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위험한 경쟁자2021.12.16.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뭐, 아니면 됐다. 너 때문에 아까는 아주 곤란했어. 아서가 부인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더라고.”
렘브란트가 어딘지 묘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프랜시스는 더 어리둥절해져서 점점 미궁에 빠지는 얼굴로 물었다.
“……아서 경이랑 레이디 크리스티나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략혼으로 얼굴도 못 보고 만나자마자 결혼만 한 사이 아니에요? 이제야 다시 만나서 알게 된 지 일주일이나 겨우 되었을 텐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프랜시스도 만난 지 일주일이나 겨우 된 하녀한테 관심을 두고 있었으면서……. 렘브란트는 애매한 미소와 함께 애꿎은 찻잔만 저었다. 황태자가 덤덤히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뭐…… 남녀 사이 정이라는 게 꼭 만난 시간에 비례하는 건 아니니까. 그만큼 매력 있는 아가씨이기도 했고.”
프랜시스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그 정도예요……?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워낙 정붙일 데가 없는 녀석이다 보니, 제 부인이랍시고 착해 보이는 여자가 잘해 주니 확 빠져든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생각하며 황태자가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
아서에게 ‘제대로 된 가족’이라……. 황태자는 찻잔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
그리고 아서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승전 후 돌아오던 길. 황명이랍시고 억지로 술을 먹여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취한 그를 보았던 날이었다. · · ·
「……라이언 달튼*?」
취한 아서가 부스스 웃으며 말했다.
「……네.」
그는 황태자의 앞에서 처음으로 혀가 무디어져 있었다. 조금 느리게, 웃음기를 담은 채 그가 말했다.
「저보고…… 안 돌아오셔도 된다고…….」
「라이언 달튼처럼 사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아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어 웃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더라구요.」
「헤어지기 직전에…….」
황태자는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한 채 가만히 웃으며, 그의 명령으로 진탕 술을 마시고 완전히 엉망이 된 아서를 쳐다보았다.
「…….」
아서는 짙게 취한 채, 조금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그렇게 별로였을까요?」
「다신 안 보고 싶을 만큼?」
다음날 기억도 못 할 정도로 취해선. 그의 성격에,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
한 번도 본 적 없는, 흐트러진 미소를 웃으며. 아서가 중얼거렸다.
「……보고 싶네요.」
「…….」
언제나 인간미 없게 절제된 표정만 짓고, 완벽하기만 하던 이복형제가. 처음으로 푸스스 웃으며 그를 보았다.
「제가 돌아가면 뭐라고 할까요……?」
「……그 여자…….」
그가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단 한 번. 그때 그 이야기가 그의 약혼녀, 아니, 아내에 대해 들은 이야기의 전부였다. · · ·
“…….”
라이언 달튼의 이야기를 했다는 걸 듣고 황태자는, 아서가 크리스티나를 오 년 동안 생각했을 거라는 걸 짐작했다. 나 같아도. 오 년 동안 그 여자를 생각했을 것 같다.
“…….”
전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까……. 아니면 그냥, 아서와 내가 그런 걸까. 달아나고 싶은데, 달아나지 못하는 황제의 아들.
“…….”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벌써부터 너무 집착하는 것 같은 건 좀 걱정이 되지만. 아가씨가 괜찮은 사람 같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그 ‘줄리어스’의 영애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뜻밖이었다. 어떻게 ‘줄리어스’ 밑에서 그런 아가씨가 나왔을까. 황태자는 그냥 좀 다행스러운 기분도 들고, 왠지 모르게 아서에게 약간 서운하기도 해서 홀로 웃었다.
“…….”
프랜시스는 묘한 눈으로 제각기 상념에 빠져 ‘크리스티나’를 생각하는 것 같은 황태자와 렘브란트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말로 궁금하네요. 레이디 크리스티나가 얼마나 인상적이었기에……?”
렘브란트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황태자는 뒤로 목을 꺾으며 한탄했다.
