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누가 이랬어2021.11.21.
레이나가 침대 속에 넣어 꾸물거리던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머쓱하게 미소 지었다.
“기사분들이랑 말씀 잘 나누셨어요?”
아서가 싱긋 웃었다.
“자릴 비워서 미안하오.”
“아니에요. 덕분에 혼자 편히 쉬었어요.”
아서가 침대 가까이 와서 앉았다. 왠지 그가 자신의 곁에 와 앉는 것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에 그건 꿈이었을까? 물어볼 용기가 있다면 좋을 텐데. 레이나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며 다른 일을 물었다.
“저, 유가족 분들은…… 다 만나 보신 거예요?”
“신경 쓰이나 보군.”
레이나는 자신이 신경 쓰인다고 해 봤자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위선적으로만 보일 것 같아 그저 작게 “그냥…….” 이라고만 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서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레이나의 머리를 가볍게 툭, 짚어 쓰다듬어 주었다. 마음 써 줘 고맙다는 듯이.
“…….”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아서의 잘생긴 얼굴 옆으로 석양빛이 드리워졌다.
“몸은 어떻소? 속이 안 좋아서 아무것도 못 먹었다면서. 뭐 간단한 수프라도 들어야 하는 거 아니오?”
마침 배가 고팠다. 아서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 허기가 느껴졌다. 좀 전에 약을 먹은 덕인가 속은 훨씬 편안해져 있었다.
“네, 배고파요…….”
해가 다 떨어져 가도록 종일 앓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밍밍한 수프 같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래야 아서 경도 맛있는 걸 먹겠지? 항상 나랑 같이 식사하시니까……. 레이나는 슬그머니 용기를 내서 말했다.
“……수프 말고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
아서가 웃었다.
“그럽시다. 확실히 몸이 괜찮아진 것 같아 다행이군.”
레이나가 미소 지었다. 아서가 종 줄을 당겨 식사를 부탁했다.
“소화가 잘 되고 맛있는 걸로. 수프도 같이.”
하녀가 아니라 아서의 부하로 보이는 기사가 들어와서 명령을 받고 나갔다. 기사가 나간 후 아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앞으로 내가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땐 기사들이 문밖에서 자리를 지킬 거요. 의사나 하녀들이 들어오거든 안에 들어와서 함께 있을 거고.”
“아…….”
레이나가 작은 감탄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종 줄을 한 번 당기면 기사가 올 테니, 하녀를 부를 필요가 있을 때는 종 줄을 두 번 당기시오. 따로 위에서 내려온 말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도록 말해 두었으니 그리 알아 두고.”
“네.”
레이나는 고마운 편안함을 느꼈다. 왤까. 그게 그저 아서에게 필요한 감시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후작 부인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선가.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진심이 담긴 쑥스럽고도 감사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선물한 손수건은?”
레이나가 웃으며 손목을 삭 들어 보였다. 소매 속에 팔찌처럼 감아 묶어둔 손수건이 보였다. 발간 석양이 손수건의 하얀 레이스를 노을빛으로 물들였다.
“음. 머리를 묶는 데 쓸까요?”
아서가 미소 지었다.
“그대 좋을 대로.”
퍼뜩 레이나가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다.
“아, 그러고 보니 트리스탄 경에게 손수건을 빌렸었는데.”
그리고 당황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그것을 찾았다. 아서가 싱긋 웃었다.
“내가 돌려줬소.”
* * * 오래 걸리지 않아 식사가 날라져 왔다. 레이나는 아서의 부축을 사양하지 않고 손을 잡고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았다. 레이나는 음식이 차려지는 동안 설레는 걸 숨기지 못한 채, 냅킨을 무릎 위에 얹고 자꾸만 손바닥으로 누르며 음식 접시가 날라져 와 식탁 위에 놓이는 걸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서가 그런 그녀를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었지만 레이나는 알아채지 못하고 음식만 쳐다보았다. 배가 고프고 몸이 회복되니 식욕이 돌았다. 종 줄만 당기면 언제든 뚝딱하고 대령되는 든든하고 맛있는 식사는 레이나가 아가씨의 대역을 하며 그 무엇보다도 좋은 호사라고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호화로운 식사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생각이 나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식사 잘하고 계실까? 간병인 분들께서 식사까지 챙겨주고 계신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좋은 식사는 못 하실 텐데.
