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서운하게 하지 않아요2021.12.09.
“…….”
황태자는 가만히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푹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순간, 앉은 채 슥 발을 밀어 의자를 뒤로 기울인 황태자가 분수대 쪽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렘브란트!”
그리고 소리쳐서 그들을 불렀다. 저편에서 렘브란트와 아서의 부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황태자가 소리쳐 말했다.
“그만 이리 와! 아서의 레이디한테 흑심 있다는 오해 사기 싫으면.”
* * *
“실례했습니다, 아서 경.”
레이나를 에스코트해 아서 앞으로 데려온 렘브란트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아서가 그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던 레이나에게 팔을 내밀었다.
“…….”
레이나는 렘브란트에게 짧게 감사의 목례를 하고는 아서의 곁으로 옮겨갔다.
“…….”
“…….”
미치겠군. 황태자가 어색해진 분위기에 조용히 이마를 찌푸렸다. 안 그래도 아서에겐 빚이 많은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자리에 허락 없이 렘브란트를 불러온 게 그의 실수라면 책임져야 했다. 황태자가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무언가 입을 열려는 찰나. 고개를 돌려 아서를 올려다본 레이나가 작게 말했다.
“……아서. 저랑 잠깐 이야기해요.”
그리고 조금 전에 렘브란트와 이야기 나누었던 분수대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요.”
순간 황태자와 렘브란트가 동시에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
아서도 조금 놀란 듯 굳은 얼굴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아서의 팔에 손을 올린 채 황태자를 향해 물었다.
“……황태자 전하. 예의가 아닌 줄 압니다만,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황태자는 뜻밖의 상황에 약간 당황해서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살짝 주저하며 미안한 듯이 덧붙였다.
“누추한 집에 방문해 주셨는데 집안사람으로서 대접해 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별말씀을.”
황태자가 대답하자 레이나는 답례로 살짝 미소 짓고는 아서의 팔을 당겼다.
“아서.”
“…….”
레이나가 맑은 눈으로 아서를 응시했다.
“…….”
머뭇거리던 아서는 황태자에게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레이나를 에스코트하여 그녀가 렘브란트와 이야기하던 분수대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깐 레이나가 렘브란트의 에스코트를 받아 갔던 그 길을.
“…….”
황태자가 흘긋 렘브란트를 쳐다보았다. 그도 좀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렘브란트가 조언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아서 경 기분 많이 상하셨습니까?”
렘브란트가 물었다.
“……솔직히 조금 그랬는데. 괜찮을 것 같네.”
황태자가 아서와 레이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해 주었다. * * * 아서와 단둘이 된 레이나는 바로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 전에 렘브란트 경을 뵌 적이 있었더라구요.”
“…….”
레이나는 거두절미하고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태까지 제가 렘브란트 경을 뵌 적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때 한 번 뵈었을 때…… 그분의 수행원이신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때 제가…….”
레이나가 짧게 머뭇거리다 말했다.
“렘브란트 경이신 줄 모르고 실례를 좀 했어요.”
레이나가 손으로 목덜미를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제…… 꾸며지지 않은 모습을 좀…… 보여 드렸는데…….”
손이 올라가자 그녀의 드레스 소매가 살짝 벌어지며 안쪽에 엉성하게 묶인 레이스 손수건이 드러났다.
“…….”
뒤이어 그녀는 손을 내려 다른 손과 포개 잡았다. 레이스 손수건이 다시 소매 속에 감추어졌다.
“그래서 방금 그분이 렘브란트 경이시라는 걸 듣고…… 좀 놀랐어요.”
“…….”
레이나가 다시 시선을 들고 아서를 마주 보았다.
“…….”
아서는 말없이 레이나를 보고 있었다.
“…….”
‘크리스티나’를 건너뛴 그녀 자신에 대해 그에게 그 정도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건……. 무모한 느낌이었지만. 레이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제가 그때 좀 웃긴 꼴이긴 했거든요. 렘브란트 경은 그걸 재밌다고 생각하셔서, 그저 잠깐 가볍게 즐거운 이야기처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대요…….”
그리고 레이나는 머쓱한 듯이 다시 목덜미를 눌렀다.
