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불안불안 통신보안2021.12.12.
레이나를 침실에 데려다준 아서가 황태자와 좀 더 이야기해야겠다며 자리를 뜨자마자, 창백해진 레이나는 후다닥 책상 앞으로 가서 펜을 쥐고 더듬더듬 종이를 찾았다. 마침내 자그마한 노트를 찾아 한 장을 찢어 들고 자리에 앉은 레이나는 깃펜으로 꾹꾹 눌러 거기에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황태자 전하를 만났어요. 】 【 크리스티나 아가씨를 데뷔탕트에 초대하겠대요. 】 【 제 얼굴을 봤는데, 어쩌죠? 】 【 전하께서 저를 크리스티나 아가씨인 줄 아세요. 】 그리고 레이나는 입술을 깨물며 쪽지를 반복해 읽어 보다가, 다시 깃펜을 잡고는. 【 갑자기 저택에 찾아오셨어요. 피할 틈이 없었어요. 】라는 문장을 비좁은 여백에 추가해 넣었다. 레이나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상황임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레이나는 초조한 눈빛으로 짤막한 쪽지를 몇 번이고 읽어 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전부 다 엉망진창이야……. 아서 경의 약점은 찾지도 못했는데……. 레이나의 시선이 불안하게 떨렸다.
“…….”
아서 경의 약점을 가져오라고 해 놓았으니 후작 부인은 나의 보고를 기대하고 있을 텐데, 처음 보내는 보고가 이따위 것이라니. 불호령이 떨어지겠지? 할머니에게 화가 미치기라도 하면……. 레이나는 초조하게 쪽지를 쥐고 입가에 댄 채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
마음 같아선 우리는 아서 경의 전용 정원에 있었고, 황태자는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났으며, 황태자 전하는 자기가 여기에 있는 건 비밀이라고 했다는 말도 추가하고 싶었다. 열일곱 살에서 스물세 살의 귀족가 레이디들은 모두 참가해야 한다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데뷔탕트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조그마한 종이쪽지는 글자로 가득 차서 다른 말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가장 위급한 말만 전해야 했다. 아침에 오는 로렌슨 선생님에게 몰래 전달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
레이나는 쪽지의 잉크가 마르길 기다렸다가, 그것을 뒤집어 뒷면에 무어라 조금 더 적었다. 그리고 다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말린 뒤,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작게 접어 침대 헤드와 침대 매트 사이에 숨겨 두었다. 내일 로렌슨 선생님이 오시면 눈치껏 기회를 보아 전달할 수 있도록…….
“…….”
그게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안전하게 숨겨져 있는지를 몇 번이나 더 확인하고, 그다음에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채로 시트 속에서 은근슬쩍 꺼낼 수 있는지도 확인해 보았다.
“…….”
그리고 레이나는 침대에 멍하니 앉았다.
「도움이 필요해요?」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어요?」
“…….”
도와주겠다던 렘브란트 경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로만 느껴졌다. 딱 한 번 통성명한 사람의 진의를 믿을 수 없다는 건 둘째치고라도. 렘브란트 경도 결국은 황실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분은 황태자 전하의 외사촌. 설령 그분이 나에게 동정심을 베풀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진심이더라도, 근본적으로 렘브란트 경은 줄리어스의 하녀가 아니라 황태자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도움을 청하겠다고 가까이 가느니, 레이나로선 멀리하는 편이 안전할 사람이었다. 괜히 그의 도움을 바라 얼쩡대다가는 렘브란트 경이 다 알아 버렸다는 걸 후작 부인에게 들키기나 하겠지. 혹시라도 나를 감싸 주시려다가 오히려 그분께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 거고.
“…….”
그나마 후작 부인에게 해야 하는 보고에서 렘브란트 경을 만났던 일과 렘브란트 경이 이미 다 알더라는 이야기나마 슬쩍 뺄 수 있을 것 같다는 점만이 레이나에게는 유일하게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레이나는 지쳐서 침대 기둥에 머리를 기대었다. * * * 아서가 방을 나서자마자 케이와 트리스탄이 좌우에 붙어 함께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소매를 정돈하며 루칸이 합류했다. 기사들과 함께 길목을 지키던 리오넬이 짧게 경례하자 아서는 눈짓으로 그에게 레이나의 경호를 맡기고 스쳐 지나갔다. 케이가 걸어가며 나직이 보고했다.
