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첩보 천재2022.01.06.
후작은 심각한 눈으로 레이나가 보내왔다는 첩보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 ― 아서 경은 버섯을 편식합니다. 】
“…….”
후작 부인은 화가 나서 벌게진 얼굴로 소파에 앉은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쌍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아? ……내가 우스워?!”
“…….”
로렌슨 선생이 옆에서 그녀의 맥을 짚고 혈압을 재고 있었고, 허스트 부인이 그녀에게 냉수 대접을 건네주었다.
“…….”
레이나. 크리스티나 대신 지금 아서의 아내 역을 하고 있는 하녀. 후작, 안토니오 줄리어스는 얼마 전부터 그 하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식지에 ‘그 기사’가 떠서 위기에 빠져 있던 줄리어스를 기사회생시킨 그 순간부터였다. 【 레이디 크리스티나, 아서 경과 함께 참전 용사 유가족 가정 방문, 뒤늦게 밝혀져 화제! 】 ― 그분이 레이디 크리스티나이신 줄 몰랐어요. ― 아서 경이랑 같이 오셨는데, 뒤에서 조용히 우시더라구요…….
“…….”
며칠 전, 그가 리오넬이라는 기사의 따귀를 때린 사건이 커져 줄리어스의 명성이 곤두박질칠 뻔했던 때. 줄리어스가 그토록 큰 출혈을 감수하고 힘들게 얻어낸 ‘아서의 인터뷰’보다 줄리어스의 기사회생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 바로 그 사건이었다. ‘레이디 크리스티나’의 참전 용사 유가족 방문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가 되었던 것.
“…….”
유가족을 방문하는 아서의 뒤에서 울고 있었다고? 크리스티나였다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그 일은 후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하녀 애가 아서의 옆에 있었던 덕에 생각지도 못한 이득을 보았다. 하녀 애가 딸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것보다 처신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덕분에 후작의 마음속에선 레이나에 대한 평가가 후했다. 아마 사위가 끼고 있는 정부를 향한 장인의 평가로는 세상에서 제일 후할 것이다. 처음에는 당혹스럽고 화가 났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서가 끼고 있던 게 그 애라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 하녀 애가 아서 옆에 크리스티나인 척 있는 것이 훨씬 믿음직했다. 그 애는 최소한 자기 목숨이 귀한 만큼 큰 사고를 치지 않을 거 아닌가. 예민한 시기였고, 그의 딸자식은 막돼먹은데다 결코 조심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솔직히 후작은 이렇게만 해 준다면 좀 더 오랫동안 그 하녀 애한테 크리스티나의 대역을 맡기고 싶기까지 했다. 그의 선제후로서의 지위가 안정되고, 줄리어스의 명성이 공고해지기까지, 조금만 더.
“…….”
겸사겸사 딸의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 놓고 싶기도 하고. 황태자나 렘브란트 경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 텐데……. 후작은 가만히 그 애, ‘하녀 레이나’가 가져왔다는 첩보 쪽지를 바라보았다. 【 ― 아서 경은 버섯을 편식합니다. 】
“…….”
후작의 무의식 속에는 이 애가 뭔가 그럴싸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겨 있었다. 이 애는 쓸모 있는 애였다. 그의 딸자식보다 훨씬 더. 후작은 유심히 쪽지를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거 혹시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거 아니야?”
흥분으로 씩씩거리던 후작 부인이 머리를 짚은 채 째릿 그를 노려보았다.
“다른 의미는 무슨 다른 의미!”
“…….”
후작이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 말했다.
“버섯을 편식할 만한 이유를 생각해 봐.”
버섯이고 나발이고 내가 그놈 자식 편식하는 이유까지 고민해야 하냐고 소리치려는데 후작이 말을 이었다.
“심각한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
순간 후작 부인의 눈이 커졌다. 후작은 턱을 만지며 쪽지를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목숨이 어떻게 될 수 있는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하는 건 확실히 큰 약점일 수 있지.”
“!”
후작 부인이 그의 말에 눈빛이 바뀌자, 후작은 힐난하듯 혀를 차며 후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 덕분에 아서는 그 하녀 애가 자길 지켜보고 있는 걸 짐작하고 있을 테니, 자기한테 그런 알레르기가 있다면 절대 들키지 않으려고 하고 있을 터.”
“……!”
후작은 점점 스스로의 말에 설득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걔로선 알레르기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을 거야. 그저 관찰만 할 수 있을 뿐이겠지.”
