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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오늘만 재워 줘 (33/210)

#33. 오늘만 재워 줘2021.12.23.

16549661938007.png“오늘 하룻밤만…… 안 될까?”

16549661938013.png“되겠습니까?”

황태자가 머쓱하게 뒤통수를 만졌다.

16549661938007.png“……신혼부부에게 너무 민폐인가?”

16549661938013.png“잘 아시네요.”

황태자는 서운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서를 쳐다보았다.

16549661938007.png“……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이야? 너는 매일 레이디랑 같이 있잖아. 나한테 하루도 못 내줘?”

어딜 그런 어림없는 비교를.

16549661938013.png“황태자 전하랑은 지난 오 년 동안 같이 있었잖아요.”

16549661938007.png“앞으로는 없을 거 아냐. 넌 서운하지도 않냐?”

16549661938013.png“지긋지긋합니다. 저야말로 이해가 안 가네요. 왜 나랑 같이 있고 싶다는 겁니까?”

레이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황태자 전하한테 저래도 되는 건가? 아서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가차 없이 고개를 돌려 뒤에 난감하게 서 있는 리오넬 경에게 말했다.

16549661938013.png“후작 부인한테 가서 황태자 전하 오셨다고 말씀드리고 귀빈실 하나 내어 달라고 해.”

황태자가 다급하게 리오넬 경을 잡고는 아서를 향해 소리쳤다.

16549661938007.png“아, 진짜 너무하네! 내가 진짜로 잘 곳이 없어 이러겠어? 마지막으로 너랑 술 한 잔 기울이고, 아내 분한테 널 잘 부탁한다, 이런 말도 좀 하고,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도 하고. 그러고 싶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아서가 싸늘하게 맞받아쳤다.

16549661938013.png“부탁하긴 뭘 부탁합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절 책임지신 적이라도 있습니까? 그냥 황실로 돌아갈 날을 하루라도 늦추고 싶은 것뿐이잖아요.”

황태자가 뻔뻔하게 배시시 웃었다.

16549661938007.png“잘 아는군. 한 번만 살려줘라.”

아서가 가차 없이 받아쳤다.

16549661938013.png“또 살려 드려야 됩니까?”

16549661938007.png“한 번만 더.”

아서의 낯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16549661938013.png“미룬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제발 좀 그만 가요!”

레이나는 얼어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래도 되는 건가? 아니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어도. 아니면 그냥 형제들의 스스럼 없음인가?

16549661966884.png“!”

황태자가 전략을 바꿨는지 레이나를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자못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

16549661938007.png“레이디.”

얼어붙을 틈도 없이 아서가 팔을 뻗어 카일 앞을 막았다.

16549661938013.png“내 아내 곤란하게 하지 마요.”

황태자가 정중히 물었다.

16549661938007.png“레이디. 곤란하십니까?”

역시 레이나가 입도 뻥긋할 새 없이 아서가 답했다.

16549661938013.png“이런 게 곤란하게 하는 겁니다. 위계에 의한 위력으로 거절하지 못하게 하고 있잖아요.”

황태자가 억울하다는 듯 받아쳤다.

16549661938007.png“나한테 위계에 의한 위력이 어디 있냐? 너한테도 안 통하는데.”

아서가 구겨진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16549661938013.png“뭘 모르는 척이에요? 카일, 당신은 황태자라는 이름 자체의 위엄이…….”

16549661938007.png“그거 이미 ‘찬란한 샛별’의 위엄 앞에 다 구겨진 지 오래야. 너야말로 뭘 모르는 척이야?”

레이나는 마음이 철렁해 표정을 굳혔다. 황태자가 그 소식지를 봤구나. 황태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레이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아서에 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소식지를 섭렵한 터라 아서가 처한 정치적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찬란한 샛별’ 혹은 ‘황실의 떠오르는 빛’은 여기저기서 아서를 비유하는 데 많이 쓰는 말이었다. 아서에 대한 칭찬은 황태자에 대한 조롱으로 들리기 쉬운지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중엔 은유를 했음에도 위험해 보이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제국의 차기 태양’이 ‘눈부신 샛별’ 앞에 빛을 잃었다는 말 같은 거. 황태자 전하가 그걸 봤다면 분명 기분이 상했을 것이었다.

16549661966884.png“…….”

레이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아서와 황태자의 눈치를 보았다.

16549661938013.png“체통 좀 지켜요!”

16549661938007.png“무안 주고 있는 게 누군데!”

