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용맹하신 후작 각하2021.11.25.
"……!"
아서를 찾아온 목적인 부실 보급 건에 대해 생각이 미친 후에야 아까 기사의 말에서 느끼지 못했던 뼈를 깨달은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희를 책임지며, 통솔하고, ‘먹여 살려 주는’ 상관은 ‘아서 줄리어스’ 총사령관 각하입니다. ‘당신이 아닙니다.’」
이 기사들 전부. 그가 아서에게 부탁해 입막음해야 하는 상대들이었다.
“…….”
후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뒤늦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꼬리를 내리며 기선 제압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건 평민까지 섞여 있는 기사들 앞에서 있을 수 없는 망신이었다. 어쨌든 아서가 이놈들의 통솔권자 아닌가. 그는 기사들 앞에서 보란 듯이 자신과 아서의 위계를 보여 주리라 결심하고 당당하게 집사장의 팔을 뿌리쳤다.
“마침 잘 나왔네.”
후작이 턱을 치켜들었다.
“자네,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아서가 차갑게 눈동자만 움직여 그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네. 마침 저도 제 공간에 대한 말씀을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입니다. 그런데 경우 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군요?”
후작 부인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아! 아, 미안해요, 아서 경! 그건 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택에서 경의 공간을 따로 배정할 계획은 미리 다 해 두었던 참입니다. 제가 후작님께 미처 말씀드리지 못해서 실수가 있었어요.”
아서의 눈동자가 후작 부인에게로 향했다. 압박감을 느낀 부인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쓰고 계시는 침실과 경의 전용 응접실, 집무실, 서재, 보조 침실, 따로 있는 조찬실이랑 만찬실까지 아서 경의 공간입니다. 제가 너무 늦게 알려드렸네요. 아, 내 정신 좀 봐. 원한다면 개인 정원과 온실까지 배정을……!”
“나중에.”
아서가 부인의 말을 끊었다.
“!”
그리고 후작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제 부하를 폭행하셨습니까?”
“!”
후작 부인은 제발 후작이 여기서 더 실수하지 않길 바랐다. 제발 실수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 하지만 후작은 득의양양해서 턱을 쳐들고 말했다.
“저놈이 먼저 나에게 실수를 했네. 자네는 그것에 대해선 묻지 않나?”
아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무슨 실수를 했죠?”
쯧, 혀를 차며 후작의 목소리가 당당하게 커졌다.
“저놈들이 내가 자네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라며 무례하게 막더군. 이곳은 내 저택이고 자네는 내 사위인데!”
아서가 담담하게 답했다.
“허락하지 않은 것이 맞습니다. 이미 후작 부인께서 같은 실수를 하신 바 있어 제가 그리 막았습니다. 못 들으셨습니까?”
뭐? 후작 부인이 움찔하고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아서의 말이 이어졌다.
“단둘이 있던 저와 아내의 침실에 허락 없이 들어오셨죠. 제가 그런 당황스러운 일 없도록 막아 달라 부탁했습니다. 당연히 허락을 먼저 구하셨어야 했던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후작 부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큰 소리가 나자 아래층에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눈치를 보며 당황스러워 숨는 하인 하녀들만이 아니라, 아연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는 주치의 앨빈 로렌슨, 오늘의 약속을 위해 와 있던 손님들, 그리고……. 렘브란트 경이었다.
“!!!!!”
후작 부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겨, 경! 미안합니다! 그건 제가 이미 실수라고 사과 드렸었……!”
아서가 다시 그녀의 말을 잘랐다.
“허락을 구하셨다면 만나 드렸을 텐데요. 허락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으시고 제 부하를 폭행하셨습니까?”
다른 기사가 대신 답했다.
“후작님이시니 사령관 각하께 찾아오셨다 전해 드리고 여쭤보겠다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신 직후 리오넬 경을 폭행하셨습니다.”