이윽고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린 후작이 테이블 위에 놓인 쪽지를 가리키며 딱 잘라 말했다.
“아서에게 버섯 알레르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확인해 보라는 의미로, 그 하녀는 이 말을 보낸 거야.”
“!”
후작이 의미심장하게 턱을 매만졌다. 게다가 이 내용……. 【 ― 아서 경은 버섯을 편식합니다. 】
“혹시 쪽지를 들키더라도 문제가 없을 내용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쓴 거로군.”
“!”
후작은 레이나의 주도면밀함을 깨닫고 감탄했다. 첩보 천재 아닌가? 만약 정말 심한 버섯 알레르기가 있는 거라면, 이건 가치가 있는 정보다. 물론 결정적인 약점이 될 정도의 심각한 알레르기까지는 아닐 수도 있지만……. 겨우 일주일 만에 아서가 버섯을 피하는 정황이 있는 걸 포착하고, 알레르기가 있을 가능성에 착안해 우리에게 아서의 알레르기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고 한 거라면. 그것만으로도 이 하녀 애는 짧은 시간 안에 제법 괜찮은 성과를 올린 것이었다. 그것도 그녀의 첩보 활동을 주변에서 전부 눈치채고 있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말이다. 치밀한 관찰력. 탁월한 통찰력. 주도면밀한 일 처리. 타고난 거 아닌가? 후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에 손깍지를 하고 다리를 꼬았다.
“그 레이나라는 애, 제법 쓸모 있는걸?”
기껏 유능한 하녀가 이런 정보를 가져다주어도 그런 명징한 속뜻 하나 알아채지 못하냐는 듯이 아내를 비웃으며 후작이 후후 웃었다.
“당신 말대로야. 그 애는 살려둘 가치가 있었어.”
후작이 오만한 눈빛으로 허스트 부인을 향해 명령했다.
“아서에게 버섯 알레르기가 있는지 확인해 봐. 아, 하지만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버섯을 너무 많이 먹이지는 않도록 조심하고.”
제법 너그럽게 덧붙여 주었다.
“그저 확인만 해 두는 거다.”
혹시라도 소중한 아서를 실수로 죽여 버리게 되면 안 되니까. 후작은 의기양양해져서 이미 아서의 목숨줄을 쥐기라도 한 듯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 * * 돌아온 아서는, 리오넬로부터 자신이 없었을 때, 레이나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드레스를 입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셨고요.”
“…….”
그제야 아서는 하녀에게 레이나의 옷을 갈아입혀 달라는 부탁을 하는 걸 잊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럴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아서가 묵묵히 듣는 가운데 리오넬의 보고가 이어졌다.
“딱히 컨디션이 나빠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옷 갈아입으신 뒤, 기다리던 주치의가 이마 상처를 봐 주었습니다. 드레싱은 오늘로 마지막이라더군요. 상처는 다 나으셨다고요.”
“……그래?”
“네. 흉터 없이 잘 아물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리오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후에 주치의와 나눈 대화가 좀 신경 쓰입니다.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아서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눈빛으로 뒷말을 재촉했다.
“주치의가 다음 주에 출장 강의가 있다며, 본인 대신 아들을 보내겠다더군요.”
아서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다.
“…….”
계속하라는 시선. 보고가 이어졌다.
“자기 없을 때 아가씨 봐 드릴 겸, 감사 인사드릴 겸, 아들이 찾아뵙게 하겠다 했습니다. 아들에게 새 일자리를 주셨는데 미처 인사도 못 드렸다고요. 어제 만나고 왔는데, 아들이 잘 적응하고 있더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
아서가 피식 웃으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랬더니 아내가 뭐래?”
아서가 그를 쳐다보며 시가에 불을 붙이는 사이 리오넬이 보고를 이어 갔다.
“다행이라고요. 어려운 점은 없냐고 물으셨습니다. 주치의는, 뭐 환자도 건강하고, 늘 기분 좋게 대해 주셔서 힘들지 않게 일하고 있다. 그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
아서가 조용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리오넬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 후엔 평소처럼 약차를 드시고, 주치의는 돌아갔습니다.”
“…….”
아서는 천천히 그 자리에서 시가 하나를 다 태웠다. 그리고 수고했다며 리오넬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 싱긋 웃은 뒤, 신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
“…….”