“아……. 약혼녀라도 있어야 라이언 달튼이 될까 말까를 고민하기라도 하지…….”
황태자가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며 중얼거렸다.
“부러워 죽겠네.”
렘브란트가 웃으며 황태자를 향해 무어라 말을 하려던 때였다. 다음 순간. 쾅! 거칠게 문이 열리며 문고리가 벽에 부딪쳤다.
“황태자 전하!”
그리고 황실 친위대장이 들이닥쳤다. 안색이 변한 황태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렘브란트와 프랜시스도 당황해 일어났다. 나이 오십 줄의 친위대장이 성큼성큼 들어오며 소리쳤다.
“여기 숨어 계셨습니까!”
줄줄이 황실 친위대원들이 단장의 뒤를 이어 뛰어들어왔다. 황태자는 순식간에 자신의 친위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손을 들었다.
“잠깐, 잠깐만. 진정해 봐, 페어만 경. 남의 집이라고. 이렇게 들이닥치다니 예의가 아니잖아.”
친위대장이 분기탱천해 소리쳤다.
“집주인도 사정을 들으시면 탈주하는 황태자 전하를 잡아 와야 하는 친위대장의 어려운 입장을 헤아려 주실 겁니다!”
이미 똑같은 수법에 여러 번 당한 기사들은 무례를 논하는 황태자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친위대장의 지시에 따라 그를 향한 포위망을 좁혔다. 황태자가 뻘뻘 미소 지으며 항변했다.
“……탈주라니. 하루 이틀만 있다가 내가 알아서 돌아간다고 했잖아. 편지를 남겨 뒀는데…….”
친위대장이 일갈했다.
“이미 그렇게 미루신 게 일곱 번 쨉니다! 저는 그동안 황제 폐하께 이미 말씀드린 도착 예정 날짜를 세 번이나 미루는 보고를 드려야 했고요! 전령이 세 번이나 가서 황제 폐하께 일정에 차질을 빚어 죄송하다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전령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오 년 동안 그를 지킨 친위대장 앞에서 황태자가 쭈그러들었다.
“아, 알았어. 간다고. 간다니까?”
“언제요!”
“내일 진짜 간다.”
“오늘!”
친위대장이 연이어 다다다 쏘아붙였다.
“원래 어제 출발하기로 하셨잖습니까! 그전에는 지난주에 아서 경의 군대와 찢어져서 수도로 출발하기로 하셨었고요! 오늘 간다 내일 간다 질질 끌면서, 결국 이렇게 줄리어스 영지 코앞까지 아서 경을 따라오신 거잖습니까!”
황태자가 미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뻔뻔하게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왕 이렇게 코앞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가. 아서의 레이디에게 인사는 하고 가야지……. 아!”
그리고 얼른 뒤쪽의 두 사람을 소개했다.
“여기는 렘브란트야. 인사해. 알지? 내 외사촌이고, 내 외숙이신 카를 클라인 공의 아들이야. 여긴 프랜시스. 포드 백작가 차남에 내 친구고, 렘브란트를 도와주고 있어. 둘 다 인사해. 저쪽은 황실 친위대장 페어만 경.”
몰래 왔다곤 했지만 분기탱천한 친위대장이 잡으러 올 정도로 몰래 왔을 줄은 몰랐지. 당황한 렘브란트와 프랜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얼떨떨하게 예를 표하고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페어만 경. 노고가 많으십니다. 저는 렘브란트 이튼 폰 클라인…….”
“황태자 전하!”
친위대장이 소리쳤다. 당황한 렘브란트가 페어만에게 어리벙벙하여 인사하는 사이, 황태자는 순식간에 뒷문으로 몸을 날렸다.
“전하!”
친위대장의 뒤를 이어 친위대원들의 원망의 절규들이 이어졌다.
“쫓아!”
황태자는 냅다 줄행랑을 쳤다. * * *
“…….”
“…….”
폭풍이 지나간 뒤. 방에는 렘브란트와 프랜시스만 덩그러니 남았다.
“렘브란트 경.”