“그런데 제가 너무 당황해하니까, 미안하다고, 제가 그렇게 놀라고 당황스러워할 줄 몰랐다고……. 제……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본 건 비밀로 해 주겠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
레이나가 초조하게 지분거리던 손을 내리고 자신의 치마 앞에서 손등을 위로 해 깍지를 꼈다. 그리고 정직한 눈으로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다예요.”
“…….”
……알아들어 주었을까? 아가씨가 아니라…… 하녀인 상태로 렘브란트 경을 봤기 때문에 놀란 거라는 거. 레이나는 가만히 아서를 마주했다.
“……경의 앞에서 다른 사람이랑 말하러 가서 죄송해요. 경의 명예에 해가 되었을까요?”
레이나는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기분도…… 좋지는…… 않으셨겠죠?”
“…….”
아서는 언제나처럼 싱긋 웃지 않았다. 다만 잠시 레이나를 바라보다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
아서는 잠시 후 손가락을 세워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팔을 세게 잡아서 미안하오.”
아서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아프지 않았소?”
“괜찮아요.”
레이나는 얼른 대답했다. 조금 다급하게 들릴 정도로. 아서는 비로소 피식 웃더니 머릴 쓸어넘긴 손을 내려 자기 눈과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보다 질투가 많네.”
레이나는 멈칫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서가 이내 산뜻한 얼굴이 되어 레이나를 마주 보았다.
“렘브란트 경께도 실례했소. 내 부인 한정으로 난 소인배요.”
“…….”
레이나는 왠지 속없이 쑥스럽고 마음이 들떠버렸다. 그저 그가 알아주었고, 해명에 성공했다기엔 너무 벅찬 감이 들었다.
“…….”
아서가 살짝 웃으며 다시 레이나를 향해 에스코트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다. 레이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서를 보다가 내밀어 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소매 속에 묶어둔 레이스 손수건이 그의 팔에 스쳤다. 약하게 웃은 레이나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여기. 좀 오래 있다가……. 렘브란트 경이랑 있던 거보다 더 오래 있다가 돌아가요.”
아서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잠깐만.”
그는 다만 레이나의 손을 고쳐 잡더니, 그녀의 소매 안쪽으로 좀 더 깊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레이나의 손목에 묶인 레이스 손수건을 풀더니 예쁘게 다시 묶어 정리해 주었다. 레이나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아서를 보고, 고맙다는 듯 살짝 시선을 내려 웃기만 했다.
* * *
“레이디랑 아는 사이야?”
황태자가 렘브란트에게 물었다. 렘브란트가 머쓱하게 무릎 위에서 손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아뇨. 뭐……. 굳이 말하자면 저 혼자서 레이디를 알던 사이입니다. 한 번 스친 적은 있는데 레이디는 저인 줄 모르셨고. 제가 렘브란트라니까 놀라신 거 같고요. 레이디를 당황하게 하긴 싫으니 그 이상은 묻지 마세요. 맹세코 명예롭지 않은 일은 없었습니다.”
황태자가 짧게 웃었다.
“그래. 혹시라도 오해 살 짓 하지 마. 아서 같은 놈이 돌아 버리면 무서워.”
렘브란트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었다.
“별걱정을요. 전 전쟁 영웅의 레이디랑 로맨스를 꿈꿀 정도로 간이 크지 않다고요.”
렘브란트는 그렇게 말하며 멀리 있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아서에게 돌아가기 직전, 레이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경…….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사실 거짓말을 그렇게 잘 못 해요.」
그리고 목덜미를 누르며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거짓말 해봤자 다 티 날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요.」
「제가 아가씨가 아니라는 건…… 말할 수 없겠지만…….」
“…….”
「……하나만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어요?」
“…….”
「저한테 팔아 주신 게 황실 소식지라는 것만…….」
그걸 왜 숨기려고 하는 걸까. 황실 소식지를 샀다는 게 뭐가 어때서……. 어차피 대단한 이야기도 없었는데.
“…….”