아래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모여들고 있었다. 집사장 짐이 황급히 손님들을 방으로 밀어 넣으려 했지만 수습이 될 리가 없었다. 당황한 후작이 발을 구르며 악을 썼다.
“요, 용무가 급한데 무례하게 굴며 막기에 그랬네!”
“무슨 용무였나요?”
후작이 발악하고 있었지만 아서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후작이 길길이 뛰었다.
“밖에서 허튼소리가 돌고 있는데 참전 용사들이 섣불리 입을 놀리는 것 같기에 자네에게 정정을 부탁하려 했네! 그런데 저놈이 무례하게 나를……!”
후작 부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후작이 하려던 말이 부실 보급 건에 대한 이야기인 걸 단박에 알아들었다. 이 미친 사람! 그러면서 기사의 따귀를 후려갈기는 정신 나간 짓을 벌여? 후작 부인은 비틀거리며 손을 내젓다가 간신히 계단 난간을 짚었다. 아무리 아서가 그들을 이끄는 총사령관이라도, 이런 꼴을 보고 아래 기사들에게 그런 명령을 해 줄 리가 없잖아. 이 꼴을 기사들이 다 봤는데, 아서가 자신의 권위를 깎아 먹으면서 그런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잖아! 아서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냉소했다.
“군인 무서운 줄 모르시는군요. 하긴 황실 모독 무서운 줄도 모르시는 용맹하신 분이셨죠.”
“!”
후작 부인은 그만 뒷목을 잡고 쓰러져 버렸다. 살짝 침실 문을 열고 그 사태를 모조리 지켜본 레이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름답게 치장한 크리스티나는 자기 방 문 앞에 우뚝 서서 그 장면을 보고 있다가 끔찍하다는 듯이 이마를 짚고 문을 닫았고. 씰룩이는 입가를 간신히 억누르며 자기 별채로 돌아간 렘브란트는 배를 잡고 웃었다. 줄리어스의 사흘째. 그날의 방문자들과 예정되어 있던 남은 약속들은 모조리 취소되었다. * * *
영지 밖의 주둔지를 살피고 오느라 뒤늦게 저택으로 돌아와 상황을 전해 들은 루칸은 불을 뿜었다. 케이는 놀란 얼굴을 했으며, 트리스탄은 묵묵히 눈살을 찌푸렸다. 황망해진 레이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들을 아서의 응접실로 들였다. 레이나는 표면적으로 ‘크리스티나’인 상태였기에 아버지의 만행에 불쾌할 기사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이마에 수시로 바르라고 로렌슨 선생님이 주고 간 약이 생각나서, 레이나는 얼른 침실로 건너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양해를 구하고 리오넬의 얼굴에 약을 발라 주려 했지만, 레이나는 순식간에 케이에게 그 역할을 빼앗기고 자리를 넘겨주었다.
“나 때문에 참았겠군.”
“…….”
아서가 씁쓸한 얼굴로 부하에게 사과했다.
“내 체면을 생각해 자비를 베풀어 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
레이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들의 앞에 서서 눈치를 보았다. 이 기사님은 내가 가짜 크리스티나라는 걸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을까.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후작의 행패에 제가 다 민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 되었습니다.”
케이가 약을 덮고 물러나자 레이나가 대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리오넬이라는 기사는 머쓱한 얼굴로 애매하게 머리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민망하군요. 리오넬입니다, 레이디.”
레이나는 미안해하면서도 그에게 손등을 내주었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루칸입니다, 레이디. 반갑습니다.”
레이나를 처음 보는 루칸도 덩달아 레이나의 손을 받아 손등에 입 맞추며 통성명을 했다. 이 사람들 다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하지만 그들의 앞에서 철저하게 크리스티나로 있으라, 빌미를 주지 말라던 후작 부인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레이나는 치마를 쥐고 무릎을 굽혀 조그만 소리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크…… 크리스티나입니다.”
루칸은 더듬더듬 인사하는 레이나를 가만히 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트리스탄이 시선으로 눈치를 주었다.
“…….”