‘늘 잔뜩 남는데……. 할머니도 같이 먹을 수 있으면 좋을걸…….’
테일러를 만나게 되면 할머니의 평소 식사에 대해서도 물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그때, 식사를 옮겨 오기 위해 열려 있던 문으로 기사 하나가 인기척을 내고 들어오더니 아서에게 작게 낮춘 목소리로 무언가를 보고했다.
“…….”
레이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서는 레이나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먼저 먹고 있으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레이나는 어리둥절하여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 * *
아서를 만나려고 그가 있다는 전용 응접실로 찾아가던 후작은 계단 위에서 통로를 지키던 기사들에게 제지되었다. 어이가 없어진 후작이 눈을 치켜뜨고 기사를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후작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저택에서 이렇게 제지되어 본 적이 없었다. 내 저택에서 감히 날 제지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기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미리 허락된 사람이 아니면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누가? 아서가? 허락된 사람? 내가 허락된 사람이 아니야? 어처구니가 없어 질문이 나왔다.
“내가 허락된 사람이 아니면? 허락된 사람이 누군데?”
기사가 답했다.
“아침에 기상하신 후 하녀 한 명 혹은 두 명. 그리고 오전 11시에 주치의 선생. 그리고 각하의 최측근 기사들. 그 외에는 사전 허락이 없으셨습니다.”
후작이 어이가 없어 기사를 바라보았다. 내가 포함이 안 되어 있어? 이 집의 가주인 내가? 기사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후작 각하이시니, 사령관 각하께 찾아오셨다 말씀드리고 여쭤보겠습니다.”
기사는 하급 기사를 부르기 위해 짧게 옆쪽을 보며 턱짓했다. 그러나 그 고개가 다시 정면을 향하기도 전, 짜악―! 후작이 냅다 기사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미쳤군. 여기가 누구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후작이 버럭 소리쳤다.
“…….”
뺨을 맞은 기사가 찢어진 입꼬리를 핥으며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씩 웃으며 하……. 헛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옆에 있는 기사들이 모조리 검을 빼 들었다.
“……!”
후작은 칼을 뽑아 든 기사들을 보며 당황스럽다 못해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무력 집단 앞에서 호위를 대동하지 않은 스스로의 모습이 갑자기 이상하고 기묘하게 느껴졌다. 저택 안에서 이런 식으로, 칼을 든 무사의 호위가 필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 내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지금 네놈들……! 아서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시키더냐!”
후작이 격노해 소리쳤다. 기사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줄리어스 후작 각하.”
서슬 퍼런 무기를 겨눈 군인들의 시선이 후작에게 집중되었다. 갑작스러운 위협감을 느낀 그가 발악하듯 고함쳤다.
“여긴 내 집이야! 나는 이 땅의 영주고! 너흰 내 땅의 징집병들……!”
“후작 각하.”
뺨을 맞은 기사가 정중하고 담담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의 표정을 본 후작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고귀하신 후작 각하께서는 군인이셨던 적이 없으셔서 모르시는 것 같으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군인이고, 저희를 책임지며, 통솔하고, 먹여 살려 주는 상관은 ‘아서 줄리어스’ 총사령관 각하입니다. 당신이 아닙니다.”
절제된 미소 속에 기사의 눈빛이 싸늘했다.
“후작 각하께서는 저희에게 명령할 그 어떤 권한도 없으십니다. 이곳이 당신의 저택인지 아닌지는 군인인 저희가 알 바 아닙니다. 우리의 명령권자는 아서 경이시고, 여긴 아서 경이 명령한 호위 범위이며, 당신이 그걸 침범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기사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내가 군인에게 적대적 무력을 행사하고 있는 당신을 즉결 처분하지 않는 건, 당신이 이 땅의 영주라서, 혹은 이 집의 주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아서 경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물러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서 경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내 권한으로 즉결 처분하겠습니다.”
