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회피2021.12.19.
“황태자가 와 있다고?”
집사장이 은밀히 가져온 보고를 접한 후작과 후작 부인의 눈이 커졌다. 줄리어스 후작의 응접실. 찾아온 손님들을 만나는 사이에 낀 짧은 휴식 시간이었다. 후작이 집사장을 다그치듯 확인했다.
“황태자인 게 확실해?”
카일 황태자는 이미 지난주쯤 아서와 헤어져 제도로 향했다고 알려져 있었던 참이었다. 아서는 줄리어스의 군대를 이끌고 줄리어스 영지로, 황태자는 황제 군을 이끌고 제국 수도로. 원래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네. 렘브란트 경의 처소에 황태자 전하가 계신 걸 풋맨들이 발견하고 보고해 왔습니다. 금발에 자색 눈이었고, 기사들이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고 하니, 거의 확실합니다.”
집사장의 보고가 이어졌다.
“후작님께서 모르길 바라고 몰래 오신 것 같다고 합니다. 렘브란트 경을 이미 만나신 모양이고요. 어떻게 할까요?”
후작은 팔걸이를 움켜쥐고 눈을 굴렸다. 황태자. 황태자가 왔다고? 적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아서에게 구출되며 체면을 구기기는 했지만, 제국민들의 지지가 높은 마리아 황후가 굳건한 이상, 카일 황태자는 높은 확률로 차기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그간 선제후를 목표로 하며 황제와 남다른 인연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던가. 차기 황제가 될 인물이 줄리어스 영지에 친히 제 발로 발걸음을 했다면,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후작 부인이 후작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우리가 모르길 바라고 몰래 오신 거라면, 괜히 호들갑을 떨어 황태자의 방문을 아는 척하거나 그분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돼요. 아서 경과 같이 전장에 있었으니 부실 보급 건을 황태자도 알고 언짢아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
후작은 기분이 나빠져서 이마를 찌푸렸다. 꼭 저렇게 듣기 싫게 말을 하지.
“나도 알아. 잔소리하지 마.”
“…….”
후작이 눈을 굴렸다. 그도 이미 아서와 귀족들로부터 매운맛을 보고 배운 바가 있었다. 눈앞의 이익이 커 보인다고 성급하게 제 뜻대로 밀어붙이려 들거나 가까운 척하려 들어서는 안 되었다. 높은 귀족일수록 그런 행동은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었다. 부실 보급 문제야 우리가 이야기 잘 나누어 원만히 해결하고 있긴 했지만……. 황태자는 아직 전해 듣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아직 우리에 대해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다. 먼저 황태자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쪽의 의향을 타진해 봐야 하나?
“…….”
짧게 고민하던 후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공개하지 않고 몰래 왔다는 것이 대답인가? 역시 아직은 섣불리 접근했을 때 반가운 반응을 얻기 힘들려나? 하지만 그렇다고, 황태자를 이대로 그냥 보내? 차기 황제가 될 사람을? 최소한 우리가 그의 방문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뭐라도 배려를 한 거고, 그를 존중하여 접근하지 않았다는 생색은 나야 하는데…….
“…….”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줄리어스는 어디까지 운신할 수 있을까? 방문을 숨기고 싶어 하는 황태자의 의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당신 뜻을 존중하고 신경 쓰고 있다 생색이 나려면……. 적당히 모르는 척 렘브란트 경을 통해서 선물을 보내거나, 그냥 필요할 것 같아서라고 에둘러서 귀빈실을…… 아니, 아예 독채를 하나 더 제공해? 너무 알고 있다고 대놓고 드러내는 것 같은가? 아니면, 너무 이쪽의 호의가 안 드러나나? 후작은 어떻게 인사라도 할 수 없나 골머리를 싸맸다. 내년에 수도의 귀족들 앞에서 황태자를 만났을 때, 이미 황태자와 안면이 있는 사이인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싶었다. 그럼 황태자가 우리 영지에 들렀다가 갔다는 걸 모두들 알 텐데! 어떻게 안 되나? 양쪽 모두를 아는 사람이 황태자 쪽 의견을 묻고 소개를 해 주면 딱인데……. 아쉬움 속에서 렘브란트 경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의 저택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후작에게 흔쾌하고 호의적인……. 하지만 아서와 크리스티나의 초상화 일정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모처럼 그의 동행 허락을 받아 둔 약속들이 모조리 취소가 되어 체면이 상한 것도 신경 쓰였다. 결국 후작은 일말의 기대를 담아 집사장에게 명령했다.
“……우선 렘브란트 경한테 숙소로 쓰실 만한 새 별채 하나 더 제공해 드려. 세팅 완벽하게 해서. 식사도 좀 더 넉넉하게 보내 드리고. 그리고…… 그쪽에 필요할 만한 것들 좀 더 이것저것 챙겨 봐. 혹시 나를 부르지 않는지 살짝 기다려 보고.”
* * *
“…….”
침실로 돌아와 문을 연 아서는 침대에 앉아 있는 레이나를 발견하고 발소리를 죽였다. 레이나는 다리를 침대 바깥으로 내린 채 침대에 옆으로 앉아 기대어 있었다. 침대 커튼 뒤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냥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것으로 보일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서는 레이나가 잠들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조용히 숨소리를 낮추었다.
“…….”