역시 다들 아는구나. 그래도 적대적으로 비웃는다기보다는 안됐다는 투라서 레이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케이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말했다.
“리오넬 경, 욕봤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저택에서 아서 경의 공간이 분명해졌네요. 나쁘지 않은 결과입니다.”
레이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리오넬 경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웃다가 아픈 듯이 찡그렸다. 그도 이미 예상한 결과인 듯했다. * * *
“침실과 전용 응접실, 집무실, 서재, 보조 침실, 조찬실, 만찬실. 그리고 개인 정원과 온실이었죠? 기사들을 불러들여 지키는 범위를 좀 더 늘려야겠네요.”
루칸이 물었다.
“오찬실은 왜 없어요?”
케이가 답했다.
“오찬실은 저택 중앙에 하나뿐이더군요. 점심 한 끼 정도는 가족이 한데 모여서 먹으라는 의미겠죠. 보통 만찬실이랑 조찬실도 두 개씩 있는 저택은 잘 없습니다. 점심이야 만찬실이나 조찬실에서 먹으면 되긴 하고요.”
“아.”
다른 기사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럼 저흰 이제 어디부터 어디까지 지키면 되죠?”
“응접실이랑 서재 사이 방은 포함이 안 돼 있나요?”
“좀 더 요구할 순 없을까요? 기사들이 머물 공간도 있으면 좋을 텐데요. 시녀들도 방 따로 있던데.”
한마디씩 기사들이 덧붙였다. 잠시 후, 듣고 있던 케이 경이 고개를 좌우로 꺾어 뚜둑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그럼 대충 접수했고. 따내 오겠습니다.”
그리고 후작 부인을 만나러 간 케이 경은 저택의 2층 이상 남서쪽 전체의 공간과 별도의 별채 세 채, 그사이의 개인 정원, 두 개의 온실, 기사들이 머물 공간과 연무장으로 쓸 정원 내 공터를 아서의 것으로 받아내 왔다. 드넓은 후작 저택의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공간이었다. 돌아온 케이가 아서에게 하는 전리품 보고를 들은 기사들이 함께 주먹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이예에!”
아서가 싱긋 웃었다.
“다들 저녁 식사했나? 나와 아내도 먹다 말고 나와서 아직인데.”
기사들이 씩 웃었다.
“저희도 아직입니다.”
그들은 제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만찬실로 내려갔다. 아서는 레이나와 리오넬을 좌우에 앉히고 특히 리오넬을 신경 써 주었다. 레이나는 처음엔 내가 왜 여기 껴 있나 어색해했지만, 이내 함께 어울리며 웃었다. * * * 앞다투어 줄 선 상단 대표들과의 약속들은 아직 취소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명예’가 중요한 가장 고귀한 유력가 귀족들과의 약속은 모조리 취소되기 시작했다. 상단들도 겉으로는 흔쾌했지만, 귀족들이 발을 빼고 사태를 관망하는 걸 보고 태도들이 미적지근해지기 시작했다. 막상 이야기를 본론으로 진전시키려 하면 다들 한발씩 물러나며 ‘좋은 날이고 축하하러 온 것이니 즐겁고 편한 이야기나 하고, 그런 복잡한 건 천천히 이야기하자.’라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앞다투어 제시하던 파격 조건들과, 바라는 것 없이 젠틀한 카드가 동봉된 초호화 선물들은 뚝 끊겼다. 들어오다 말고 잘못 배달되었다며 나가는 선물까지 있었다.
“…….”
약삭빠른 줄리어스의 본능이 경고를 보내왔다. 이미 약속된 상단들과의 이야기도 말이 바뀌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대로는 안 되었다. 줄리어스 후작이 벌게진 눈으로 집사장을 불러들였다.
“짐.”
“예, 주인어른.”
“아서한테 가서…….”
후작은 한참 말을 고르다 말했다.
“……약속을 잡으러 왔다고. ……원하는 시간에 내가 찾아가겠다고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