16549661966884.png“…….”

이래도 되는 건가? 카일 황태자는 아서 덕에 목숨을 구했지만, 분명히 체면을 구겼다. 그리고 사생아 아서는 오히려 그를 구한 일로 인해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지나친 유명세와 황태자를 능가한 인기, 그로 인한 황후 가문의 견제. 비빌 언덕 없는 사생아의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감사 인사를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진정성을 의심받아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레이나는 이런 위험한 대화를 듣고만 있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크리스티나’라도 끼어들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 아닌가? 오히려 스스럼없이 저렇게까지 말할 수 있으니 괜찮다고 봐도 되는가? 혹시라도 아서 경은, 내가 ‘가짜 크리스티나’이기 때문에 황태자를 상대로 무리한 거절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가짜만 아니었어도 아서 경이 황태자를 상대로 저렇게까지 무리한 거절을 하지 않아도 됐을까? 황태자는 그저 사람 좋은 낯으로 아서를 졸랐다.

16549661938007.png“한잔만 하자. 진짜 마지막이잖아.”

아서는 경멸하는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16549661938013.png“이미 마지막이라면서 저번에 저한테 황명으로 술 먹이셨잖아요. 또 황명입니까?”

황태자는 화들짝하며 부정했다.

16549661938007.png“아니, 아니.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냥 제안, 부탁, 권유, 그런 거…….”

아서가 칼 같이 단어마다 힘주어 끊으며 거절했다.

16549661938013.png“당신이랑, 다신, 술 안 마신다고 했죠.”

황태자가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16549661938007.png“냉정해…….”

아서가 가차 없이 미간을 구기며 손을 내저었다.

16549661938013.png“그만 나가 주시겠습니까?”

황태자가 씁쓸하게 투덜거렸다.

16549661938007.png“……치사한 녀석. 그래, 넌 아내 있어서 좋겠다. 아내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아서가 피로한 얼굴로 다른 데를 보며 이마를 짚은 손을 쓸어내렸다.

16549661938013.png“황태자 전하도 곧 결혼하실 거잖아요. 뭣 때문에 오 년 동안 사교 모임이 금지가 됐는데. 이러니저러니 장병들을 위해서인 척해도 사실상 전하 때문이었던 건 아시죠?”

황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16549661938007.png“그래. 덕분에 부러워도 부럽다고 말도 못 하고 있잖아.”

16549661938013.png“뭐가 부럽단 겁니까?”

16549661938007.png“아서 너도 부럽고, 라이언 달튼도 부럽다. 약혼자라도 있었어야 라이언 달튼이 될지 말지 고민이라도 하지 이건 뭐…….”

16549661966884.png‘라이언 달튼.’

순간 그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아서와 레이나의 눈이 마주쳤다. 부끄러운 말도 아니었는데 어색하게 레이나의 얼굴이 은은히 달아오르며 먼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짧게 그런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돌린 아서는, 어딘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16549661938007.png“…….”

황태자는 천정을 보며 한숨만 푹 내쉬고 있었다. ……뭘 알고 하는 소린가? 황명으로 술을 마셨던 그날, 아서는 끝내 기억이 끊겼다. 내가 그날 뭘 말했나? 황태자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와인 병을 한쪽 팔에 안아 내렸다. 그리고 비로소 포기한 듯 레이나에게 인사했다.

16549661938007.png“실례했습니다, 레이디. 형제끼리 너무 격식 없는 모습을 보였네요.”

깜짝 놀란 레이나가 황급히 치맛자락을 들고 허리를 숙여 늦은 예를 표했다.

16549661966884.png“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16549661938007.png“방금 전에 아서랑 했던 말들은 대체로 장난이었으니까 너무 맘에 두지 마세요.”

대체로 장난이었으면 무엇은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까. 레이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16549661966884.png“저……. 그럼 전하께선 어디서 주무시나요?”

황태자가 방긋 웃었다.

16549661938007.png“아, 저는 노숙하면 됩니다.”

16549661966884.png“…….”

아서가 정색했다.

16549661938013.png“카일.”

황태자가 말했다.

16549661938007.png“원래 렘브란트에게 신세 질 예정이었습니다만, 누구 때문인지 렘브란트와 프랜시스의 처소는 이미 친위대장의 감시하에 떨어져서요. 친위대를 따돌리고 잠시의 자유와 휴식을 바라 외도 중인 ‘황태자 전하’는 그곳에 가서 잘 수가 없네요.”