“각하. 황태자 전하의 군대가 예정대로 수도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또…….”
아서가 케이의 보고를 자르며 말했다.
“알아. 방금 만나고 왔다.”
케이가 눈을 크게 뜨며 숨을 삼켰다.
“……황태자 전하를요? 여기 오셨습니까?”
아서가 표정 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 아내의 얼굴을 봤어. 덕분에 아내가 상당히 당황스러워했다. 수도로 초대까지 하더군.”
끙 소리를 내며 케이가 머리를 짚고 난감해했다. 루칸이 슬그머니 의견을 냈다.
“……황태자 전하께는 말씀드려도 되지 않을까요? 저희 편을 들어주실 텐데요.”
아서가 일축했다.
“입 싸서 안 돼. 카일이 알면 일이 커진다.”
그리고 트리스탄에게 눈짓했다.
“친위대장이 근처에 와 있을 거다. 황태자를 찾고 있을 테니 가서 렘브란트 경의 처소로 가보라고 전해. 거기 있을 거야.”
“네.”
다음으로 케이에게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
“올봄에 재개될 사교 시즌과 데뷔탕트에 대해 알아봐. ‘크리스티나’가 꼭 가야 하는 건지. 아내가 카일의 초대를 받았다. 사양하기 어려운 분위기 같아.”
“네.”
* * * 렘브란트가 자신이 머무는 별채로 돌아왔을 때. 응접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프랜시스가 인기척을 느끼고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렘브란트 경, 오셨습니까?”
렘브란트가 미소 지었다.
“프랜시스, 누가 왔나 한 번 봐요.”
그리고 렘브란트의 뒤를 따라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그를 발견하고 멈칫한 프랜시스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황태자 전하?”
금발의 훤칠한 미남이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며 웃었다. 깜짝 놀란 프랜시스는 예를 표하는 것조차 잊고 황급히 소파 앞에서 몸을 빼 그들의 앞으로 달려갔다.
“전하! 이런, 맙소사. 정말 전하십니까?”
그를 향해 웃은 황태자가 짧게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네.”
황태자가 출정한 이후, 오 년만의 재회였다. 프랜시스는 만면에 놀라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격하게 맞잡고 뒤이어 포옹까지 했다.
“이게 얼마 만입니까! 아니 어떻게……. 개선군과 함께 오신 겁니까? 어떻게 이렇게 소식도 없이요! 황궁으로 바로 가신다고 들었는데요!”
황태자가 웃으며 맞잡은 그의 손을 흔들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그냥 지나가긴 서운해서. 잠깐 들렀어. 렘브란트도 있다고 하고, 자네도 있다고 하고. 아서의 레이디도 궁금하고 해서.”
프랜시스가 웃으며 기분 좋게 눈을 흘겼다.
“아, 이렇게 또 목록에 저를 끼워 주시고. 영광입니다. 강녕하십니까?”
황태자가 콧잔등을 찡그려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뭐, 다들 이야기하다시피 아서 덕분이기도 하고.”
렘브란트가 황태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프랜시스가 알아서 상석과 렘브란트의 자리를 비워 주고 맞은편으로 이동하며 물었다.
“후작님 내외는 만나 보셨습니까?”
황태자가 상석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뭐. 너무 수도로 돌아가는 일정을 질질 끄는 걸로 보일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이래저래 피차 신경 쓰일 것 같아서. 후작은 아서만 신경 쓰기도 벅찰 테니 난 조용히 하루 이틀이나 있다가 가게.”
“전하께서 오셨다고 하면 깜짝 놀라서 좋아할 텐데요.”
“그것도 좀 얄밉고.”
프랜시스가 눈을 찌푸렸다.
“부실 보급 진짜입니까?”
“어, 개판이었지. 아서가 얘기 안 해?”