솔직히 레이나는 메이크업에 일가견이 없었다. 마리나의 메이크업이 대단한 기술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뿐. 대개 대단한 기술이 그렇듯, 전문가가 하면 쉬워 보이지만 막상 따라 하려고 하면 흉내 낼 수 없고 똑같이 나오지 않았다.
“…….”
하지만 안목 없는 레이나도 이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브로디?”
“미, 미안해!”
브로디는 열심히 이것저것 덧칠하고 문질러 보며 애를 쓰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 느낌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브로디가 평소에 해 주던, 적당히 깨끗하고 청순해 보이던 ‘평범하게 예쁜’ 느낌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콧대에 들어간 하이라이트는 그녀의 콧날을 번쩍이는 계단 난간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볼에 들어간 과한 홍조는 뺨을 한 대 맞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금빛 펄을 촘촘히 바른 눈꺼풀은 너무 번쩍여서 금가루를 바른 비단벌레 같았고, 금색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연지를 바른 입술도 과했다. 홍조를 너무 많이 칠한 것 같아 당황한 브로디가 뺨을 살짝 문질러 지우려고 시도하자 뭉친 파우더가 얼룩지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브로디가 당황하며 손을 대면 댈수록 이상해졌다.
“…….”
“…….”
레이나는 브로디를 이만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로디, 이건…….”
덜컹. 그때, 문이 열리며 아서와 리오넬이 들어왔다. 헉. 레이나의 뺨에 홍조를 다시 칠하던 브로디가 숨을 들이키며 얼어붙었다.
“…….”
아서의 시선이 거울 너머 레이나에게로 향했다.
“…….”
레이나의 얼굴을 본 리오넬 경이 아서의 뒤에서 흠칫 숨을 들이켜며 멈추었다.
“…….”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
브로디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벌벌 떨다 툭 붓을 떨어뜨린 브로디가 울먹이며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해요, 아가씨!”
당황한 레이나가 엎드린 브로디를 내려다보았다.
“제, 제발 저 버리지 마세요.”
레이나는 황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괘, 괜찮아. 괜찮아. 어떻게 항상 완벽하겠어. 가끔 실수할 때도 있는 거지…….”
레이나는 말을 하면서도 아서의 눈치를 보고 당황했다. 나 지금 저분들 앞에서 브로디를 이렇게 달래도 되는 건가? 크리스티나 아가씨라면 절대로 봐주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아서 경도 리오넬 경도 브로디도 다 내가 크리스티나 아가씨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 나 혼자 크리스티나 아가씨에 빙의한 메소드 연기를 펼치며 브로디한테 재떨이를 던질 순 없었다. 몰라. 이젠 다 모르겠다. 나도 울고 싶다. 레이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브로디를 달랬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개성 있고 맘에 들어.”
크흡. 뒤에서 리오넬 경이 헛기침을 하며 당혹스러운 웃음을 참았다. 다음으론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나의 얼굴은 능히 진중한 기사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
아서는 눈짓해 리오넬을 나가게 하고, 리오넬이 예를 표하고 물러가자 혼자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고했어. 이만 나가 봐.”
브로디를 향해서도 축객령이 떨어졌다.
“네, 네, 아니, 저, 아가씨 화장을…….”
브로디가 마치지 못한 업무를 말하며 더듬더듬 울먹였다. 아서가 싱긋 웃었다.
“괜찮으니 나가 봐. 내가 해 줄 테니.”
네? 뭘요? 아서가 문밖으로 고갯짓했다.
“나가.”
“…….”
레이나도 브로디도 황망해졌지만, 브로디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며칠 전 식사 때의 사건 이후로 브로디와 마리나는 아서를 조금 무서워하고 있었다. 브로디는 슬금슬금 아서를 피하면서도 간절한 눈으로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나 버리지 마…….
“…….”
그리고 꾸벅 인사를 하고 뒷걸음쳐서 방 밖으로 나갔다.
“…….”
“…….”
방 안엔 둘만이 남았다. 우스꽝스러운 화장을 한 채 한 손으로 얼굴 아래쪽 반을 가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나 앞에서, 아서는 묵묵히 장갑을 벗었다.
“…….”
레이나는 화장대 앞에 앉은 채 아서의 시선을 피했다. 이 창피한 화장을 빨리 지우고 싶었다. 드르륵. 아서가 의자를 끌어다 놓고 레이나의 바로 앞에 가까이 앉았다. 무릎이 겹쳐질 정도로 가까워 레이나는 어색하게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