰 천을 들더니 화장수를 적셨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레이나의 얼굴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16549663719615.png“…….”

남자에게 이런 수발을 받고 있자니 어색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16549663719615.png“……제가 할게요.”

레이나가 슬그머니 몸을 빼려 들었다.

1654966371961.png“아냐.”

아서가 좀 더 신중을 기하려는 듯 더 몸을 가까이 붙여 왔다.

1654966371961.png“내가 해 줄게.”

16549663719615.png“…….”

그의 다른 손이 받치듯 레이나의 목덜미를 감쌌다. 아서는 가만히 집중한 채, 그녀의 얼굴 위에서 젖은 천을 움직였다. 그의 연회색 눈이 레이나의 얼굴 위를 조용히 움직였다.

16549663719615.png“…….”

너무 가까운데……. 생각보다…… 창피하다.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꼭…… 입이라도 맞춰 달라는 걸로 보일 것 같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16549663719615.png“…….”

그의 앞에서 맨얼굴을 보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레이나는 잠들 때조차 화장을 거의 지우지 않았으니까.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는 건, 레이나에게 ‘크리스티나’로서의 가면을 한 꺼풀 쓰는 일과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앞에서 전혀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얼굴을 닦아주던 아서가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1654966371961.png“눈 감아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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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663719615.png“…….”

손 위치. 거리. 너무 키스하기 직전의 상황 같다. 레이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저하다 결국 작게 거부했다.

16549663719615.png“……제가 하면 안 될까요. 이거 좀…… 민망하고 어색해요.”

1654966371961.png“난 좋은데.”

아서가 웃었다.

1654966371961.png“우리한테 이런 시간이 부족한 거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는 너무 진짜 남편처럼 말했다. 다정하고 좋은 남편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레이나는 자꾸만 이상해지는 마음을 떨쳐 내려 애쓰며, 짐짓 외면하듯 물었다.

16549663719615.png“……이런 시간이 어떤 시간인데요?”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기분을 내는 시간? 아서가 답했다.

1654966371961.png“둘이서만 보내는 시간.”

16549663719615.png「둘이서만 있고 싶어요!」

16549663719615.png“…….”

그에게 저지른 흑역사 중 하나가 떠올랐다. 뜨끈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레이나가 붉어진 얼굴로 원망스레 시선을 내렸다.

16549663719615.png“……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아서가 웃었다. 레이나는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화제를 바꾸었다.

16549663719615.png“황태자 전하는요?”

1654966371961.png“……카일? 왜?”

레이나가 잠깐 망설이다 작게 중얼거렸다.

16549663719615.png“화장…… 다시 해야 하나 해서요……. 오늘 또 뵐 일이 있을까요?”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를 보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서가 화장을 지워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1654966371961.png“안 해도 돼.”

레이나는 그의 말에 비로소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얕은 한숨을 무의식처럼 내쉬며. 안도의 미소를 지은 그녀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눌렀다. 뒤늦게 조그맣게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16549663719615.png“어제…… 황태자 전하께서 기분 상해하진 않으셨어요?”

아서가 깨끗한 면으로 천을 다시 접으며 말했다.

1654966371961.png“괜찮아. 당신은 나만 신경 써.”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 버렸다. 황태자 때문에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농담해 주는 건가? 아서가 다시 천을 대고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1654966371961.png“술을 못하면 말을 하지 그랬어. 개선식 날 새벽에 그래서 쓰러졌던 건가?”

16549663719615.png“…….”

레이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민망해하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아가씨는 술을 잘 마시는데……. 내가 술을 못 마신다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레이나는 슬그머니 변명했다.

16549663719615.png“원래는 잘 마시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 왜 이렇게 창피하지. 레이나는 다시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16549663719615.png“그냥……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빨리 취했나 봐요.”

아서가 피식 웃었다.

1654966371961.png“그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미소였다. 아서가 입매를 부드럽게 올린 채, 하던 일을 계속하며 물었다.

1654966371961.png“내가 또 알아야 하는 거, 뭐 있어? 그대에 대해.”

그는 또 좋은 남편처럼 물었다. * * * 렘브란트가 추가로 배정받은 별채 앞. 친위대 기사들 앞에 떠날 준비를 마친 황태자가 나와서 섰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준비된 가문의 문장이 없는 마차 몇 대가 황태자와 친위대 기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렘브란트와 프랜시스가 조촐하게 그를 배웅하며 황태자와 악수를 했다. 렘브란트가 웃으며 물었다.