가까이 다가가자 침대 기둥에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기댄 채 용케 잠들어 있는 레이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눕지도 않은 채, 피로한 듯이 앉은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
잠든 그녀의 흐트러진 금발과 감긴 속눈썹 위에 주홍색 석양빛이 내려앉았다. 방 안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상태라. 어두운 저녁 어스름으로 물든 방에는 따스해 보이는 석양만이 고즈넉한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
솨아아아……. 열린 창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투명한 커튼이 하늘거렸다. 창을 통해 석양과 함께 선선한 가을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
그들의 신방은 남서쪽으로 창이 나 있었다. 매일 저녁 시간이 되면 언제나 창문의 오른쪽 치우친 곳으로 해가 떨어지면서, 침실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아서는 조용히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
조금만 더. 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
한동안 그의 시선이 레이나에게 머물렀다. 아서는 레이나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그렇게 얼마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레이나가 기대어 있는 침대 헤드 아래로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살짝 손을 넣어, 거기에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손가락 끝으로 어렵지 않게 꺼내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그걸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잘 숨겨져 있었지만. 눈이 아닌 감각으로 사물을 보는 아서는 눈으로 빤히 보는 것처럼 거기에 숨겨진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인지는 평범하게 짐작이 가는 바였다.
“…….”
……내 약점을 알아냈으려나. 아서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걸 펼쳐 보지도 않고 그냥 손안에서 다만 한두 번 만져 보다가. 도로 있던 자리에 넣어 주었다. 그의 시력으로는, 어차피 이렇게 적힌 글씨는 읽을 수 없었다.
“…….”
‘크리스티나’와 관련된 사기 결혼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황태자에게는, 어차피 읽어 달라 부탁할 수 없는 상황이고. 누군가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면 트리스탄이나 케이일 텐데. 아직 그들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말하지 못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너무 오러에 의존하지 마.」
「네. 눈이라면 제가 알아서 합니다.」
“…….”
황실에 물려 내려오는 능력. 오러. 그리고 오러의 무리한 사용에 따른 시력의 상실. 그건 피할 수 없는 부작용이었고, 그걸 아는 건 황실뿐이었다. 황제가 된 후 정무를 봐야 할 황태자가 오러를 쓰며 장님이 될 순 없었기 때문에, 황태자는 의도적으로 오러를 연마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서는 살아남기 위해 오러를 연마해야 했다. 불행히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그의 능력은 전쟁에서 몹시도 유용하게 쓰였다. 명백히 기운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포로가 된 황태자의 목숨을 구해낼 정도로…….
“…….”
그리고 아서는 그로 인해 거의 눈이 멀었다. 아직은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고, 오러로 어느 정도 시각을 대체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서는 잠든 레이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어차피 쪽지의 내용에 대단할 게 없을 건 뻔했다. 굳이 확인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미 레이나의 심장 소리로 그녀의 속내를 손바닥 보듯 빤히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대단한 게 없을 것이다. 아직은.
“…….”
그러니 지금은 방심하게 해 주는 편이 좋겠지. 들키지 않고 무사히 스파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줄 심산이었다. 그래서 아서는 때때로 일부러 레이나를 혼자 있게 해 주었다. 로렌슨 선생이 슬쩍 전달한 쪽지를 받은 그녀가 그걸 읽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주었고. 그녀가 후작 부인에게 무언가 보고 하고 싶어 할 것 같을 때는 쪽지를 쓸 수 있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무사히 첩자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나서. 아서는 레이나에게 적당히 잘못된 정보를 노출해 후작 쪽에 잘못된 정보를 전달되게 하거나, 후작 쪽을 희망 고문하는 용도로 이용하거나 한다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
그러니 벌써 쪽지를 빼돌려 그녀의 경계를 사거나 다른 방법을 강구하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이 정도가 딱 좋다. 조만간, 그의 문제에 대해 고백하고 그의 시력을 대신해 줄 사람을 구해야겠지만.
“…….”
뉘엿뉘엿 기울던 해가 떨어지며. 석양이 걷히고. 잠든 레이나의 얼굴 위에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아서는 싸늘해진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한 창문을 닫고, 조용히 벽난로에 불을 때었다. 그리고 비로소 레이나의 몸 위에 살며시 끌어올린 시트를 덮어주며. 인기척을 느낀 레이나가 멍하니 눈을 뜨고 깨어나자.
“불편하게 자고 있던데. 좀 더 쉬겠소?”
하며 웃어주었다. · · ·
「아서.」
네, 황태자 전하.
「너무 오러에 의존하지 마.」
네. 눈이라면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게 아니라.」
「오러에 의존하지 말라고. 너, 오러가 있으니까 사람을 믿지 않고 자꾸 시험하잖아.」
…….
「보내기 싫었으면 안 보냈으면 됐잖아. 내 부인이라고, 여기서, 내 눈앞에서 이야기하라고. 말했으면 됐잖아. 왜 보냈어?」
…….
「일부러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려고, 둘이 무슨 이야기 하는지 듣겠다고 보낸 거 아냐?」
카일.
「어.」
오러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날 다 아는 것 같아?
「…….」
· · · 아서는 피식 자조했다. 맞아. 가끔씩은 당신이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것 같아. * * *
“……카일.”
아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 황태자가 눈을 굴리며 이복형제에게 불쑥 리본 장식이 된 와인병을 내밀었다.
“…….”
“……결혼 선물. 잊은 거 같아서.”
그리고 아서의 자비를 바라듯 눈치를 보는 미소를 지었다.
“…….”
아서의 기사들이 후작은 차단할 수 있었지만, 황태자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어쨌든 ‘군’이란, 설령 줄리어스의 징집병이어도 최고 통수권자인 황제의 것이었고, 황태자는 서열상 아서보다 위에 있는 황제의 공식적 대리인이었으니까.
“……하루만 재워 줘.”
아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싫습니다.”
“오늘 하룻밤만…… 안 될까?”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