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합당한 경계2021.12.26.
“아서…….”
닿은 채 목줄기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몸을 울렸다. 아서가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목에 입술이 닿아 있었다. 간지러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아서는 거의 팽개치듯 레이나를 밀쳐 제게서 떼어 놓았다.
“……!”
확 얼굴에 열기가 몰렸다. 다른 곳에도. 내밀린 레이나가 스르륵 기울어 침대 헤드에 머리를 부딪히기 직전, 아서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받쳤다.
“……하아.”
안도의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천 하나를 사이에 둔 생생한 숨결과 온기에 당혹감이 퍼졌다.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느라 다시 닿은 몸을 통해 조금 전에 놀라 피했던 감각이 다시 전해져 왔다. 세상모르고 평온하게 새근거리던 그녀가 서늘한 피부를 찾으며 품을 파고들어 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오 년 전 그녀를 품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자신이 지금 당장 저지를 수 있는 일이 뻔한 미래를 보듯 눈앞에 펼쳐졌다. 아서의 손끝이 움찔했다. * * * 쾅. 응접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두 사람분의 이불을 가지고 들어온 아서가 하나를 황태자에게 집어 던졌다.
“?”
황태자가 깜짝 놀라 자신의 얼굴에 던져진 이불을 받아들고 얼떨떨하게 쳐다보는 사이. 아서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털썩 구석의 소파에 처박혔다. 그리고 황태자를 외면한 채 거기에 누워 제 몫의 이불을 몸에 덮었다.
“…….”
“아서?”
“…….”
아서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나랑 자려고 온 거야?”
슬그머니 황태자가 물어 왔다. 젠장. 아서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며 자기 얼굴 위로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버렸다. * * *
전쟁으로 인한 자숙을 핑계 삼아. 겸사겸사 미혼인 황태자를 위해 황태자비 선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귀족 영애들을 모두 미혼의 상태로 묶어두기 위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전쟁의 의무에 불려 나간 혼인 적령기의 젊은 남성들이 귀환 후 혼인 시장에서 손해를 보거나 박탈감을 느끼게 되지 않도록 배려해 주기 위해. 제국에선 귀족들을 대상으로 혼인 금지령과 사교 모임 금지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평민들은 자유롭게 혼인할 수 있었지만, 지체 높은 귀족들의 경우는 법황청의 정식 혼인 허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혼인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덩달아 젠트리 계층으로의 신분 상승을 준비하는 중산층 가문의 사람들도 스스로의 명예와 품격을 증명하기 위해 알아서 혼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교류를 시도하길 멈추었다. 그것이 귀족적이고 명예를 아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물론 귀족의 혼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귀족이 비공식적으로나마 혼인을 하는 것은 혼인 전에 아이가 생긴 경우뿐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법황청의 혼인 허가가 나오지 않는 불명예스러운 결혼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공개적 혼인은 자연스럽게 뚝 끊겼다. 처음엔 모두가 전쟁이 기껏해야 일이 년이면 끝나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그 일을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오 년이나 이어졌고, 덕분에 가장 활발하게 혼인 논의가 오가는 나이인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귀족 여성들은 모두 혼인하지 못한 채 종전의 적령기를 넘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다들 애타게 사교 모임 재개와 금혼령의 해제를 기다리고 있고요.”
“…….”
케이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올봄의 데뷔탕트는 말씀하신 대로 승전과 제국의 정상화를 상징하는 큰 행사가 될 겁니다. 귀족들 사이에선 이미 이야기가 한번 돌았다더군요.”
“…….”
케이는 명망 있는 귀족가의 자제였다. 그에겐 10대에서 30대 사이의 미혼, 기혼 누이들이 있었기에 그가 말해 주는 사교계 소식은 꽤 믿을 만했다. 귀족가와 사교계의 일에 대해 잘 모르는 다른 기사들은 묵묵히 아서에게 하는 그의 보고를 함께 들었다.
“그걸 시작하는 오프닝의 의미로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나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오 년 전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한 채 지나가고 만 22살의 레이디인데다, 이 전쟁을 끝내준 아서 경의 신부이기도 하고, 오 년을 헤어져 있던 약혼자와의 재회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니까요.”
“…….”
케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줄리어스가 선제후가 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니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아서 경과 데뷔탕트의 첫 춤을 추는 건…… 몹시 상징적인 일이 될 겁니다. 줄리어스 입장에선 최상위 계층으로서 사교계 입성이고, 귀족들 입장에서도 사교 시즌의 정상화를 상징하니까요.”
중간중간 머뭇거리는 타이밍마다, 데뷔탕트를 피할 수 없음을 전하는 케이의 곤란함이 전해졌다. 어려운 고비를 넘긴 케이가 마침내 짧게 말을 맺었다.