멍하니 얼이 빠져 있는 렘브란트를 부른 프랜시스는, 그가 쳐다보자 비로소 작은 미소와 함께 눈빛을 바꾸고 자신이 찾아와 있던 용무를 꺼냈다.
“‘레이나 아스타린’에 대한 조사를 일차적으로 마쳤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들으시겠습니까?”
렘브란트는 “아.” 하고는 미소 지으며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네, 좋습니다. 들려주세요.”
프랜시스가 보고를 시작했다. 그의 보고에는 줄리어스의 하녀로서 레이나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에 더하여. 그녀가 줄리어스의 주치의 로렌슨 선생의 아들과 암암리에 염문이 있는 듯하다는 내용과 함께, 근래 그녀가 모종의 심부름으로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은 지 일주일째이며, 아서의 최측근 기사인 트리스탄 경이 그녀에 대해 조사하고 있더라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은 이 정도입니다만. 더 알아볼까요?”
그의 보고를 잠자코 끝까지 들은 렘브란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프랜시스 정도의 수완가가 얼마나 걸려서 레이나의 비밀에 대해 알아내는지를 확인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느끼고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네, 좀 더 진행해 주세요. 가족에 대해서나, 뭔가 금전적인 곤궁이나 어려운 사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해 주십시오. 그런데…….”
렘브란트가 미소를 지으며 다른 부탁을 덧붙였다.
“앞으로 ‘레이나’에 대한 조사는 좀 더 은밀하게 진행해 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알아보고 있다는 게 너무 드러나지 않도록요.”
프랜시스는 선선히 끄덕였다.
“네. 그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습니다.”
렘브란트는 프랜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혹시 그 아가씨, 마음에 담았으면 접는 게 좋겠습니다. 저도 따로 들은 게 좀 있는데.”
렘브란트가 깍지 낀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여기 머무는 동안 가볍게 잠깐 연애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닌 것 같아요. 위험한 경쟁자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
* * *
또각. 또각. 줄리어스 후작 저택 본관. 아서의 기사들이 지키는 저택의 중앙 계단 옆으로 이어진 길목. 과하지 않게 꾸몄음에도 화려하고 우아한 금발의 아가씨가 조용히 걸어왔다. 또각. 일정 거리에 다다르자 그녀는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담담한 눈으로 슥 기사들을 훑었다.
“…….”
스르륵 움직이던 시선이 입가에 상처를 가진 기사의 모습에서 멈추었다. 크리스티나는 사뿐히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만 살짝 굽혀 시선을 내려 인사했다. 고개나 허리를 숙이지 않은 채, 무릎을 굽힌 사이 잠깐 눈만 아래로 내렸다가 올리는, 도도하고도 우아한 인사였다. 짧은 인사 끝에 그녀가 눈을 뜨며 올려다보자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보닛에 얼굴이 반 이상 가려져 있었음에도 놀라운 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용무가 있으십니까.”
리오넬이 물었다. 크리스티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서 경을 뵈러 왔습니다만, 계신지요.”
“계시지 않습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계시지 않는다.’는 건 정말로 자리에 없을 때만 하는 말이 아니라 안에 있어도 만날 수 없다는 완곡한 거절일 때도 있었다. 그러니 뻔히 안에 있는 것을 알아도, ‘계시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다면 오늘은 만날 수 없다는 의미로 알고 물러나는 것이 매너였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예상한 대답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리오넬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오늘은 오시지 않습니다. 말씀만 남겨 두고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뇨.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리오넬을 바라보았다.
“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기다릴 테니, 제가 기다렸다는 것을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한 시간을 서서 기다렸다. 벽을 등진 채, 벽의 꽃처럼 서서.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난 뒤. 찰각, 가방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몸을 돌리며, 떠날 때도 사뿐히 미소를 지었다. ――――― *라이언 달튼: 왕자의 신분으로 탈영을 하여 신분과 이름을 버리고 사랑하는 약혼녀를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던 고전 소설 속 인물. 겁쟁이에 어리석은 인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