“아서 경이랑 얘기할 기회 자체가 없었습니다. 후작이 어찌나 꽁꽁 숨겨 놓고 안 보여 주는지. 렘브란트 경만 간신히 딱 한 번 만나 보셨습니다. 저한테까진 순서가 안 오더라구요.”
렘브란트의 집사가 그들의 응접실로 트롤리를 밀고 들어와 티 세팅을 해 주었다. 프랜시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래저래 개선장군으로서 많이 바쁘신 것 같긴 했습니다. 유족 방문하고 참전 용사 방문하고 인터뷰도 하고 하시느라……. 소식지를 보니 아서 경이 인터뷰에선 부실 보급에 대해 오히려 좀 긍정적으로 해명해 주기는 했더라고요.”
황태자가 슬쩍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서가 긍정적으로 해명을 해 줬어? 뭐 받아 냈으려나?”
렘브란트가 슬쩍 끼어 덧붙였다.
“참전 용사 포상금이랑 유족 연금이요. ……꽤 많이.”
황태자가 놀란 눈을 하더니 하하하 웃었다.
“잘했네. 그 구두쇠한테 그런 거 받아 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선제후까지 됐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프랜시스는 다시 황태자에게 물었다.
“아, 혹시 아서 경은 만나 보시고 오신 겁니까?”
“어. 제일 먼저 만나러 가서 방금 전까지 얘기하고 왔지. 렘브란트도 지금 같이 만나고 오는 길이야.”
“그러셨군요. 아, 혹시 레이디 크리스티나도……?”
황태자가 콧잔등을 긁적이며 웃었다.
“어, 봤다. 괜찮은 여자 같더라. 걱정했는데, 아서가 결혼을 잘했어.”
프랜시스가 황태자를 보며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만나 보셨습니까? 레이디 크리스티나를요?”
“응. 프랜시스 자네는 못 만나 봤나?”
프랜시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웬걸요. 줄리어스 후작이 얼마나 꼭꼭 숨겨 둔다고요. 제가 문제가 아니라 렘브란트 경께도 안 보여 주려고 합니다. 초상화 일정까지 잡아 놓고 코빼기도 안 비쳐요. 아주 콧대가…….”
“그래?”
황태자가 찻잔을 들며 의아한 듯 말했다.
“그렇게 콧대 높은 아가씨로 보이진 않던데?”
렘브란트는 너무 어색하지 않게 미소 지으며 슬쩍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감추었다. 황태자의 말에 프랜시스가 은근히 관심을 보이며 목소릴 낮추었다.
“그래요? 어땠는데요?”
공적인 자리였다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였겠지만, 황태자와 렘브란트, 프랜시스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을 같이 한 친구 사이였다. 황태자는 별 스스럼없이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를 언급하듯 말했다.
“예쁘고, 공손하고. 청초하면서도 우아한 타입?”
렘브란트가 묵묵히 찻잔을 저으며 ‘레이나’를 크리스티나로 설명하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까탈스럽다는 얘기만 들리고 전부 베일에 싸여 있어서 좀 이상한 사람인 거 아닌가 했는데……. 의외로 뭐랄까……. 얌전하고 조심스러운 스타일 같던데. 어른들이 좋아하는.”
“그래요?”
“…….”
렘브란트가 난감한 내색을 숨기며 살짝 미소만 짓고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곧바로 그에게 공이 넘어왔다.
“어떤 거 같아? 넌 레이디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며.”
쿨럭. 렘브란트가 차를 마시다 작게 기침했다. 프랜시스가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렘브란트는 주먹으로 입을 가린 채 살짝 찡그리고 황태자를 보았다.
“그건 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아, 미안. 둘만의 비밀이야?”
“?”
프랜시스가 어리둥절해 렘브란트를 보았다. 황태자가 미심쩍은 빛으로 눈을 좁히며 렘브란트를 쳐다보았다.
“너…… 진짜 아서의 레이디랑 뭐 있는 거 아니지?”
“아니라고요. 고모님의 존엄성이라도 걸어요?”
황태자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그걸 왜 네가 걸어, 내 어머니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