“하여 말씀하신 대로, 초대장이 온다면 어지간한 핑계로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트리스탄이 짧게 생각하다 물었다.
“비슷한 의미의 ‘정상화’를 상징할 수 있는 남성 후보로 황태자 전하가 계시지 않나요?”
“하지만 약혼녀가 없으시니 아무래도……. 데뷔탕트의 첫 춤은 의미가 크기도 하고요. 이번 사교 시즌에 황태자비 후보를 고르실 텐데 가족이나 특정 영애랑 첫 춤을 추시는 것보다는……. 역시 아서 경께서 아내와 함께 나서 주시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케이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 덧붙였다.
“까놓고 말해서…… 황태자 전하께서 아서 경을 제치고 첫 춤으로 나서시면 마리아 황후가 눈치 줘서 경의 자리를 빼앗은 걸로 보일 우려가 있어서……. 황실에서도 안 그러고 싶어할 겁니다.”
아, 나 뭐가 이렇게 복잡해? 하는 루칸의 중얼거림을 사이에 끼고 케이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황실에서도 이제 아서 경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예우해 주려고 할 거라……. 사실 그쪽에선 아서 경이 거절할 수도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겁니다.”
아서가 피로한 듯 눈을 감으며 의자 등받이 위로 머리를 젖혔다.
“……내 쪽에서 카일 황태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 하면…….”
케이가 곤란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오히려 황실의 호의를 냉소하는 걸로 비칠 수 있어요. 아서 경이 황실을 곤란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할 거예요.”
트리스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할 수 없네요. 어차피 그전에는 이 상황도 정상화가 되어 있겠죠. 문제는 황태자 전하께서 이미 ‘부인’의 얼굴을 보셨다는 건데…….”
루칸이 눈을 굴렸다.
“데뷔탕트만이라면 그냥 거기엔 ‘지금 부인’ 데리고 다녀오시면 안 되나요?”
케이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건 말도 안 되지. 가서 춤만 한 번 추고 오는 걸로 끝이 아니잖아. 몇 주 동안 머물면서 황제 황후 폐하 부처는 물론이고 온갖 귀족들한테 다 얼굴 팔리고, 중요한 사람들하고는 친분까지 쌓고 와야 할 텐데.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거기 대역을 보내려고 하겠어?”
루칸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런 겁니까? 나야 뭐, 평민이니 알 턱이 있나.”
케이가 말했다.
“지금은 관계가 미묘하다고 해도 앞날을 생각하면 평생 줄리어스 영지를 돌볼 사람이 가는 게 맞아. 루칸, 자네도 슬슬 관심 갖고 들어 둬. 자네도 곧 남작위를 받을 텐데, 사교 활동 시작해야지. 말해 두겠는데 신부 후보를 소개받을 때는 꼭 나한테 물어보고, 먼저 예의를…….”
루칸이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 사절했다.
“아, 난 귀족 아가씨 모시고 시중들며 사는 거 성미에 안 맞아. 매일 밤 내 천박함에 당혹스러워할 마누라라니 사절이라고.”
케이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설마 매일 남편을 당혹스러워할 리가 있겠어? 귀족도 사람인데 그거 귀족에 대한 편견이라고. 자네가 그런 사람이랑 결혼할 리도 없고…….”
루칸은 잘라 말했다.
“아, 됐어요. 결혼은 그냥 내 운명에 만나지는 아가씨랑 할 겁니다. 내 수준에 맞는, 나랑 비슷한 평민 중에, 내 맘에 드는 예쁜 아가씨랑. 소개는 안 받습니다.”
트리스탄이 웃었다.
“기준 참 분명하네.”
케이가 설득을 시도했다.
“아니 어떻게 얼굴만 보고 신부를 골라. 참전 보상금도 넉넉히 받았고 작위도 받을 테니 충분히 예쁘면서도 자네 좋다는 사람이 줄을 설 텐데, 훨씬 좋은 조건의 착한 신부도 얼마든지…….”
루칸이 짧게 콧방귀를 뀌며 가슴을 폈다.
“그럼 더 이득이군요. 어지간하면 내가 원하는 사람이 날 거절 안 할 만한 수준은 내가 된다는 거 아닙니까? 그걸로 충분해요. 이쁜 마누라가 날 만난 거에 평생 기뻐해 준다면 더 좋고.”
인생은 즐겁게 살아야지. 트리스탄이 웃었다.
“이거저거 다 원하는 것보다 목표가 하나 딱 분명하면 원하는 걸 얻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
케이도 결국 피식 웃으며 쓸데없는 조언을 하길 관두었다. 트리스탄이 화제를 본론으로 돌렸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비밀로 해 달라고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겠네요.”