그저 흔들리지 않게 검을 겨눈 채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기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를 둘러싼 군인들의 기세가 후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후작이 주춤, 간신히 뒷걸음질이 아닌 제자리걸음을 했다. 분노한 얼굴로 양발의 무게중심만 바꾸는 그의 신형이 뒤뚱거렸다.
“즉결 처분? 여기가 전쟁터도 아니고 전쟁은 이미 끝났는데 무슨……!”
기사가 비웃는 듯 웃었다.
“모르시는군요. 수도에 가서 정식 개선식을 한 후에야 저희는 황제 폐하의 명령 하에 소집 해제가 되고, 저흰 그때까지 총사령관 아서 경 밑에 속해있는 군인입니다. 일반인인 당신의 명령에 좌우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
그때, 뒤쪽에서 다급하게 드레스에 스치는 발소리가 울렸다.
“안토니오!”
집사장을 대동하고 황급히 달려온 후작 부인이 새하얘진 얼굴로 올라와 그를 붙잡았다.
“기사들한테 무슨 짓이에요!”
“놔 봐. 이놈들이 지금……!”
후작의 앞에 선 기사의 뺨에 남은 손자국과 터진 입술을 보고 부인은 그의 팔을 때리며 기겁했다.
“미쳤어요!”
후작 부인이 황급히 후작의 팔을 잡아끌었다. 후작은 이거 놔라, 놓아라! 하면서도 후작 부인의 팔에 맥없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를 층계참까지 끌고 온 후작 부인은 그의 등을 떠밀어 집사장에게 던져 버린 뒤, 어쩔 줄 모르며 다시 몸을 돌려 후작에게 맞은 듯한 기사의 앞으로 걸어 올라갔다.
“미안합니다, 경! 후작님이 큰 실수를 했어요. 요즘 스트레스가 많은지라. 후작님도 진심이 아니었을 거예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미친 인간……! 크리스티나가 모처럼 마음을 잡고 아서와 분위기 좋게 일을 풀어가려는 찰나에 이런 사고를 치다니! 일을 어떻게든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후작 부인은 진심을 다해 고개까지 숙여 사과했다.
“나중에 사과하러 다시 오겠습니다. 이름을 알려 준다면 반드시 내가 다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리오넬.”
“!”
계단을 삼 분의 이 너머 내려가던 후작과 집사장을 포함해, 기사들과 후작 부인, 공간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위로 집중되었다. 기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아서의 웃는 얼굴에 명백하게 서늘한 불쾌감이 드러나 있었다. 긴장감으로 꽉 찬 침묵.
“…….”
아서가 냉랭한 눈으로 상황을 둘러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그리고 기사의 앞에 멈춰 선 아서는 그의 상처 입은 얼굴을 한번, 그리고 후작과 후작 부인의 얼굴을 한번 차례로 바라보았다. 아서의 시선이 천천히 다시 기사에게로 돌아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서를 보자마자 자신의 방문 목적을 떠올린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실 보급……! 부실 보급 건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해야 하는데? 후작은 갑작스레 당황스러워져 자신이 때린 기사를 쳐다보았다. 뺨을 맞은 기사는 아서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듯 조금 굳은 표정을 하며 고개를 반대로 돌려 얼굴을 감추었다. 그러나 아서가 그의 턱을 들어 올려 얼굴을 확인했다.
“누가 이랬나?”
“…….”
기사는 아서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 듯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서의 시선이 범인을 찾아 움직였다. 가장 먼저 그 앞에서 당황한 채 사과하고 있던 후작 부인에게. 그리고 집사장에게 팔을 잡힌 채 계단 아래로 내려가던 후작에게로. 움직이던 아서의 시선이 멈추었다.