하지만 레이디의 비밀이라고 하니, 그에게 입을 열 자격은 없었다. 렘브란트는 어색하게 뒷머리를 만지며, 저쪽에서 아서와 함께 서 있는 레이나를 조금 이상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 * *
“오늘은 여러모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만 돌아갈게요. 레이디를 알게 되어 기쁘네요. 아, 늦었지만 결혼 축하하구요.”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레이나는 이 순간이나마 잘 마무리해야 한다고 믿으며 미소 지어 예를 표했다. 생각해 보니 잘하면, 별일 아니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지금 보내면 다시 볼 일 없겠지? 황태자 전하는 황궁으로, 크리스티나 아가씨는 줄리어스 영지에. 감사하게도 렘브란트 경이 비밀을 지켜 준다면. 전부 해피엔딩. 레이나는 미소 지었다.
“살펴 가세요. 제국의 빛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미소로 환송하는 레이나를 향해, 황태자는 헤어짐이 아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개선식 이후에 데뷔탕트에서나 다시 뵐 수 있겠죠?”
레이나의 미소 지은 얼굴에 금이 갔다.
“……네?”
황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수도에 오면 연락 줘요. 두 사람은 내가 따로 초대할게요.”
아서가 물었다.
“……데뷔탕트요?”
“아, 아직 못 들었나?”
황태자가 레이나를 보며 답했다.
“데뷔탕트가 있을 겁니다. 레이디, 데뷔탕트 하지 않으셨죠?”
이게 무슨 소리야?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레이디께서 열일곱 살 때 전쟁으로 사교 모임 금지가 되어서, 그때 데뷔탕트를 해야 했던 열일곱, 열여덟 살의 레이디들이 전부 스물둘, 스물세 살이 됐잖아요. 그 아래로 오 년 동안 아가씨들 전부, 데뷔탕트를 하지 못했고요.”
레이나가 멍하니 말을 잇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매끄럽게 이어졌다.
“그래서 올봄에는 열일곱 살에서 스물세 살까지, 그동안 데뷔하지 못한 레이디들 전부가 데뷔탕트를 할 겁니다. 역사상 가장 큰 데뷔탕트가 될 거예요.”
그러더니 황태자는 상큼하게 그녀를 향해 윙크했다…….
“그때, 명백히 당신이 퀸일 겁니다.”
데뷔탕트의 대상은 본래 열일곱에서 열여덟 사이. 그러나 사교 모임 및 귀족 혼인 금지가 된 지 오 년. 그동안 데뷔탕트가 열리지 않아 데뷔를 하지 못하고 미루어 둔 열일곱에서 스물셋 사이의 지체 높은 귀족가 영애는 모두 황궁에서 황제 부부를 알현하고 인사 올리는 데뷔탕트에 참여해야 했다. 스물두 살의 크리스티나는 데뷔탕트 대상이었다.
“저, 저는 이미 결혼했는데……. 데뷔탕트의 대상이 될 수 있나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레이나가 떠듬떠듬 물었다. 황태자가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데뷔탕트를 이미 한 여성도 혼인한 후에는 ‘남편 누구의 부인’이라고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앞에 다시 인사드릴 수 있는 알현 초대를 받게 되는 게 원칙인걸요. 영애의 경우는 ‘줄리어스 후작 영애’의 데뷔탕트도 있고 ‘아서의 부인’으로서 인사드릴 자격도 있으니 알현 초대장이 두 개나 나가겠는데요.”
레이나는 그만 숨을 멈춰버렸다. 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앞에 건 생략되지 않을까요?”
황태자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런가? 하지만 데뷔탕트는 평생 한 번인데, 영애만 못 하면 쓰나.”
“!”
황태자가 레이나를 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서운하시게 할 순 없지. 혹시라도 초대장 따로 안 나간다고 하면 내가 가서 얘기할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레이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황태자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내가 말 안 해도 빼먹지 않을걸? 황제 폐하의 아들이자 내 형제고, 개선식의 주인공 ‘아서’의 부인인데. 전쟁 때문에 열일곱 살 때 데뷔탕트도 못하고 혼인한 레이디인 걸 전 제국민이 다 아는 마당에 결혼 이미 한 부인이라는 이유로 그걸 빠뜨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