기사들이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전에 줄리어스 쪽이랑 사기 결혼 건 보상 이야기 마치고 신부 위치 정상화해야 할 거고요.”
“괜히 시간제한이 생긴 기분이네.”
“시간제한은 그쪽에 생긴 거지. 우리가 무슨 상관?”
“…….”
아서는 말없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다. 기사들이 저희들끼리 말을 이어갔다.
“사교 시즌은 언제 재개되죠?”
“내년 봄. 3월. 그때 데뷔탕트가 있을 거라더군요.”
“시간은 넉넉하네요.”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아서 경은 수도의 개선식에도 다녀오셔야 하잖아요. 개선식을 위해 수도로 갔다가 다시 줄리어스 영지로 돌아오시면 최소한 한 달 반은 사라질 텐데. 그 후에 다시 데뷔탕트를 위해 수도로 가려면 늦어도 2월부터는 준비해야 할 거고…….”
“음……. 왔다갔다 바쁘긴 하겠네요.”
“우리가 걱정할 거 없다니까요? 줄리어스가 알아서 하겠지.”
“…….”
아서는 그동안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데뷔탕트. 아내. 정상화. 기사들과 이야기하던 트리스탄이 아서를 향해 물었다.
“……어차피 아시게 될 거라면 전하께 미리 말씀드리고 방법을 강구하는 방향도 고려할까요?”
아서는 바로 말했다.
“아니. 황태자 쪽에는 일단 비밀로 해. 다른 방법이 없을지 좀 더 고민해 보겠다.”
아서가 황태자를 상대로 세우는 벽이 과하다고 느낀 루칸이 눈을 굴렸다. 아서만큼 존경하는 건 아니지만, 루칸과 기사들도 아서에게 잘해 주고 소탈한 황태자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황태자는 이런저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서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힘이 되어 주고 싶어 했다. 가끔은 아서가 그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았다.
“……각하. 황태자 전하는 각하 편입니다. 힘이 되어 주려고 하실 텐데요.”
“아니.”
아서가 담담하게 잘라 말했다.
“줄리어스는 이제 미우나 고우나 내 가문이다. 그리고 황실은, 내 ‘뒷배’가 되어 줄 순 있어도 ‘내 가문’이 될 순 없어.”
그의 말을 이해한 케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어렴풋이 이해한 트리스탄이 힐긋 케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해하지 못한 루칸은 의아한 채로 아서를 쳐다보았다.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카일이 진심인 건 알아. 하지만 날 도와주겠다고 황태자가 섣불리 황실을 움직였다가, 마리아 황후 측이 나를 보호한단 핑계로 줄리어스를 엉망으로 만든다면 그건 내 손해야.”
“…….”
루칸이 입을 다물었다. 아서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전장에선 카일이 내 가족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카일이 날 염려하는 것도 알고 있고,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도 생각해. 하지만, 앞으로 있을 싸움에서 그는 더 이상 내 편이 아니야.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
기사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서는 분위기가 딱딱해진 것을 풀어 주듯 미소 지었다.
“……카일에겐 내 사정을 말하지 마라. 그게 카일과 적이 아니라 친구로 남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네.”
루칸을 포함해 기사들이 대답했다. 트리스탄이 물었다.
“……렘브란트 경은요? 그쪽도…….”
아서는 시가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며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본 건 비밀로 해 주겠다 하셨다’던 레이나의 말을 떠올렸다.
“…….”
꾸미지 않은 모습. ‘하녀’인 상태로 만났다는 거겠지. 아마도, 그쪽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일 터.
“…….”
「레이디.」
그녀의 귓가에 작고 빠르게 말하던 렘브란트가 떠올랐다.
「놀라지 말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다음으로 그녀의 팔을 잡은 채 그를 바라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 아서 경.」
「잠깐 부인과 대화해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오러를 통해 들었던, 레이나를 데리고 저편으로 가서 하던 말까지.
「괜찮아요?」
「혹시……. 도움이 필요해요?」
「후작 내외라든가. 아서 경이라든가…….」
「누군가 당신을 힘들게 하고 있나요?」
「……어떡하지? 돌아가야 할 텐데. 눈이 붉네요. 운 티가 나요.」
「뭐라고 입을 맞출까요?」
아서는 습관처럼 미소 지었다. 왠지 머리가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서가 담담하게 시가를 입에 물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야말로 황실 사람이다. 특히 마리아 황후 쪽 사람이지.”
“…….”
기사들은 마땅히 예상했던 대답이라는 얼굴로 끄덕였다. 아서가 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재떨이에 시가를 털었다.
“경계해. 아내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기사들이 대답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