16549663885622.png“이제 마음의 준비 끝나셨습니까?”

황태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콧잔등을 긁었다.

16549663885627.png“……처음부터 하루만 있다 갈 예정이었다니까.”

뒤에서 친위대장 페어만 경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16549663885622.png“아서 경은요?”

16549663885627.png“인사 나누고 왔어. 수도에서 보기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황태자는 하룻밤 사이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하루의 휴식으로 그는 한결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렘브란트에 이어 프랜시스도 황태자와 악수한 후 짧은 포옹을 나누었다.

16549663885639.png“조심히 가십시오.”

황태자가 프랜시스의 팔을 툭 두드려주며 미소 지었다.

16549663885627.png“그래. 황궁에서 다시 만나.”

황태자는 렘브란트에게 물었다.

16549663885627.png“언제 돌아와?”

렘브란트가 미소 지었다.

16549663885622.png“글쎄요. 초상화가 끝나면?”

황태자가 약간 못마땅한 듯 찡그려 웃었다.

16549663885627.png“그거 꼭 해야 해? 초상화 일정 진행도 안 하고 있다며. 대충 들어 보니 후작이 지금 그림 그릴 정신도 아닌 거 같던데.”

그건 그랬다. 렘브란트가 웃으며 답했다.

16549663885622.png“그래도 폐하께 받은 부탁이니까요.”

16549663885627.png“아쉽군. 같이 가면 길동무하며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렘브란트도 솔직하게 아쉬움을 숨기지 않은 채 웃었다.

16549663885622.png“그러게요.”

16549663885627.png“흠.”

황태자가 그를 보며 옆쪽으로 고갯짓했다.

16549663885627.png“잠깐 외성까지라도 같이 나갈래? 중간에 마차 하나 비워 줄 테니 타고 돌아가고. 어제 너무 짧게 만나서 대화다운 대화도 못 했잖아.”

16549663885622.png“음……. 그래도 될까요?”

친위대장은 렘브란트와 카일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카일이 더 이상 탈주하지만 않는다면 사촌 형제든 이복형제든 그가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16549663885639.png“저는 여기서 인사드려야겠네요.”

프랜시스는 자신은 저택에 남겠다며 먼저 황태자와 작별 인사를 했다. 두 사촌 형제가 편히 대화를 나누도록 슬쩍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었다. 그의 배려를 알면서도 사람을 좋아하는 황태자는 아쉬워했다.

16549663885627.png“아쉽네. 금방 또 볼 수 있겠지?”

16549663885639.png“그럼요. 곧 다시 뵙겠습니다. 강녕하십시오.”

16549663885627.png“그래. 프랜시스, 자네도. 포드 백작에게도 안부 전해줘.”

16549663885639.png“예. 올라가자마자 찾아뵙겠습니다.”

16549663885627.png“그래. 기다릴게.”

황태자가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렘브란트도 같은 마차에 오르고. 그들의 마차 앞, 마부의 옆자리에 친위대장이 탔다. 남은 친위대원들도 차례차례 다른 마차에 나누어 올라탔다. 우르르 움직이는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황태자의 군대가 기다리고 있는 주둔지까지 마차를 타고 돌아가 사람을 통해 마차만 따로 돌려보내 주기로 했다.

16549663885627.png“마침 마차가 많아서 다행이네. 개인 마차를 다섯 대나 줬어? 후작가가 손님 편의를 넉넉하게 봐주는 편인가 보군.”

가볍게 감탄하며 자리하는 황태자 맞은 편에 앉으며 렘브란트는 빙그레 웃었다. 아무래도 후작이 황태자가 와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지. 전부 후작이 ‘편히 쓰시라’며 갑작스럽게 준비해 준 마차였지만. 렘브란트는 황태자에게 후작에 대한 좋은 말은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그냥, 후작이 말한 대로 편히 써 줄 생각이었다. 황태자가 가볍게 혀를 차며 불평했다.

16549663885627.png“전쟁 나가 있는 사람한테도 이렇게 좀 해 주지.”

렘브란트가 웃었다. 툭툭. 그가 마차 천장을 두 번 쳤다. 마부가 말채찍을 당기며 마차들이 출발했다. 마차는 이내 저택을 벗어났다. * * * 잘 정돈된 길을 따라 마차가 달려갔다.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거리의 활기 넘치는 소음 사이로 섞여 들었다. 오후의 햇살이 내리는 창가로 가을의 빛깔을 입은 나무들이 지나갔다.

16549663885627.png“어머니는 어때?”

황태자는 황후 마리아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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