16549661966884.png“…….”

황태자는 젠틀한 태도로 상세하게도 말해 주었다.

16549661938007.png“조금도 개의치 마세요. 노숙 정도야 전장에선 오 년 동안 매일 하던 일인데요, 뭐. 익숙합니다.”

16549661966884.png“…….”

결국 레이나는 눈치를 보며 아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서가 끔찍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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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리고 아서는, 레이나가 개선식 첫날 쓰러진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여자……. 술을 못 하는군. * * * 비싼 이복형제를 상대로 힘들게 얻어낸 마지막 술자리는 대화다운 대화를 시작해 보기도 전에 파하고 말았다. 카일이 가져온 와인 한 병을 채 비우기도 전이었다. 아서는 와인 한 잔에 쓰러진 레이나를 안고 일어섰다.

16549661938007.png“…….”

뭔가 부부 사기단에게 당한 기분이었지만 황태자는 더 이상 조르지는 않았다. 아서의 레이디는 누가 봐도 취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기울어지던 순간 당황하던 아서의 표정을 보니 그도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 같았다. 아서는 짧게 스친 당황의 표정을 지우고 언제나처럼 침착한 얼굴로 익숙하게 부인을 품에 안아 들었다. 아주 편안해 보이는 것이 자주 해 본 솜씨 같았다.

16549661938007.png“아서. 난 어디서 자……?”

슬그머니 응접실을 나서 따라오려는 황태자를 아서가 칼 차단했다.

16549661938013.png“침실은 안 됩니다. 응접실에서 주무시든가 말든가요.”

16549661938007.png“…….”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자비롭게 미소 지으며 덧붙여 주었다.

16549661938013.png“제 전용 응접실이긴 합니다. 제 허락 없인 아무도 못 들어오니 신경 쓰지 마시고 부디 편히 주무시길. 노숙보다는 나을 겁니다. 이불 가져다 드릴까요?”

황태자가 풀이 죽어서 중얼거렸다.

16549661938007.png“고마워…….”

  * * *

16549662077812.png“?”

렘브란트 일행에게 갑자기 추가로 제공된 ‘귀빈용 별채’는 친위대장과 친위대 기사들의 차지가 되었다. 집사장과 잘생긴 풋맨들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16549662077818.jpg“부디 편하게 머무시길 바랍니다.”

16549662077812.png“아, 네. 감사합니다.”

  * * * 아서는 레이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그녀의 몸 위에 시트를 끌어올려 덮어 주었다.

16549661938013.png“……술을 못 하면 못 한다고 말을 하지.”

16549661966884.png“…….”

레이나는 완전히 잠들지는 않았다. 다만 발그레해진 얼굴로 그를 보며 에헤헤 웃었다.

16549661966884.png“아가씨는…… 술 잘하시거든요…….”

16549661938013.png“…….”

16549661966884.png“그러니까 저도…….”

아서는 피식 마주 웃어 주며 그녀의 얼굴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치워 주었다. 서늘한 베갯잇이 기분 좋다는 듯이 반쯤 뜬 눈으로 얼굴을 묻으며. 덮어준 시트로 볼을 살짝 긁더니. 그를 향해 술기운이 오른 발간 눈을 들어 올려 조용히 깜박였다.

16549661938013.png“…….”

……무방비하기는.

16549661938013.png“…….”

그녀가 불편하게 입은 드레스가 눈에 밟혔다. 아서가 잠깐 망설이다 결국 그녀의 위로 몸을 숙였다.

16549661938013.png“……잠깐 들어 봐요.”

속삭이며 레이나의 팔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감게 한 뒤, 그녀의 허리 뒤에 손을 넣고 살짝 일으켰다. 일으켜 세워진 레이나의 몸이 기우뚱 아서 쪽으로 무게를 실으며 기울었다. ……허리랑 등 뒤의 끈만 풀어 주면 될 것 같은데. 그녀의 몸을 잠깐 제게 기대게 했다. 대충 그녀의 옷을, 벗기지는 않더라도 헐겁게 만들어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 아서는 레이나를 자신의 몸에 기대게 한 채 그녀의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16549661966884.png“아서.”

레이나가 부스스 그의 목에 기대며 웃었다.

16549661938013.png“…….”

그녀를 안고 등 뒤로 뻗던 손이 멎었다.

16549661966884.png“아서…….”

닿은 채 목줄기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몸을 울렸다. 아서가 흠칫하고 몸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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